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시대때 군웅 중 한명이었던 궁예는 극단적인 미륵신앙의 신봉자였다. 어느 종교나 너무 극단적으로 빠지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일을 그르치게 되고, 일이 풀리지 않으면 쉽게 포악해진다. 






궁예는 군사적 재능은 뛰어났지만 경제를 알지 못했다. 

궁예가 서기 901년 후고구려를 세울때 태조 왕건의 아버지였던 왕륭의 건의에 따라 항구에서 가까운 송악(개성)에 수도를 삼았다. 당시 송악(개성)은 대당무역의 거점으로서 수운교통이 아주 편리하여 물자가 풍부하였다. 서해, 예성강, 임진강, 한강 등 4개 수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기 904년 궁예는 갑자기 수도를 내륙지역인 강원도 철원으로 옮겼다. 궁예는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국가 건설을 꿈꾸었고, 철원은 그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장소로 선택되었던 것이다. 

궁예가 건설한 철원 황성은 외성 둘레가 무려 12.6km였다고 한다. 당시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월성의 둘레가 2.7km에 불과했으니 철원 황성의 엄청난 규모를 짐작해볼수 있다. 

 
                                                                                <궁예의 철원 황성>


당시 후삼국시대의 혼란기였는데 교통이 불편한 내륙지역에 저렇게 엄청난 규모의 황성과 도시를 건설했으니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역사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삼국사기 궁예 열전 중
재위 원년, 무태(武泰) 원년, 서기 904년
가을 7월, 청주(靑州)의 인호(人戶) 천명을 철원성(鐵圓城)에 옮겨 경(京)으로 삼았다.

재위 1년, 성책(聖冊) 원년, 서기 905년:
신경(新京)에 들어 관(觀), 궐(闕), 누(樓), 대(臺)들을 수리하니 지극히 사치스럽고 번잡하기 짝이 없었다.

- 고려사 태조 세가 중
"궁궐이 크고 웅장한 것에 집착해 절제하지 못하고 노역을 부리니 원성이 커졌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물자 부족이었다. 

철원이 교통이 불편하여 한나라의 수도로서 적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도로 및 철도교통이 발전하지 못했던 전근대 사회에서는 사람과 물자의 이송에 배를 이용한 수운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였다. 더욱이 한반도는 산과 언덕이 많아 수레가 다니기 힘들었기에 더더욱 수운에 의존하였다.





그런데 철원은 내륙지방에 위치하여 주변에 배가 다니고 정박할 만한 큰 강과 포구(항구)가 없었는데도 대도시를 건설하였다. 이때문에 식량과 생필품의 물가가 급격하게 상승하여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다. 결국 궁예가 망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철원의 높은 물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고려사』의 기록(태조 원년 8월)에는 “(궁예 시절의 철원 백성들은) 가는베(세포細布) 1필로 쌀을 5되(8kg)밖에 살 수 없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반면에 송악(개성)에서는 포목(베) 1필로 쌀을 평균적으로 4말(32kg)을 살수 있었으니 철원의 물가가 송악(개성)보다 약 4배나 비쌌던 것이다. 송악(개성)의 쌀값은 최악의 흉년때에 포목(베) 1필 당 6되(9.6kg)에서 대풍년때에 12말(63.6kg)까지 변동이 있었다고 한다. 즉 당시 철원의 쌀값은 송악(개성)의 최악의 흉년시기(아사자 발생) 쌀값 보다도 더 비싼 것이었다. 

당시 철원의 엄청난 물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때문에 식량과 생필품의 물가가 급격하게 상승하여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다. 수많은 백성들이 굶어죽었을 것이다. 결국 궁예가 세운 나라는 멸망하였고, 궁예왕은 도망가다가 백성들에게 맞아죽었다고 한다.



서기 918년 태조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우지만, 곧바로 후백제의 견훤왕과 화친을 원했던 것도 궁예시절 재정적자가 엄청나서 전쟁을 치룰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궁예와 비슷하게 경제 및 지리적 관념이 엉망이었던 지도자가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였다. 

태조 이성계는 내륙 산악지역인 계룡산 일대에 수도를 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궁궐의 공사가 반쯤 진척되었을 때 이곳이 교통이 불편하여, 한나라의 수도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한강의 수운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한양(서울)으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결국 백성들이 피해를 보게 되었고 재정적자가 심화된 것이다.

한양도 송악(개성)보다는 교통이 불편했다고 한다. 한강이 겨울에는 얼어붙고 봄철에는 수량이 줄어들며 여름에는 홍수가 발생하여 수운교통이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송악(개성)은 바다와 연결되어 있어서 1년 내내 수운교통 이용이 가능하였다. 이에 조선 제2대왕 정종은 수도를 송악(개성)으로 다시 옮겼다. 한양이 송악(개성)보다 못하다는 것이었다.  

조선왕조가 가난하고 경제가 취약했던 원인은 왕과 양반관료들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주자학에만 빠져있어서 경제 및 지리적 관념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