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과 ‘국제사회’는 이재명이 집권하여 《미친경제학이 나라 망쳤다》고 ‘낙인 당하길’ 바라고 있다.
 
 

마이클 버리가 ‘공매도’ 들어갔다. 엔비디아 45%. 중국기업 45% 공매도 포지션 들어갔다. 빅숏트 영화 주인공인 마이클 버리 생각에 미국에서 1차적 금융위기 터지고, 이것이 추가적으로 중국 기술주에서 80%이상 빠졌다가, 30% 정도로 복구한 것이 추가적으로 빠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국 신용등급 강등 이후에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가 떡상 중이다. 투자의 현인들은 이제 미국의 국채금리는 높아질 일만 남았다고, 최근 20년 꾸준히 금리가 낮아지면서 가능했던 <채권왕>은 앞으로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한다. ‘미란 보고서’(‘장미란’ 아님)에서 나타난 리쇼오링과 연결된 논리는, 피터 자이한의 고립주의 노선에 연결돼 있다. 국제경찰 안해! 하는 미국의 모습을 한국언론은 사욕논리로 바라보았으나, 실제는 부채 경제로서 지속가능성의 종말에 와 있다.
 
문제는 세상이 바뀌었어, 해도 한국정치권은 <소귀에 경읽기>다.
 
50대 이상은 유신시대 기억이 다 있는 세대다. 이분들에겐 지금이 공권력 남용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군중에 대한 ‘소귀에 경 읽기’ 문제와 연결된다. 이번에 ‘내란죄 재판’은 판례 자체가 운동권 도식의 교조적 드러남 같은 것은 별개로, 대다수의 50대 이상의 조중동만 보았던 이들의 일상 체험과는 현저히 다른 체험이 전제 돼 있다. 그 당시에 숨어 있던 ‘비주체사상파’ 민족해방파(공산파)의 시선이 일반국민의 일상체험을 압도한다. 그 당시에 민정당 지지층은 윤석열 보호와는 게임이 안될 정도로, 전두환 보호에 대동단결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일반국민을 설득하는 핵심논리는 변화를 거부하는 조선왕조 습속 관행에 대한 재판의 필요성이었다.
 
국민의 힘이 ‘더불어 민주당’에 비해서 탁월하게 도덕적 집단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내보내는 모든 정책은 엇비슷하다. 그러나, 민주당만큼 조선후기 노론정치 때부터 익숙한 ‘손이 큰’ 정치는 못 보인다. 정치권은 버블이 터질 때 어떻게 해야 한다,를 완전히 의제에서 배제하고, 조선후기 <이완용/이재명>시대의 현재적 재구성을 드러내고 있다.
 
노무현의 국토균형발전은 클린턴 세계화 시대의 절정에서 저금리의 산물이다. 이젠 갈수록 빚을 쓰기 어려워지는 세계가 도래한다. 그러나, 이재명의 논리는 지금은 사라져버린 클린턴 세계화를 전제한다. 세계는 자국의 거품경제가 터지면 어떻게 되나, 걱정이 태산같다. 한국의 경제만이 걱정이 없다. 특히, 이재명은 ‘미치광이 경제학’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IMF 때에도 공공연한 비밀이 있다. 구조조정 할 수 있는 때에 왜 안했는가? 한국의 재벌들이 부채와 함께 자기자본 잠가 놓고 망해야 망한 줄 알지, 그 전까지 망했다고 인정하겠나? 윤석열 정부는 버블 붕괴와 구조조정을 한 것도 아니고, 도둑놈심뽀로 대출을 땡기는 그런 경제를 한 것도 아니다. 윤석열 정부가 이명박 정부의 리만사태 버블 붕괴 막기의 방법으로 쓴 것보다, 이재명이 더 잘할 가능성은 제로라고 본다.
 
마이클 버리의 생각으로 미국 기술주-중국 기술주 동반 붕괴 되는 세상은, 한국이 증권사 소속의 대규모 피에프 채권이 동시다발 터지는 세상이다. 이는 동시에 정부 구조조정이 강요되는 사회다. 김대중이 쌓았던 모든 논리는, 모든게 전부 지속불가능성이라서 ‘리셋’하고 싶어지는 욕망이 가득하게 된다.
 
유신시대에 공권력 남용 시대에 권위주의를 30년 가까이 하니, 그게 체질화됐다. 김대중시대에 “부채경제=대마초”에 중독된 국민들은 아무리 말해도 원론을 이해하지 못한다. 유신시대와 똑같은 문제로, 제도권에 원론을 논하는 사람이 뿌리가 뽑혀도 너무 뿌리가 뽑혔다는 것이다. 조선일보에 광주일고 조선일보 두목인 김대중주필에 충성맹세 잘하며 머리는 비었는데 사회조직 생활을 잘하는 젊은 여기자(일베감성으로 이 여자는 어떻게 부르고 싶나?)앞에서—이와 비슷한 체험으로 유신시대에 머리나쁜 군사독재 친화적 사이비 앞에서---자유민주주의 시장원론을 논하는 생각의 진입장벽에 미쳐 버린다. 특히, 월간조선 사쿠라 조갑제기자 발 다양한 이단언어는 미치고 팔짝 뛰게 한다.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의 국가의 부는 노동총량과 같다는 언어를 계승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인위적인 노동가치에 대한 자의적인 평가를 반대하는 것이지,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구약 성경 세계관 안에 있다. 그러나, 이재명은 “똥물에 튀겨죽을 동학”신앙에 깔린 무교의 노동회피의 정서에 있다.
 
유신시대 권위주의에 길들었던 사람들은, 전두환이 사법 심판 당한 이후에야 새 사회를 이해했다. 김대중 체제의 ‘부채 경제=대마초’에 길들어진 사람들은, 한명이 완전히 나가리되는 낙인을 써야지 새 사회의 도래를 이해한다. 국제사회의 이재명이 낙인당하길 선호하는 심리는 이러할 것이다. 한국이 경제 위기 다가올 때마다 외국의 사례로 한국을 방어한다. 이재명은 세계에서 ‘넘사벽 미치광이 경제학’을 구사한다.
 
한국이 물질적으로 가난해지는게 문제가 아니라, 성장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제도적 장치의 골격이 허물어지느냐 지켜지느냐 문제가 중요하다.
 
유신시대는 권위주의로 국민이 속타도 늘 ‘충성’ 타령하며 그 전제조건의 관직 몰이였다. 지금 김대중체제는 ‘부채경제=대마초경제’에 벗어나려는 모든 시도를 엿먹이고, 조선왕조 당쟁은 이렇게 하는거라고 시범보이는 정치인들과 연관자들의 ‘초딩적 도덕룰’은 빡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