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월 15일 총선 직후 마산 시위대의 부통령 재선 요구가 있었다.
그이유는 대통령과 부통령이 한 정당 소속이라는 것이었다. 재선요구가 왜 그런 것이었을까?
대통령과 부통령은 한 정당 소속이란건 민주주의의 기본이 아니던가?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한 부정선거이기 때문에 부통령 선거를 다시 해야한다고 마산 시위대가 들고 일어났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요구 인가?
마산에서 파출서들이 돌에 파괴되고 있었을 때 시위진압을 하지 않을 나라는 없다. 아직 시위진압경험이나 훈련이 없었던 한 경찰의 실수로 중학생 김주열이란 학생의 눈에 최류탄이 박혀 사망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전국적으로 번진 4.19쿠데타의 기폭제였다.
부통령을 재선하라는 시위에 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해야 했고 하와이로 망명하였는지는 그당시 한국을 휩쓸었던 광기를 짐작하게 한다.
당시 한국 경제는 전적으로 미국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GNP가 80불 미만이었는데 한국 경제 자립율은 10%밖에 안되었으며, 미국 정부의 90% 지원 외에도 국민의 생필품을 미국의 구호물자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는 것은 대미 경제 외교의 주체가 없어짐을 의미하였다. 당시 워싱턴의 시각에서는 남로당 세력의 집권 가능성을 우려하였고, 이승만 대통령도 장기 집권의 목적이었다기보다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였을 것이다.
미국이 신뢰하던 반공주의자 이승만 대통령을 강제 하야시킨 4.19 쿠데타는 미국의 대한 경제 원조의 중단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만일 다음 해에 박정희 대통령의 5.16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한국 경제는 오늘날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되었을 것이다.
우선 4.19 쿠테타 세력이 세운 민주당 정권이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부통령을 없애고 장면 내각을 조각하였으나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가 서로 권력 중심에 자기에게 있다며 매일 다투었으니 국정이 헛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내각제 정부에 양원제 국회를 만들어 놓으니 국회에서도 아무 것도 결정되는 것이 없었으며, 거리에서 각종 이익 단체들이 저마다 이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경제는 망가졌으며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웠으며 국가가 와해될 듯하였다. 4.19 쿠데타가 민주화운동이라는 미명에 가려진 진실은 무능 정부를, 그리고 구조적으로 무능할 수밖에 없는 정권을 세웠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회 붕괴의 위기감이 만연하던 때에 구국의 결단을 내린 이는 박정희 소장이었으며, 군은 일치 단결하여 박정희의 군사혁명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사실 군사혁명이란 용어는 정치학적 시각에서는 잘못된 용어이다.
4.19 쿠데타는 쿠데타 직후에 국가 원수가 강제로 퇴출 되어 국외로 추방되었기에 4.19 쿠데타가 맞다.
그러나, 5.16 후에 국가 원수로서의 윤보선 대통령의 위상은 더욱 강화되었다.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국가 원수와 싸움을 벌이던 장면 총리 자리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대신한 것뿐이다. 그리고 군사정권이란 말도 틀린 용어이다. 박정희는 1963년에 군복을 벗었다. 따라서 군사정권이란 말이 적용될 수 있는 시기는 1961년 7월부터 1963년 8월까지일 뿐이다. 그리고, 그 기간에도 국가원수는 윤보선 대통령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정책 하나하나는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오로지 배고픈 국민을 잘 살게 하는것에 있었다.
다시 그와 같이 현명한 지도자가 나오기를 천지신명에 바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