187.남로당의 군사총책이 목사였다
[[제1387호]  2013년 10월  26일]
 

저 참혹했던 1946년 10월 1일 대구 폭동 사건의 주동자는 당시 해주에 있었던 남로당의 수괴 박헌영과 현지 대구에 있었던 남로당 군사총책 이재복 목사였다. 그 전 9월 폭동에도 최문식 목사와 함께 사전 모의를 주도하였다.

이재복 목사는 누구인가. 우리가 더듬을 수 있는 것은 그가 1903년생으로 1939년 이재봉이라는 이름으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경도의 동지사대학을 졸업한 뒤 거기 있었던 평양 숭의여고 출신으로 산파학원에 다니고 있던 공지길과 결혼하였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후 그는 귀국하여 경북 영천 읍내의 중앙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했다고 하나 확실히 알아볼 길이 없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인민당에 입당하고 경북인민위원회의 보안부장을 거쳐 박헌영의 신임을 받아 남로당 군사부 총책이라는 위치에 파격적으로 승진을 한 인물이다. 아마 그때만 해도 그만한 학벌을 가진 공산주의자가 없었다는 뜻도 될 것이다.

이재복은 다시 1947년의 제주 4·3사건, 1948년 8월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0월 19일에 터진 여수 14연대의 반란사건(여수 순천사건)도 주동한다. 당시 남로당 빨치산 군사책인 이중엽의 지령을 받고 여수 연대에 침투해 있는 지창수 상사에게 지령을 내려 그 연대 안의 프락치들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전 육군에 퍼져 있는 공산당 군인들이 호응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반란은 10월 27일에 국군의 여수 탈환으로 일단락 되었는데, 여수에서만 민간인 희생 1,200여 명이고 부상자는 1,250여 명, 행방불명은 3,500여 명, 이재민 9,800여 명이란 피해를 남겼다. 이들 피살자 중에는 손양원 목사의 아들 동인과 동신이 있었는데, 이들은 10월 21일의 인민재판에서 총살되었다.

잠적했던 이재복은 1949년 12월18일 제1연대 정보관 김창룡 대위 이하 3명에 의해 서울 성동구 신당동3 77번지에서 체포된다. 이재복은 이근민, 박영근, 오일환, 이일도 등 네 개의 가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재복이 마지막 잡힐 때에는 그의 셋째 부인의 집이었다. 당시 남노당 간부들은 자기들의 은신처 확보를 위해 본부인 말고도 둘째, 셋째 부인들을 두고 있었다. 그는 김창룡 대위의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1주일 동안 전혀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이때 김창룡은 이재복이 목사인 점을 감안하여 “마지막 가는 길에 기독교를 위해 헌신하라 남한 내의 교회들이 살아남는 길은 당신이 남노당원의 명단을 넘겨주는 일”이라고 설득하자, 500여 명의 남노당 명단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마지막 가는 길에 좋은 일 하나 한 셈이다.

김창룡은 이재복에게 조국의 품에 되돌아올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자기가 대한민국 국민을 이렇게 많이 죽였는데 살아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느냐고 하면서 끝내 전향을 거부하였다. 그는 1949년 5월 26일 여수반란의 주모자 가운데 한 사람인 최남근 중령과 함께 수색에서 총살되었다.

 

민 경 배 목사<백석대학교 석좌교수>

http://jangro.treem.kr/Jold/detail.htm?aid=1384235348&PHPSESSID=byyjrlnqh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