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927년 공산전투(대구 팔공산)에서 고려군에 대승한 후백제는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이후 견훤왕은 신라를 속국화하고 경북지역의 호족들을 협박하여 후백제에 협력하도록 하였다.

서기 929년 7월 견훤왕이 이끄는 후백제군 1만은 고려의 홍술 장군이 지키고 있는 의성부(경북 의성군)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홍술을 죽였다. 그리고 계속 북진하여 고창(경북 안동시)을 점령하려고 하였다. 안동을 점령하면 고려와 신라의 연합을 차단할 수 있으며 고려로의 북진로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안동에는 고려군 3,000명만 주둔하고 있었기에 태조 왕건이 직접 1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안동으로 진군하여 견훤왕과 대치하였다. 

 

 

태조 왕건이 안동에 당도하자, 갑자기 고창(안동) 호족이었던 김선평, 권행, 장정필 등이 성민들과 함께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이들은 927년 견훤왕이 경애왕을 죽이고 그 왕비와 비첩들을 강간했으며, 서라벌 백성들을 학살하고 물자들을 대거 약탈한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고려군에게 군량과 물자를 보급하였다. 

전투 초반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도무지 승부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유금필의 북방기병이 나타나자 힘의 균형이 깨졌다. '북방의 호랑이'라 불렸던 유금필은 고려의 북쪽지역에서 북방기마민족들(흑수, 달고 등)을 상대하던 장군으로 강력한 정예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불과 3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방으로 진군하여 북번(北蕃)의 오랑캐들을 모두 제압했던 맹장이었다. 
 
"오늘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하여 신숭겸, 김락 두 장군의 원한을 풀어주겠다!" 



 유금필 장군이 이끄는 정예기병이 안동 저수봉(猪首峯)에서 후백제군을 향해 맹렬히 돌격하기 시작했다. 
 



유금필이 이끄는 고려기병의 공격에 후백제군 진영이 무너지면서 수세에 몰리자 갑자기 경북지역 호족들이 고려편을 들면서 견훤왕의 뒤통수를 쳤다. 

당황한 견훤왕이 도망가다가 말에서 떨어진 장소를 '말구리길'이라고 불렀는데, 이곳이 오늘날 '안동시 태화동'이라고 한다.

이때 후방에 매복해 있던 고려군이 도망가는 후백제군에게 불화살을 쏴서 수많은 후백제군들이 전사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군 1만명 중 8천명이 전사하였고, 견훤왕은 겨우 목숨만 부지하여 남쪽으로 도망치게 된다.  

 
"망했다 망했어!"



고창 전투는 후삼국 통일국을 결정지은 중요한 전투였다. 고창 전투 승리로, 고려는 경상도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충청도의 수많은 호족들이 고려편에 붙게 되었다.

반면에 고창 전투에서 대패한 후백제는 서기 934년 운주성 전투(충남 홍성군)에서도 고려군에게 패배하여, 웅주(충남), 상주(충북+ 경북 서부)라는 광대한 지역을 상실하였고 결국 그 영토가 전라도로 줄어든다. 설상가상 서기 935년에는 유금필 장군이 수군을 이끌고 나주(전남 나주, 목포)지역을 다시 점령함으로써 고려군에게 남북으로 포위되어, 멸망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경북 안동지역의 민속 놀이이자 무형문화재 24호인 '차전 놀이'가 고창 전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동채 위에 올라가 있는 두 장군이 태조 왕건(고려)과 견훤왕(후백제)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