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_3ilivmv7ppneyimGvrted96CDc2BcZK7rNwqF1DxGGh6VzqMZUQ7nawg0zfXxUZOB2DsaAOYnb6V0j_HXd_yYGAeCWLSV2w-Z91PluDqczgauBUds_jicEqUEhVy4tj2Nd6GLx1IVo_NbkL6ypog.webp.ren.jpg 솜 전투로 보는 참호전 전술과 작전의 변화


1916년 7월 1일에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솜강의 북부와 남부에서 무인지대에 올라섰다

수십만명에 달하는 영국 청년들이 마주한 운명은 영어권에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서부전선의 상징적인 모습이 되었다

즉 용감한 희생과 수많은 보병이 멍청하고 형편없는 지휘를 받아 적 참호체계에 희망 없이 정면돌격을 한 학살이다

두두두-하는 기관총 발사음이 솜 전투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의 리듬을 지배한다

1916년 7월 1일에 영국군이 입은 56,886명이라는 사상자가 솜 전투의 어리석음과 영국 장군들에 대한 최종 평가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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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에선 솜 전투를 설명하는 내러티브에서 프랑스군을 배제한다

전투 막바지엔 프랑스군이 영국군과 영연방군을 합친 것보다 많았음에도 말이다

이 맹점은 너무 지배적이어서 영어권에서 만들어진 거의 모든 지도가 솜강 남쪽에 프랑스군이라는 글자만 쓰고 비워둔다

이는 솜 전투에 대한 근본적인 왜곡을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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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국경 전투의 프랑스군과 솜 전투의 프랑스군 사이엔 공통점이 없다

전쟁 전 프랑스군은 끊임없이 요동쳤다

드레퓌스 사건, 피슈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군은 민간 사회의 존경을 받기 힘든 집단이 되었다

훈련이 형식적이라 병사들이 복무기간 동안 시간만 보내다 전역했다

복무기간이 2년으로 줄어들며 부사관단의 양과 질이 무너졌다

전역 전에 여름 기동훈련에 참여하여 프랑스에 거의 없던 넓은 훈련소를 본 병사는 운이 좋은 것이었다

사격훈련도, 제병협동 훈련도 거의 없었다

포수들은 가장 기초적인 기술만 배웠기에 차폐사격을 연습할 기회도, 심지어 포를 조준할 기회도 없었다

1914년 전에 프랑스 포병훈련은 정면에서 밀집대형으로 전진하는 개활지의 적을 상상하며 이루어졌다

표적에 정확히 조준하는 대신, 특정 지역을 포탄 파편으로 뒤덮으라고 지시했다

1914년 8월에 마침내 독일군과 충돌했을 때 벌어진 일은 당연한 결과였다

프랑스군은 초기 5달 동안 30만명의 전사자라는 엄청난 값을 치루었다

1914년 기동전이 서부전선의 모든 시간 중 가장 치명적인 시기였다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내려면 급진적이고 효율적인 변화가 필요했고, 그 책임은 총사령관 조프르에게 있었다



Portrait_de_Joseph_Joffre_(cropped)(b).jpg 솜 전투로 보는 참호전 전술과 작전의 변화


조제프 조프르는 1차대전사에서 가장 낯부끄러운 찬사와 가장 적대적인 비난을 동시에 받은 사람이다

그는 1911년에 참모총장으로 임명받았고, 기념비적인 업적을 세웠다

그가 임명될 당시 프랑스군엔 교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현대식 중포 생산이 독일에 크게 뒤떨어져 있었다

독일이 침공할 시 러시아와 영국의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조프르는 이 세가지 문제에서 엄청난 진전을 이루어냈다

특히 마지막 문제에서 말이다

사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장교단의 질이었다

이는 조프르가 아직 에콜 폴리테크니크 학생이던 1871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문제다

게다가 1900년초에 유능한 장교들이 보수주의자, 카톨릭주의자라는 이유로 제거되기도 했다

반면 공화주의자이기만 하면 무능하더라도 승진이 쉬웠다

수십년에 걸쳐 무능한 장교가 쌓였기에 이 문제는 평시 인사조치로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전시가 되자 조프르가 8월 13일부터 리모자주를 일으켰다

프랑스 장교들의 리더십이 완전히 재구축되었고, 고작 1달 만에 완전히 다른 군대로 탈바꿈해 마른 전투에서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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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강의 기적 이후, 바다로의 경주 중 프랑스군은 새로운 도전과제를 마주했으니, 바로 참호전이다

프랑스군은 기동전을 전혀 준비하지 않은 채였고, 참호전은 그보다 두배로 준비하지 않은 채였다 

독일군이 700문의 현대식 중포로 무장한 채 전쟁을 시작한 반면, 프랑스군은 100문의 현대식 중포로 전쟁을 시작했다

이는 일반적으로 독일군의 사상이 프랑스군보다 진보했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지지만, 이런 해석은 조심해야 한다

독일은 오랫동안 프랑스 침공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예상하는 방식에 적합하게 무기체계를 준비한 것이다

슐리펜 계획은 벨기에를 거친 프랑스 북동부 진격을 방해하는 다수의 요새를 극복할 과제로 여긴다

독일군은 이에 따라 요새 점령에 필요한 도구를 생산하거나 확보하는 데 집중했고, 적어도 벨기에에선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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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의 상황은 반대였다

프랑스군은 진격하는 독일 보병을 빠르게 분쇄할 수단이 필요했다

개방형 조준경으로 속사하는 75mm 야포가 여기에 가장 적합한 수단이었다

이 시나리오가 고전적이고 19세기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독일군의 보고서는 1914년 기동전 중 75mm 야포가 대부분의 전술적 상황을 해결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프랑스군의 전전 전술적 사고가 일부 역사학자들의 주장만큼 뒤떨어지지는 않았음을 시사한다

위에서도 설명한 포병 훈련 결핍과 장교단의 질이 심각한 문제였을 뿐이다

하지만 75mm 야포는 참호전에 적합하지 않았다

화력이 부족했고, 부앙각도가 낮아 언덕 후면의 표적을 타격할 수 없었다

75mm 야포는 프랑스군의 주력 화기라는 위치를 포기하고 리마이로 155CTR같은 중포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CTR은 단포신 속사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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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12월, 북해와 알프스 산맥 사이에서 프랑스군이 경험한 첫 참호전은 재앙이었다

루이 모뒤이 장군의 제10야전군은 중포 부족 때문에 3일 동안 휘청거리는 사람처럼 공격했다

16일과 18일 사이에 10군단, 21군단, 33군단이 동시에 공격하지 않고 순서대로 공격했다

모뒤이는 날짜가 변할 때마다 중포 전체를 다른 군단으로 옮겼다

이는 부족한 자원을 최대한 집중하여 쓰기 위한 발상이었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위치에서 제원을 다시 얻어야 하게 만들었고, 공격준비사격으로 효과를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프랑스군이 큰 사상자를 입었다 



1200px-Ferdinand_Foch_by_Melcy,_1921.png 솜 전투로 보는 참호전 전술과 작전의 변화


첫 참호전 공격작전인 1차 아르투아, 샹파뉴 전투는 몇가지 교훈만 남기고 재앙으로 끝났다

2차, 3차 아르투아 전투는 솜 전투에서 페르디낭 포슈가 지휘한 프랑스군이 사용한 교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솜의 제6야전군 사령관 에밀 파욜도 아르투아 전투를 지휘한 장군이다

1차, 2차 아르투아 전투에서 파욜은 제70사단장이었고, 3차 아르투아 전투 전에 33군단장으로 승진한다

1차 아르투아 전투 준비 중, 포슈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강조했다

"신속한 진격은 중요도가 덜하다. 각 목표모다 조심스럽게, 단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필수이다."

포슈는 참호전 초기부터 밀도높은 참호망에 떼거지로 달려들어 넓은 구역을 휩쓰는 대신 

언제나 느리지만 체계적으로, 철저히 준비하여 전진해야 함을 깨달았다

파욜은 포슈보다도 느리고 조심스럽고 체계적인 접근법에 헌신했다

그는 포슈를 포함한 상관들을 자기가 준비를 끝내기 전에 공격하라고 명령했다며 비난했다

두 사람은 1915년에 체계적인 공격준비사격만이 최소한의 사상자로 보병 공격에 성공할 기회를 준다고 철저히 확신했다

이 신념은 2차 아르투아 전투로 형태가 잡혔고, 다음 해 솜 전투에서 전투를 관리하는 방법이 되었다



Front-Artois-Janvier-1915-secteur_Arras.jpg 솜 전투로 보는 참호전 전술과 작전의 변화


1915년 5월 9일~6월 18일, 빅토르 뒤르발의 제10야전군이 프랑스군의 첫 다국적 참호 전투를 지속 유지하게 되었다

선봉대는 미래의 프랑스 원수 필리프 페탱이 지휘하는 제33군단이었다

5월 9일에 33군단의 모로코 사단과 77보병사단이 독일 참호로 쇄도하여 1시간 30분만에 비미 고지를 휩쓸었다

이는 프랑스군이 1915년에 달성한 가장 거대한 진격이었다

 프랑스군이 매우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진격할 수 있었던 까닭은 한 달 전에 발간된 참호전 교리 덕분이었다

그 교리는 솜 전투의 기반이기도 하였으며, 교범의 제목은 But et conditions d’une action offensive d’ensemble이다

참호전에서 기능할 수 있는 새롭고 급진적인 교리를 만들어내고자 했던 GQG가 몇달 동안 작업하며 만든 결과물이었다

4월 16일에 발간된 이 교리, 다른 말로는 5779번 문서는 1차 아르투아 전투와 1차 샹파뉴 전투의 교훈을 기반으로 한다

주제에선 총칙과 목표를 제시하고 거기에 보병전술, 포병, 방어전술을 깊게 다루는 부록이 따라붙는다

부록은 전쟁 내내 프랑스 군사작전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었던 두가지 전술적 원칙을 제시한다

첫번째는 이동탄막사격이고, 두번째는 오늘날 우리가 침투라고 부르는 전술이다

불행히도 5779번 문서는 1915년 가을 작전에서 참사를 일으킨 시대에 뒤떨어진 개념도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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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는 이러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공세행동의 목표는 적 참호 점령 뿐만이 아니라 적지에서부터 철저히 추격하여 재편할 시간없이 패배시킴에 있다."

이는 참호망 돌파라는 환상에 아직 집착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고급장교들이 프랑스군에게 주어진 부족한 수단에 상응하는 전술적 목표를 노리는 대신 지나친 야심을 품도록 촉구한다

다음 문장은 이러하다

"작전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복된 경험은 상세한 조직과 준비가 승리의 필수 요건임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준비 중 어느 것도 우연에 맡기지 않고 공격을 실행하기 전에 유리해지기 위한 모든 조건을 충족하여야 한다."

여기서 참호전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프랑스 장교들 사이에 격렬히 일었던 지적 전투의 일별이 보인다

전술 보다 전략에 치중해야 하는 상급지휘관들은 위험한 대규모 공격을 선호했다

즉 사상자가 높더라도 전략적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를 달성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한번의 전투로 적을 격멸하거나 적어도 심한 피해를 입히는 것이다

포슈, 페탱, 파욜은 이들과 달리 선견자였다

참호전의 본질 때문에 대규모 진격으로 빠른 전략적 승리를 거두기는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꿰뜷어 보았다

세 사람이 서로에게 반대하며 격렬하게 자주 싸우곤 했으나, 실제 아이디어는 비슷했다

근본적으로, 셋은 더 느리고 체계적이고 물자 중심적인 접근법을 믿었다

그들이 사용할 방법 일부는 5779번 문서에 이미 명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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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 포병, 방어전술을 다루는 부록은 분량도 훨씬 많고 세부적이다

 포병 부록은 이렇게 단호히 선언한다

"포병은 적의 축차 방어선에 대한 체계적인 사격으로 방어 보조물을 파괴하고, 대피호와 교통호와 측방진지를 파괴한다. 반복적인 충격으로 적의 사기를 꺾을 것이며, 보병 공격을 첫번째 목표물 뿐만 아니라 다음 목표들을 공격하는 동안에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준비할 것이다."

전쟁 발발 8개월 후 프랑스군은 교리에서도 만장일치로 포병이 보병을 지원하기만 한다는 개념을 바꾸었다

또한 부록은 이렇게 이동탄막사격을 최초로 성문화 한다

"보병 공격의 시간표에 맞추어 포병이 사정거리를 공격의 정면과 측방에서 점진적으로 늘리어 보병이 진격할 수 있도록 수직, 수평 탄막을 보호막으로 제공한다."

이동탄막사격을 영국군이 솜 전투에서 개발하고 프랑스군에 전수해줬다는 영어권 학계의 과거 주장과 달리

실제 이동탄막사격은 1914년 9월 27일에 프랑스군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즉시 부대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이를 심각한 포탄 부족 때문에 조프르가 직접 금지했다가 1915년 4월에 공식적으로 교리화 되며 금지가 풀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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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 부록 내용은 문서 본문에 명시된 원칙과 매우 유사하다

전략에 대한 훌륭한 아이디어와 절망적으로 구식이고 시대착오적인 요소가 나란히 존재한다

우선 보병이 멀리있는 목표를 노려야 한다며 돌파를 강조한다

이는 포병 부록과 직접적으로 대립한다

거기에 보병이 한 번에 하나의 진지만 점령할 것

공격 사이 충분한 시간을 들여 참호와 병참로를 재건할 것

휴식과 부상자에 치료에 전념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보병 부록은 보병이 선이나 종대가 아닌 산병선, 즉 느슨한 대형으로 전진해야 한다는 전전 교리를 재차 확인한다

밀집대형이 현대 화기 앞에서 기동도 사격도 못한다는 전쟁 전 프랑스군의 전술적 사고가 유지된 것이다

새로운 교리의 가장 혁신적인 요소는 네뚜아이외르 드 트헝셰다

첫번째 돌격제파는 적 강점을 지나쳐 적 참호망에 최대한 깊숙히 침투하도록 훈련 받고

두번째 제파는 칼, 리볼버, 수류탄으로 무장해 우회당한 기관총진지와 강점을 제거하도록 훈련 받는다

이는 프랑스군이 솜에서 매우 뛰어나게 구사한 전술이다

동시에 영국군이 전투 초기에 실패한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이러한 전술을 따르지 않았음에 있다 

적 강점을 우회하며 신속하게 뜷고 들어가면 특수한 훈련을 받고 특수한 장비로 무장한 후속 부대가 뒤따르는 이런 전술은

훗날 침투 전술 혹은 돌격대 전술이라고 불리는 개념의 초기 형태이며, 이는 독일군이 만든 전술 체계라는 착각이 만연했다

 


이러한 전술적 진보는 프랑스군이 2차 아르투아 전투 초반에 놀라운 성과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결국엔 충분하지 않았다

모로코 부대와 산악부대가 돌파구를 열었지만 양측방의 20, 21군단이 마을에 구축된 밀도높은 방어망을 빠르게 뜷지 못했다

전술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정교하게 만들었지만 프랑스군은 전술적 승리를 전략적 승리로 전환하지 못했다

1916년 솜에서 프랑스군이 영국군과 협력해 다시 한 번 전략적 승리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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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이 솜 전투에서 구사한 전술은 1915년에 5779번 문서를 따라 구사한 전술에 기원을 둔다

그 날 이후로 프랑스 장교들, 특히 포슈는 지속적인 반성을 통해 방법론을 끊임없이 개선했다

이 과정은 선형적이지 않았으며, 프랑스군 전체에서 필연처럼 일정한 속도로 진행되지도 않았다

프랑스군의 커다란 일부, 특히 카스텔노 장군같은 특정 상급지휘관의 부대에선 돌파가 가능하다는 믿음이 여전했다

1915년 봄의 2차 샹파뉴 전투에서 믿음이 시험받았다

카스텔노는 자기 부대가 48시간 내에 12km를 진격할 수 있다고 뽐내며 조프르를 납득시켰다

포병이 적을 파괴할 테니 독일 보병과 교전할 일이 없어 병사들이 총을 어깨에 멘 채로 그럴 수 있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프랑스 보병들이 그런 행운을 누리지는 못했다

2차 샹파뉴 전투가 제2야전군의 충격적인 진격으로 시작되긴 했다

그러나 며칠만에 공세가 무너지고 소모적인 고투로 빠져들어 독일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프랑스 공식사는 이렇게 서술한다

"샹파뉴, 아르투아 전투 이후 사령부의 사고방식에 매우 분명한 진화가 나타났다. 처음으로 1915년 전투 이후 모든 참여자가 다음 요점을 따르게 되었다. 전선 파열은 한 번의 껑충 뛰기로 이루어낼 수 없으며, 오랫동안 연쇄적으로 계속되는 일련의 노력으로만 이루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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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슈, 페탱, 파욜같은 상급지휘관이 제안한 방법론을 마침내 GQG가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다음 대전투를 누구보다 조심스럽고 체계적인 계획을 세울 포슈와 파욜이 맡게 되었다

1915년 12월에 솜 전투가 제안되었을 때 구상은 2차 아르투아 전투처럼 포슈가 이끌고 영국군이 지원하는 것이었다

베르됭 전투 때문에 실제론 반대가 되었지만 말이다

1915년 실패를 철저히 반영한 포슈는 영국군과 어느 때보다 긴밀히 협조해야 함을 명심하면서

프랑스군이 솜 작전에서 구사할 방법의 기반이 될 교리 문서를 써내리기 시작했다

이 문서의 이름은 Enseignements à tirer de nos dernières attaques이며, 완성하여 배부한 날짜는 1915년 12월이다

이 문서는 5779번 문서에 담긴 개념과 포슈 자신이 지금껏 참호전에 대해 생각한 바의 확장이다

그는 전술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사상자를 최소화하기 위한 탄약량을 얻기 위해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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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슈는 거의 참호전이 시작되자마자 체계적인 전투를 지지했다

이번엔 더이상 한두개의 전술적으로 중요한 지형을 점령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때는 전쟁이 이년차였음에도 강도가 약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포슈는 프랑스군이 똑똑하게 싸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므로 노력을 크게 확대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는 몇주 동안의 전투가 아니라 전례없는 몇달 동안의 심층적인 행동으로 전투를 구성하고자 했다

지형 점령의 중요성을 특정 지역의 적지에 대한 수개월에 걸친 끊임없고 리듬있는 강타의 중요성보다 낮추었다

 



프랑스군은 6주 동안의 전투가 아닌 6달 동안의 전투로 독일군을 묶어놓으며 고갈시켜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렇게나 긴 시간 동안 전투를 지속하는 유일한 방법은 프랑스군의 손실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었다


원하는 효과를 보기 위해 포슈는 더 효율적인 항공관측과 항공대와 포병대 간의 더 나은 연락을 권고했다

포탄은 수백만 발이 있더라도 귀중한 상품이므로 보병만큼 절용해야 했다

먼 목표를 공격하는 대신 오직 좁은 참호선만 점령하기를 목표로 했다

짧고 날카롭게 공격해 새로운 공격준비사격을 한 다음 공격을 빠르게 재개해야 했다

사상자가 주로 공격 초기가 아니라 다음 저항을 극복해야 할 때 발생하므로 이런 방법이 사상자를 크게 줄일 터였다

1차대전에서 최고의 전술적 방법론은 전략적 승리로 이어질 수 없는 것이었고, 야심찬 전략은 전술적 실패를 보장했다

서부전선의 대부분 기간을 지배한 이런 전술과 전략의 대립을, 포슈는 사실상 1915년 12월에 해결했다

포슈는 시간과 템포를 이용해 최고의 전술적 모델이 전략적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포슈는 이러한 이론을 솜 전투 몇달 전에 완성한 교리 문서인 La Bataille Offensive에서 더욱 발전시켰다


La Bataille Offensive는 독창적인 학문적 성과가 아니다

 포슈는 5779번 문서를 포함해 GQG가 옹호한 당시 프랑스군 교리를 명백히 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포슈가 일반화된 교리를 취해 솜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마주하리라 예상되는 상황에 맞게 준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현 상황에서 공격전은 종심으로 조직되고 배열된 일련의 적지를 점령하는 것을 요구한다."라고 서술했다


포슈에 따르면 이러한 경우에

"일단 시작된 전투는 체계적으로 실시되어 우리의 공격 역량이 약해지는 일 없이 적의 저항력이 사기, 물자, 물질 면에서 파괴되어 무너질 때까지 지속되는 장기간 작전이어야 한다"

포슈는 넓은 전선을 따라 움직이는 일련의 짧고 날카로운 전투 대신

전략적 목표를 달성한다는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는 일련의 전술적 교전이라는 현대 작전을 제안한다
(포슈는 1918년에 프랑스군이 독일군을 압도하는 기동력을 달성하자 기동전을 위해 전자를 구사한다)


포슈는 특히 전투에서 템포를 유지해야함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독일군이 균형을 잃게 만들려면 독일군의 방해를 받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각 보병의 진전이 적의 다음 참호선에 대한 새로운 준비에 지체 없이 필요한 포병의 진전 직후 이어진다"

독일군의 아픈 곳을 골라 끊임없이 압박하는 이 방법으로 프랑스군이 플로쿠르와 부샤벤을 돌파했다

부샤벤 마을 너머까지 독일군의 방어선이 존재하지 않게 만든 두달의 강타 후, 프랑스군과 베를린 사이 독일군이 사라졌다


포슈와 파욜의 지휘를 받은 프랑스군은 참호망을 독일군이 건설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파괴하고 점령했다

이러한 템포를 유지하기 위해 부대가 원기를 유지하도록 전방과 후방을 정력적으로 순환시켰다

이러한 순환배치와 리듬있는 강타는 가용한 포병의 신중한 조정 덕분에 달성할 수 있었다

포슈는 포병의 공격준비사격이 보병에게 가능성을 부여하는 최고의 수단이며

포병에게 포격당한 지형의 종심이 보병이 점령할 수 있는 공간의 크기라고 정의내렸다

그는 그러한 공간이 2, 3, 4km에 불과하기에 크지는 않다는 단서를 덧붙인다

솜 전투는 포격전으로 계획되었고, 각 공격마다 포병자원을 가장 효험있도록 결정했다

포슈는 다양한 화포 유형마다 특정한 역할을 부여했다

중간 구경의 중포는 철조망과 기관총진지를 제거하도록 했고, 더 큰 중포는 요새화된 마을과 사격진지를 파괴하도록 했다


포슈는 대포병사격을 당연한 이유로 유난히 강조했다

1915년에 프랑스군의 공격이 실패한 원인은 항상 독일 포병이었다

집중된 프랑스 부대가 앞으로 쇄도하면 모든 독일 포대가 모든 보병의 이동로에 탄막을 쳤다

이 간단한 사격만으로 사상자가 급증했고 보병이 전투를 계속할 능력이 사라졌다

포슈는 항공정찰로 찾아낸 적 포대를 독가스로 침수시키라고 제안했다

이는 1915년 6월에 포슈가 개척한 전술이다

그가 La Bataille Offensive에서 쓴 문장을 읽어보자면

"사격이 속사로 이루어지는 한 구경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적의 각 포에 평균적으로 1분 당 2발의 포탄을 발사해야 한다. 그리하면 75mm 포반이 적 야포대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포슈가 여기서 제공하는 마지막 세부사항은 이동탄막사격에 관한 것이다

이동탄막사격은 프랑스군 공격의 기본 구성품이었지만, 이는 일관적으로 구사하기엔 너무 복잡한 전술이었다

사실 이 전술 자체가 문제인 경우가 많았다

탄막이 너무 빠르게 전진하면 보병이 적에게 노출당했고, 반대가 되면 보병이 위험한 개활지에 오래 체류하게 되었다

적절히 조정된 이동탄막이라도 보병이 지나치게 가까이 붙어 피해를 자초하곤 했다

포슈는 이동탄막의 위험 구역이 최대 150m이며, 그 범위 밖에서도 눈먼 포탄이 떨어질 수 있음을 상기시켰다

일반적으로 무인지대의 길이가 150m였음을 알면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이해될 것이다

이동탄막사격은 효과적인 전술이었지만 만병통치약은 아니었다


906.png 솜 전투로 보는 참호전 전술과 작전의 변화


그래서 이 모든 반영이 야전에서 가치가 있었을까?

아마도 있었을 것이다

1916년 7월 1일에 프랑스 12개 사단이 10km 전선에서 진격했다

모든 사단이 목표를 달성했고, 심지어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 다음 날에도 공격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파괴되지 않은 철조망이나 기관총 진지처럼 생존한 장애물을 발견할 때마다 신속한 연락을 통해 포병으로 제거했다

이 덕분에 보병이 계속 전진할 수 있었다

사상자는 1560명이었다

조프르는 포병대가 임무를 훌륭히 완수했다고 찬사를 남겼다

한편 프랑스군은 이러한 성과가 독일군이 영국군 전선만 신경썼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독일군은 프랑스군이 베르됭 전투 때문에 다른 전선에서 작전할 능력을 잃었다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



Picture1.png 솜 전투로 보는 참호전 전술과 작전의 변화


프랑스군은 초기에 손쉬운 승리를 거두자 환희했으나, 거기서 멈춰서지 않았다

매일 새로운 공준사가 방어할 틈을 주지 않으며 독일군을 쓸어버렸고, 후방에 있던 병력이 전방과 교대해 공격했다

프랑스군은 48시간 동안 8km 전선에서 방어선을 돌파했다

이는 포슈가 계획한 강타의 전형이었고, 매우 성공적이었다

독일군은 끊임없는 압력 때문에 진지나 방어선을 재구축할 수 없었다

7월 5일까지 프랑스군이 5km를 전진해 9000명의 포로를 잡고 많은 사상자를 입혔는데, 프랑스군 사상자는 8000명이었다

7월 10일에 제6야전군이 플루쿠르 고원 전체를 장악했고, 전략적 목표인 페론으로 가는 길을 막는 장애물이 강밖에 없었다



Picture13.webp.ren.jpg 솜 전투로 보는 참호전 전술과 작전의 변화
그러나 여기서 교착 상태가 시작되었다

페론으로 가는 길을 막는 강과 강 북쪽 영국군의 참담한 실패 때문에 프랑스군이 갈 곳이 없어지고 말았다

결국 공격을 남쪽으로 확장했지만, 프랑스군은 솜 강을 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연합 전쟁 수행의 함정이다

포슈는 영국군과 함께 싸우면서 나폴레옹에 대한 존경심이 약해졌다고 고백했다

 




14261624069_02948f9729_c.webp.ren.jpg 솜 전투로 보는 참호전 전술과 작전의 변화


솜 전투는 프랑스군이 1916년에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는가? 하는 의문을 남긴다

독일군이 입은 대체불가능한 인력 손실과 베르됭의 압력 완화가 자주 언급되긴 한다

하지만 저 두가지가 정말로 전략적 성과였을까?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사실은 프랑스군이 19km 전선에서 8km 이상 진격했으며, 이 과정에서 20만명의 사상자를 입었다는 것이다

1916년에 프랑스군은 베르됭에서, 영국군은 솜에서 전역을 치루었다는 인식과는 다르게

프랑스군이 영국군보다 더 많은 병력을 솜 전투에 배치했다

그러면서 사상자는 영국군의 절반에 미치지 않았다

프랑스군의 전술적 성과는 영국군의 성과와 명백히 대조된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성공을 영국군의 노력을 비난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프랑스군은 공격작전을 이미 여러차례 경험했었다

1915년에 프랑스군은 러시아를 돕기 위해 포탄 위기 중에도 끊임없이 공격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프랑스군 덕분에 독일군이 동부전선을 강화하기에 충분한 병력을 서부전선에서 옮기지 못하게 되긴 했으나

그 과정에서 프랑스군이 2차대전 전체에서 영국군이 입은 것과 동일한 사상자를 1915년에 입었다

이는 둘러대서는 안 될 끔찍한 학습 과정이다

1915년에 얻은 전훈은 솜 전투 당시 영국군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보물이지만

학습 비용은 때때로 정당화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법이며, 심지어 피로스적일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