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927년 후백제의 견훤왕이 경주를 함락시켜 약탈하고 경애왕을 자결시키자 고려군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남진하기 시작했다. 총병력이 약 1만5천명(기병 8천기, 보병 7천명)이었다. 






견훤 자신이 바로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복무하던 군인 출신이니만큼 서라벌 일대의 지리를 너무나 잘알고 있었다. 이에 견훤은 고려군보다 먼저 공산(대구 팔공산) 일대에 군대를 매복시키고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였다.
 



반면에 고려군은 시간이 촉박하여 정찰도 제대로 하지 않은채 급히 남하하고 있었다. 게다가 장수와 군사들이 대부분 북방출신으로 남부지방 지리에도 익숙하지 않아서 후백제군보다 전투에 불리하였다. 따라서 고려왕이 직접 공산으로 친정을 가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작전이었다. 왕건이 이렇게 무리수를 두게 된 것은 과거에 고구려가 신라를 포섭하지 못해서 삼국통일에 실패했다고 판단하여, 고려왕이 직접 구원군을 이끌어서 신라민심을 얻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공산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고려군은 후백제군에게 크게 패하게 된다. 왕건은 동수(棟藪, 현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서 후백제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하게 된다. 



                 <후백제군에게 포위당한 태조 왕건과 고려군의 모습: 말을 탄채 활을 쏘는 장수가 신숭겸 장군이다.>



당시 왕건 휘하에는 군사 1천과 신숭겸, 김락 두 장군만 남아있었다. 위기에 처하자, 신숭겸 장군은 자신의 주군을 구하기 위해 묘책을 짜내는데, 본인이 왕건의 갑옷을 입고 김락장군과 함께 후백제군에게 돌격하여 그들을 유인하는 사이에 왕건이 산길을 통해 도망가게 하는 책략이었다. 이때문에 이곳은 신숭겸 장군이 주군을 구하기 위해 묘책을 짜낸 곳이라고 하여, '지묘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대구광역시 지묘동에 위치한 신숭겸 장군 유적지>


 
"형님 폐하 꼭 대업을 이루소서!"




이후 왕건은 약 한달 동안 후백제군의 추격을 피해 도망다니다가 겨우 고려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 지묘동을 다시 방문한 왕건은 애통해 하면서 신숭겸 장군의 시신을 찾게 했는데 신장군의 두상을 후백제 군사들이 잘라가고 시신만 남게되어서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때 유금필 장군이 말하기를 "신장군의 왼쪽 발아래 사마귀 무늬가 있는데 북두칠성과 같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근거로 시체들을 뒤져 신장군의 시신을 찾았다고 한다. 왕건은 크게 슬퍼하여 송악(개경)으로 돌아갈 때 참수되어 머리가 없던 신숭겸의 시신에 금으로 두상을 만들어 신체와 함께 장사지내고 장절(壯節)[장하고 굳세며 의리와 충심이 강하다] 이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신숭겸 장군의 시신을 그의 고향인 강원도 춘천에 묻어주었다.
  

<고려태사 장절공 신숭겸 묘역: 봉분이 3개인 이유는 금으로 만든 두상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신숭겸, 김락 두 장군의 희생은 훗날 '도이장가'라는 노래로 나타나게 된다. 

- 나라와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숭겸, 김락 두 장군에 대한 고려왕들의 추모 

공산전투 후 193년이 지난 서기 1120년 고려의 제16대왕 예종이 서경(평양)의 장락궁에서 열린 팔관회에 참관하였을 때 허수아비 둘이 관복을 갖추어 입고 말에 앉아 뜰을 뛰어다녔다고 한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예종이 물어보자, "그 두 허수아비는 신숭겸과 김락장군으로, 태조가 남쪽 공산에서 후백제 견훤왕과 전투를 벌이다가 궁지에 몰렸을 때 왕을 대신하여 전사한 공신으로 그 공을 높이고자 팔관회에서 추모하는 행사를 벌였는데 태조께서 그 자리에 두 공신이 없는 것을 항상 애석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풀로 두 공신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 앉게 하였더니, 두 공신은 술을 받아 마시기도 하고 살아있을 때와 같이 일어나 춤을 추었습니다." 는 이야기를 신하들로부터 전해들었다. 이러한 설명을 듣자 예종이 감격해 신숭겸과 김락을 추모하는 노래인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두 사람의 넋을 기렸다.



도이장가(悼二將歌): 충신을 기리는 왕의 노래​

主乙完乎白乎(주을완호백호) 임금을 돌아가실 고비에서 완전하게 하신

心聞際天乙及昆(심문제천을급곤) 정성스러운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쳤고

魂是去賜矣中(혼시거사의중) 넋은 갔지만

三烏賜敎職麻又欲(삼오사교직마우욕) 임금께서 내려주신 벼슬은 또한 대단했구나

望彌阿里刺(망미아리자) 지금 팔관회에서의 두 장군의 가면극을 바라보며 알겠구나

及彼可二功臣良(급피가이공신량) 역전고투하던 그 때의 두 공신이여

久乃直隱(구내직은) 오랜 옛날의 일이나,

跡烏隱現乎賜丁(적오은현호사정) 곧은 자취(충성심)는 지금까지 나타나는구나


-도이장가(悼二將歌), 김완진 해독본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