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계가 가진 대학자로서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 청렴결백한 것을 넘어 빈한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도 많지만[36]
실제로는 당대의 양반들이 으레 그러했듯 퇴계 역시 재산 치부에 꺼리낌이 없었으며 조금 부유한 정도가 아니라 한 지역의 대부호에 가까웠다.
이황이 죽고 나서 자식에게 상속한 재산의 분재기(分財記)에 따르면 이황 집안의 토지는 전답(논밭)이 합계 3000두락으로 약 36만 4천 평에 달하였고
노비가 남녀 합쳐 370명에 달하였다.
당대 사림 지주들의 평균적인 재산이 논밭 300두락에 노비 100여 명이었음을 비교해 보면 당시 기준으로도 꽤나 부유했던 편인 것.
뿐만 아니라 이황은 직접 집안일에 나서서 재산 치부에도 여념이 없었는데
가령 집안의 노비들을 양인과 결혼시켜 자식을 낳게 하고 노비의 숫자를 불리려는 생각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자식들에게도 가르칠 정도였다.[37]
청빈을 자랑으로 여긴다던 성리학자 사림파들 중에서도 조선조 최고의 유학자라고 불리는 사람조차 실제로는 수백 명의 노비를 부리던 대부호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수백명의 노비들을 부린것도 모자라서
노비들한테 강제로 자식들을 낳게해서
자기소유의 노비들 숫자늘렸음 ㅋㅋ
심지어 노비의 숫자를 늘리는 방법을 자기 자식한테 가르쳐줘서
노비들을 죽을때까지 괴롭히는것도 모자라서 대대손손 고통을 이어가게 함 ㅋ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