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여왕이 재위하던 9세기 말 신라는 중앙귀족들의 부패와 사치가 심해져서 나라가 혼란스러워졌다. 

한국역사에서 신라에서만 여왕이 나온 이유는 골품제 때문이었다. 


신라의 왕은 '성골' 출신만 할수 있었다.

 


부모가 모두 왕족 출신이어야 성골이되는데 나중에 남자성골의 씨가 마르자 결국 여자가 왕이 되었던 것이다. 왕이 될 재목이 아니었는데 성골이라는 이유만으로 왕이 되었던 것이다. 신라의 풍습인 삼촌과 조카, 이복남매나 이부남매, 사촌 간의 근친혼은 권력과 재산, 신분, 지위,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서 행해졌다. 결과적으로 기형아 및 장애아 출산, 특정한 유전병에 취약한 자손이 태어나게 되어 남자 성골이 소멸 되었고 불가피하게 여왕이 나오게 된 것이다. 




신라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는 악명높았다. 신분만 정한 것이 아니라 세세한 행동 하나하나까지도 규제를 했기 때문이다. 품계에 따라서 집의 평수, 타고다닐 수 있는 말의 수, 수레의 크기, 옷의 색깔, 장식용 빗의 재료까지 엄격하게 규정하였다고 한다. 

한번 정해진 신분은 죽었다 깨어나도 바뀌지 않았다. 한국역사에서 가장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나라가 신라였다. 두번째로 엄격했던 나라가 성리학(주자학)의 나라 이씨조선이었다.  

실력있는 인재가 등용되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야 나라가 강성해지는데 신라는 골품제라는 신분제도 때문에 애초에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성여왕시기 지방의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각 지역에서 왕으로 군림하면서 신라왕실에 세금을 바치지 않았기에 국고가 바닥나게 되었다. 

이에 진성여왕이 장수들을 지방으로 보내 세금을 걷어오게 하였지만, 파견된 장수들이 지방호족들에게 죽거나 도망쳐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 송악(개성)의 호족이자 재벌이었던 왕륭이 큰배에 재물과 식량을 가득싣고 서해-남해를 거쳐 동해안의 울산항에 정박하였다.


 
                                                <태조 왕건의 대누선: 사방 30m의 대형선으로 배안에서 말도 달릴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왕륭은 아들 왕건을 데리고 신라의 왕도였던 서라벌(경주)에 들어가서 진성여왕에게 재물과 식량을 바쳤다. 이에 진성여왕이 크게 기뻐하면서 왕륭과 춤을 추었다고 한다.  

하지만 왕륭은 냉철했다. "말세를 봤네. 역시 서라벌은 희망이 없어. 볼일 다봤으니 길을 서두르게."

왕륭같은 기업가 특히 해상세력은 지역과 신분에 관계없이 실력있는 인재를 등용한다. 실력없는 인재를 등용했다가 배가 침몰하고 상업이 쇠퇴하면 가문이 망하기 때문이었다. 냉철하고 주도면밀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을 상인들은 아는 것이다. 

이러하니 골품제로 썩어서 망해가는 신라가 얼마나 한심해 보였겠는가? 

이후 왕륭은 신라가 사실상 망하고 군웅할거시대가 도래했으니 힘을 길러서 독자적으로 살아갈 방안을 찾게 된다. 패서지역의 호족들(고구려 유민)을 규합하여 새로운 나라 고려를 건국할 준비를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