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한일합방 후 일본신문의 논설은 조선왕조를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수천 년 동안 확고한 독립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은 조선인에게 독립심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타성적이고 의존적인 민족성 때문에 모래 위에 세운 기둥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동안 조선은 스스로 힘을 기르기 보다 중국에 복속하고 일본에 머리를 조아리며 러시아에 달라붙었다. 도대체가 줏대 없는 역사 뿐이다. 이때문에 오늘날 일한병합이라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제국은 1300만명의 국민이 한꺼번에 늘어나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이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빠져서 자주성이 결여되었기에 발전의 동력을 잃고 민족이 망했다고 평가하였다. 특히 조선의 지배층들이 국가와 민족의 발전보다는 중국에 의존한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만 집중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라고 밝혔다. 

이외에도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한반도 역사를 연구하고 살펴보면서 다음과 같이 한반도인들을 평가하였다. 

1. 고려왕조가 유지되었다면 독립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을 보면서 한반도인들에게 실망했던 일본 역사학자들은 "원래부터 한반도인들은 열등한 민족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직전 왕조였던 고려의 역사를 살펴본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고려왕조만 유지되었어도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고려왕조는 군사력과 상업중시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스스로 나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평가하였다.  

2. 조선은 봉건제도(지방영주)가 없었기에 낙후되어서 망하게 되었다. 
일본과 유럽은 봉건제도하에서 지방끼리 경쟁을 통해 발전할 수 있었지만 조선은 성리학 사상에 따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전근대시대때 무리하게 중앙집권제를 추진했다가 경쟁이 사라져서 발전하지 못하고 망했다고 평가했다. 

3. 조선과 만주는 관련이 없다(만선분리)
조선은 약한민족이기에 강맹했던 고구려와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너희 조선같은 약한민족은 고구려, 금제국, 청제국 등 강대국들이 태동한 만주와 관련이 없다."

4. 반도사관
한반도의 역사가 반도라는 지리적 특성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특히 대륙 세력(강대국)과 해양 세력(강대국) 사이에 위치하여 이 세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역사가 결정되어 자주성을 잃었다고 평가하였다. 

5. 광해군을 높게 평가하였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표방한 광해군을 높게 평가하였다. 하지만 이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이 폐위 당하고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펼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자 "너희 조선은 이래서 망한 것이다"라고 폄하하였다."

6. 일본역사학자들이 자신들 문화의 뿌리를 남송(南宋)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일본 문화의 뿌리는 가야, 백제, 고구려, 신라 등 한반도 삼국시대이다. 조선 정종 1년(1399년)에 스오, 나가토, 이와미, 이즈미, 기이의 슈고인 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弘)가 자신이 임성태자의 후예인지 확인해달라며 공문을 보냈으며 이와 함께 조상들이 묻혀있는 옛 백제의 땅(충청도)을 봉토로 달라고 한 것을 보면 알수 있다. 하지만 구한말 조선을 보고 실망했던 일본 역사학자들은 자신들 문화의 뿌리가 중국 남송(南宋)에서 왔다고 인식을 바꾸게 된다. 

이렇게 조선을 깔보고 무시했던 일본인들도 2가지 만큼은 인정하고 두려워하였다. '개성상인'과 '한글'이 그것이다. 

구한말부터 조선상권을 장악했던 일본상인들도 조선의 개성상인은 자국의 근강(近江)상인과 비슷하다고 여기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


"개성의 경제계를 지배하는 원동력은 말할 나위 없이 그 특산물인 인삼이다. 그 제조량은 매년 1만5천근을 내려가지 않고 그 가격은 약 백만원이다. 개성의 경제적 세력은 단지 개성 부근에 머물지 않고 멀리 진남포, 인천, 서울 방면에 미친다." -재무주보 48호, 1908년-
 




- 일본인들이 활용했던 한글
1910년 한일합방이후 일본은 조선을 일본처럼 발전시키고 근대화하기 위해 조선의 노비제(노예제)를 폐지하였고, 교육기관, 제도, 미개한 풍습들을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은 위생상태가 좋지 못해서 질병이 많았기에 캠페인이나 교육을 통해 개선해야할 점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의 문맹률이 너무 높아서 좀처럼 발전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구한말 조선의 문맹률은 95%~99% 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일본은 한글(언문)을 발견한다. 



 
 "아니 조선은 이렇게 좋은 문자(한글)를 가지고 있으면서 왜 여태껏 활용을 안했던 것인가? 이 문자(한글)를 개량하고 맞춤법을 제정해서 조선인들을 개화시켜야 겠다."



1912년 조선총독부는 한국에 근대식학교(보통학교)를 세우면서 문자교육을 하기 위해 한글을 개량하고 맞춤법까지 제정했다고 한다. 이것을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普通學校用諺文綴字法)이라고 부르며, 근대시대에 처음으로 고안된 한국어 맞춤법이다. 이때부터 '아래아'를 폐지하고, ㅏ와 ㅡ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이후 1921년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 대요(普通學校用諺文綴字法大要), 1930년 언문 철자법(諺文綴字法) 등 2번 더 한글 맞춤법이 개정되어, 현대한글과 유사해졌다.
 
<일제시대 개량한글책: 현대한글과 같아서 읽기 편하다>
 
<일제시대 개량한글을 활용한 위생포스터: 조선의 위생상태를 개선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