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때 패서 지역(황해도)은 고구려 유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중 고려왕조를 세워서 고구려를 부활시킨 인물이 송악(개성)을 기반으로 했던 태조왕건이었다. 

태조 왕건은 바다와 강에서 배를 타고 무역을 하던 상인집안 출신이었다. 해상세력이었던 것이다.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의 설화를 보면 중국(당나라)과 해상무역을 활발히 했던 집안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 작제건이 서해의 용왕을 위해 여우를 잡다.
작제건은 성인이 되자, 당나라로 가는 신라 사신단의 호위무사가 되어 배에 오르는데, 뱃길에 안개가 너무 자욱해 더 이상 항해가 불가능할 지경이 되어 뱃사람이 점을 쳤는데 "고려인(고구려 후예)을 내려놓고 가라. 그래야 순풍이 분다"는 점괘가 나왔고, 마침 그 배에 타고 있던 '고려인'은 작제건이었다.

결국 작제건은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런데 밑이 바다가 아니라 외딴 섬의 해변이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배가 떠나자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서해의 용왕인데 내가 그대를 만나고자 붙잡았다. 근래에 늙은 요호(妖狐)가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의 모습으로 나타나 구름과 안개 사이에 해 ‧ 달 ‧ 별들을 벌여놓고는 나각(螺角)를 불고 북을 치며 음악을 연주하며 와서는 이 바위에 앉아 『옹종경(臃腫經)』을 읽어대니 내 두통이 극심하다. 그대의 궁술이 출중하다 들었으니 그대의 활로 그 요호를 잡아주기 바란다."하니, 작제건이 승낙해 요호를 잡으러 갔다.

과연 하늘을 날아오는 불상의 모습이 보이니 작제건은 눈을 감고 활을 쏘아 맞추었는데 맞아 떨어진 것은 과연 늙은 여우였다. 






통일신라시대 서해는 해적들이 들끓어서 상선들을 약탈하였다. 무법지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해적들에게 작제건 집안의 배라고 외치면 약탈하지 않고 길을 터줄 정도로 그는 서해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고려인들은 여진족처럼 육지와 바다에서 모두 싸울 수 있었던 강인한 민족이었던 것이다. 

할아버지 작제건과 아버지 왕륭이 닦아놓은 해상세력은 이후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서기 910년 궁예의 명을 받은 왕건이 수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서남해의 유명한 해적이었던 능창(수달)을 처단하였다. 

 



서기 914~915년 태조 왕건은 대누선 100여척에 군사 3천명과 식량을 가득싣고 흉년이 들어서 굶주림에 시달렸던 전라도 나주를 구휼했다고 한다. 

 
<태조왕건이 타고 다녔던 대누선은 사방 16보(30m)의 대형선으로 배안에서 말도 달릴 수 있었다고 한다.>



- 고려사 태조 총서
드디어 보장(步將) 강선힐(康瑄詰)·흑상(黑湘)·김재원(金材瑗) 등을 태조(太祖)의 부장(副將)으로 삼아 배 100여 척을 더 만들게 하니, 큰 배 10여 척은 각각 사방이 16보(步)로서 위에 망루를 세우고 말도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 〈태조는〉 군사 3,000여 인을 지휘하여 군량을 싣고 나주(羅州)로 갔다. 이 해에 남쪽 지방의 기근으로 초적[草竊]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수자리 사는 군졸은 모두 콩이 반이나 섞인 밥을 먹었는데, 태조가 마음을 다해 구휼하니 그 덕택에 모두 살게 되었다. 예전 태조의 나이 30세 때, 꿈에서 9층의 금탑이 바다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스스로 그 위에 올라가 보았다.


큰 배 십여 척은 각각 사방이 16보로 위에는 누로를 만들었는데, 말을 달릴 정도였다. 군사 3천여 인을 거느리고 군량을 싣고서 나주로 가니, 이해 남방에는 기근으로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수졸은 모두 반숙을 먹었다. 왕건이 마음을 다하여 구휼하니 이에 힘입어 제대로 살게 되었다. -동국통감 신라기 서기 915년 음력 6월-


결국 왕건은 후백제와의 나주공방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고려가 나주를 점령함으로써 전략적으로 굉장히 유리하게 되었다. 반면에 후백제는 남북으로 고려군에게 포위된 형국이 되었다. 
 



태조 왕건의 고려수군은 나주공략에 만족하지 않고 동진하여 경남 남해안까지 장악하였다고 한다.  

927년 4월, 고려의 해군장군 영창(英昌) · 능식(能式) 등이 주사(舟師, 수군)를 거느리고 강주(경남 진주)를 공격하여 전이산(轉伊山) · 노포(老浦) · 평서산(平西山) · 돌산(突山) 등의 4개 향(鄕)을 함락시켰다. 이로인해 경남 남해안에 고려시대때 지어진 지명들이 많다고 한다. 경남 통영의 '삼천포항'이란 지명도 고려의 수도 송악(개성)에서 뱃길로 삼천리 떨어져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927년 8월에는 태조 왕건이 수군을 이끌고 직접 강주를 순행하였다. 당시 고려군이 보여준 위세가 대단했는지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의 성주 흥달(興達)이 귀부하였으며 이후 주변에 있던 후백제의 여러 성수(城守)들이 항복하였다고 한다. 고려수군은 남강을 타고 대야성(경남 합천)까지 진군하여 후백제와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강주(진주)는 후백제와 가까워서 견훤왕의 공격에 취약하였다. 927년 가을 태조 왕건이 신라를 구원하려다가 공산(대구 팔공산)에서 후백제군에게 대패하였다. 이듬해인 928년 견훤왕은 강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300명을 학살하였다. 동시에 나주도 공격하여 재점령하고 고려에게 협력했던 호족과 백성들을 학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