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귀족들의 모습>


고려시대를 살펴보려면 조선시대 사람들의 글과 기록들을 보면 알수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현대사람들보다 고려시대를 더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전왕조여서 고려시대를 경험했던 조상들로부터 내려져오는 이야기도 많았고, 고려시대를 정확하게 기록했던《고려실록》(高麗實錄)이 춘추관에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실록은 임진왜란때인 1592년 불에타서 사라졌다.

대부분의 조선시대 사람들이 고려시대가 조선시대보다 더 나았다고 평가했다. 조선왕과 신료들은 고려시대때 군사력이 강했다고 평가하면서 왜 우리 조선은 고려처럼 못하는지 한탄하는 구절들이 많다. 국가의 부강함에 있어서도 "전조(고려)때에는 부유하였는데 왜 우리 조선은 이토록 가난한지 알수 없다"라는 구절들이 많다. 고려시대때는 가축(말, 소)들이 번성하였고 수레도 많았는데 지금은 그 많던 가축과 수레가 왜 다 사라졌는지 알수 없다는 구절도 있었다.  

그럼 민생문제는 어떠했을까? 역사계에서 떠도는 학설중에서 비록 조선이 고려보다 군사력이나 경제력면에서 떨어졌지만 백성들의 민생은 더 좋았다는 것이다. 아니 군사력과 경제력이 더 떨어지는데 어떻게 백성들의 민생이 더 좋을 수가 있겠는가? 경제력이 튼튼해야 백성들에게 복지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설검증 자체가 안되는 모순된 주장인 것이다. 
 
고려시대 민생(民生)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허균(許筠) 호민론(豪民論)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제11권 문부 8논(論)
"지금의 시대는 고려 때와는 같지 않다. 고려 시대는 백성에게 부세(賦稅)하는 것이 한정되어 있었고,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서 나오는 이익도 백성들과 함께 나누어 가졌다. 상업은 자유롭게 통행되었고, 공인(工人)에게도 혜택이 돌아가게 하였다. 또 수입을 헤아려 지출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나라에는 여분을 저축해 둔 것이 있었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큰 병화(兵禍)와 상사(喪事)가 있더라도 그 부세(賦稅)를 증가하지 않았었다. 고려는 말기에 와서까지도 삼공(三空)을 오히려 걱정해 주었다. 

우리나라(조선)는 그렇지 않아, 변변치 못한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것으로써 귀신을 섬기고 윗사람을 받드는 범절만은 중국과 동등하게 하고 있다. 백성들이 내는 세금이 5푼(分)이라면 공가(公家)로 돌아오는 이익은 겨우 1푼(分)이고 그 나머지는 간사스러운 사인(私人)에게 어지럽게 흩어져버린다. 또 고을의 관청에는 남은 저축이 없어 일만 있으면 1년에 더러는 두 번 부과하고, 수령(守令)들은 그것을 빙자하여 마구 거두어들임은 또한 극도에 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백성들의 시름과 원망은 고려 말엽보다 훨씬 심하다. 그러나 위에 있는 사람은 태평스러운 듯 두려워할 줄을 모르니 우리나라에는 호민(豪民)이 없기 때문이다..." 



허균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었다. 조선의 민생문제가 고려 말엽보다 더 안좋다는 것이다. 고려시대때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적당히 부과하였고, 산과 들에서 나오는 이익도 백성들과 함께 나누어 가졌다는 것이다. 상업이 자유롭게 통행되었고, 나라가 부유하여 여분의 저축이 많았기에 전쟁과 기근이 들어도 세금을 함부로 늘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2. 『이익, 성호사설 제24권』
"고려 때에는 관에서 축내는 폐단도 없었고 정기적으로 바치는 부세도 백성에게 맡겨서 모두 정도에 알맞게 하였다. 말과 섬도 공사 간에 똑같은 제도로 했고, 혹 흉년을 만나 진휼할 때는 동서로 대비원(大悲院)과 제위포(濟危鋪)를 설치하여 질병 환자를 치료하였다. 환과고독(鰥寡孤獨)에 대해서는 모두 관에서 구휼하고 이외에 온갖 불구자에 대해서도 다 국가[고려]에서 부양하였으니 이로 본다면 백성에게 우대하는 정사가 지금[조선]에 비해 조금 나을 뿐만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였던 이익도 고려시대때는 탐관오리가 거의 없어서 세금부담이 높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흉년이 들면 구휼기관을 설치하여 국가에서 무료로 굶주린 자에게 식량을 제공하고 질병 환자를 치료하였다고 한다. 불구자(장애인)도 국가(고려)에서 다 부양하였다고 한다. 반면에 조선시대때는 국가재정이 열악하여 이러한 복지제도를 전혀 제공하지 않았고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을 수탈하여 민생이 악화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고려시대때는 불교계에서도 백성들에게 복지를 제공하였다. 그것이 '원(院)' 이었다.

전국 각 사찰에서 민간인들의 통행이 잦지만 도시와 떨어진 외진곳에 '원(院)'이라는 휴게소를 세웠다. 여행객들에게 식사와 잠자리(여관)를 제공했는데, 고려왕실의 허락을 받고 설치해 각 지역의 사찰에서 관리했다.  

 



원(院)은 평균적으로 30리(12km)마다 1개소씩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원(院)이 고려 말기 전국에 1,300여개나 설치되어 있어서 여행객들이 편리하게 여행할 수 있었고 지방에 상업이 발달하는데도 일조하였다. 

* 고려 말기 원의 갯수
개경부: 5개
남경부(서울): 4개
황해도: 79개
경기도: 17개
강원도: 63개
충청도: 212개
경상도: 468개
전라도: 245개
함경도: 37개
평안도: 79개 

이태원, 퇴계원, 장호원, 조치원 등의 지명이 고려시대 원(院)이 위치하던 지역이라고 한다. 

원(院)은 빈민구제 기능도 하였다. 빈민들에게 매일 2끼 씩(아침, 저녁) 쌀죽을 무료로 배급해주고 의료서비스도 무료로 제공했다고 한다. 빈민구제가 중요한 이유는 치안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세계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인 국가 미국도 빈민들에게 푸드 스탬프와 무상의료서비스(Medicaid)를 제공하는 것도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러한 원(院)이 조선시대 들어서자 불교를 탄압하면서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이로인해 백성들의 여행이 어려워졌고 상업 및 물자의 교류도 힘들어졌으며 백성들에 대한 복지도 제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왜 조선시대때 산적이 많았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민생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고려시대때는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고려왕실과 불교계가 전국의 저소득층 백성들에게 복지서비스를 제공했던 것이다. 전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러한 복지시스템이 고려 말기 까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고려시대때 한국역사상 최초로 신분해방을 목적으로 한 민란(만적의 난)이 발생한 이유도 이때문일 것이다. 어느 정도 먹고살만 해져야 신분상승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조선시대 민란은 100% 생활고(빈곤, 굶주림) 때문에 발생하였다. 나라자체가 가난하고 탐관오리가 많아서 백성 대다수가 절대빈곤에 시달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