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에 따라 우리[고려]의 강역은 서쪽으로는 화표주(華表柱)가 있는 요동성(鶴柱) 건너 강안
(岸江)으로부터 동쪽으로는 옛 고주몽(高朱蒙)이 건넜던 개사수(蓋斯水)로 확정되었습니다-
《고려사, 선종 5년 9월 미상》
-요나라 황제가 말하길, 고려는 바다 모퉁이에 사직을 세워 그 영토가 북쪽으로는 용천(龍泉)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압연(鴨緣)에 닿았으며-
《고려사, 숙종 2년 12월 13일》
-동경(東京) 요양부(遼陽府). 본래 조선(朝鮮)의 땅이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죄수에서 풀어주고 조선으로 가자 그대로
그 땅에 봉하였다… 북위[元魏] 태무제(太武帝)가 사신을 보내어 그가 거주하는 평양성(平壤城)에 이르게 하니, 요(遼)의 동경은 본래 이곳이다.
당(唐)의 고종(高宗)이 고구려[高麗]를 평정하고 이곳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다-
《요사 지리지, 동경요양부》
-동녕로(東寧路). 본래 고구려(高句驪) 평양성(平壤城)으로 또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하였다. 한(漢)이 조선(朝鮮)을 멸하고
낭랑(樂浪), ·현토군(玄菟郡)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낙랑지역이었다. 진(晉) 의희(義熙) 연간 후반에 그 왕 고련(高璉)이 처음으로
평양성(平壤城)에 머물렀다[居]. 당(唐)이 고려(高麗)를 정벌할 때 평양(平壤)을 공략하여 그 나라가 동쪽으로 옮겨 압록수(鴨綠水)의
동남쪽 1,000여리 되는 데에 있었는데, 평양의 옛터가 아니었다. 왕건(王建)에 이르러 평양이 서경(西京)이 되었다. 원(元) 지원(至元)
8년(1271)에 서경을 고쳐 동녕부(東寧府)라고 하였다. 동녕로총관부(東寧路總管府)로 승격시켰다-
《원사 지리지, 요양등처행중서성, 동녕로》
-정축 최탄(崔坦)이 몽고 군사 3천 명을 요청하여 서경(西京)에 주둔시키자, 몽고 황제가 최탄·이연령(李延齡)에게 금패(金牌)를, 현효철(玄孝哲)
·한신(韓愼)에게 은패(銀牌)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서경을〉 직접 몽고에 속하게 하고, 동녕부(東寧府)라고 이름을 고쳤으며
자비령(慈悲嶺)을 〈고려와의〉 국경으로 삼았다-
《고려사, 원종 11년 2월 7일》
-동녕로(東寧路)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으로, 당(唐)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平壤)을 함락시키자, 그 나라는
동쪽으로 천여리나 옮겨갔다. 지원 6년에 고려의 이연령(李延齡) 등이 그 지역의 60여 성(城)을 가지고 원나라에 내부(內部투항)
하자, 원나라에서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하고 후에 동녕로(東寧路)로 승격시켰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동녕(東寧)은 곧 요양(遼陽)인데,
요양을 동녕이라 부르게 된 것을 상고해 보면...-
《흠정속문헌통고, 동녕로》
-요심(遼瀋) 지역은 애초 본국[고려]의 옛 영토였으나 원나라를 섬기게 된 이후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맺는 바람에 행성(行省)의 관할로 두었던 것이다-
《고려사, 공민왕 19년 12월 2일》
-요심(遼瀋)의 사람들에게 고유(告諭)하여 말하기를, “요심은 우리나라[고려] 경계이며, 민은 우리의 민이다-
《고려사 열전, 지용수》
-요좌(遼左)는 본래 고려 땅이다-
《연도기행, 1656년 8월 29일 갑진》
<참고 논문>
「고려와 거란의 전쟁 기록 복원」 - 윤한택 (인하대학교 연구교수)
「고려 서북면 경계 재검토-강동 6주(江東六州)를 중심으로」 - 김영섭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서희 개척 8주의 위치에 대한 재고찰」 - 남주성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한국수력원자력㈜ 상임감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