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은 훌륭하고 건전하면서 분별력이 있는 편견이다. 하지만 나쁘게 생각하면 그저 흔해 빠진 생각.
정해진 것을 고스란히 이해 한다는 것은 못을 가지고 벽에 박는다. 딱 그 정도 이다.
못으로 긁는 다 던지, 전류를 흘러 다른 작업을 할지, 또는 양 끝을 통해 다른 물체의 길이를 가늠해 본다 던지 등.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자들이 필요하다.

얌전한 예언가, 산기슭의 마법사, 우스꽝스런 예술가 규율에 따르지 않는 학생들은 항상 고귀한 위험에 놓여 있다.
무미건조한 일상에 걸려 넘어지는 그 작은 사소함으로 누군가에게 표정변화가 존재한다면, 밝게 분명히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줬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식의 몰락, 오염이야 말로 예술가들의 가장 가져야 할 기본 덕목이고 소양이다.

글을 적으며 상상 속에 그려 놓은 이미지들은 다분히 역동적으로 살아 숨 쉬게 만들 때, 살아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패한 예술이다.

과감히 총으로 쏴죽이는 것보다 죽였을 때 주는 상실감, 죄책감을 하다 못해 어떤 고뇌의 흔적이라도 남겨야 비소로
그 죽음으로 실패한 것도 살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추상적인 것들도 결국 하나 하나 의미를 나열하다
보면 쌓이고 쌓여 그 형태가 새롭게 드러나는 듯 추상적이지 않은 것들에 하나 하나 소거 되며, 새로운 추상적 상념들이 나타난다.
나무로 만들어진 단상 위 놓인 큰 면봉에 언성을 높이는 인간들 보단, 기형적으로 말 하는 환자들이 
예술에 도움이 된다.
쿠키 위를 걷다 초코 구역에서 환승을 하고 다시 마쉬멜로가 가득 피어난 목화솜을 따다 죽어버린 문익점씨의 일대기를 적어야 한다면
나는 바야흐로 바흐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기꺼이 쏟아지는 쿠키에 대해 네러티브를 다시 구상하곤 한다.

이런 터무니 없는 글에도 연상 되는 이미지, 상상력을 우리는 절대 막을 수 없다.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불변의 진리는 간단하고 심플하지만
그것을 부정한다면 불변의 진리는 고작 거짓말 따위나 불순함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

내 세상과 당신의 세상은 같은 시간 속에서도 분명히 다름을 이해하며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야 말로 본질에 대한 사명이며
내 존재에 대한 굳은 자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