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는 1994년까지 아프리카에서 최대 로마가톨릭교회 국가로서 인구 68%가 가톨릭 교도였고 18%는 개신교도였으며, 약 1%가 무슬림이었다. 르완다에서 투치족과 후투족의 대립 형성에는 가톨릭교회가 큰 역할을 했다. 19세기 말부터 제1ㆍ2차 세계대전 당시의 식민지 시대에, 가톨릭교회는 투치족을 우대하면서 식민지 행정 엘리트로서 육성해 종족 간 갈등을 식민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다. 벨기에 식민 정부는 가톨릭 교회가 세운 학교를 이용해 투치족의 추장들의 자녀를 엘리트가 되게끔 교육하면서 투치족을 우대하였다. 특히 가톨릭교회는 투치족이야말로 후투족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하미틱 신화[Hamitic hypothesis]'를 주장하며, 양 부족의 인종 갈등을 촉진하였다. 한편 이 투치족에게 핍박당하던 후투족은 다른 한편으로 "가톨릭"을 이용해 의식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57년 후투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카이반다(Kayibanda)는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서 가톨릭 교회가 소유한 신문사 Kinyamateka의 편집장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그자는 후투와 투치의 갈등인 인종 간의 갈등이라고 규정하고 외국인인 투치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후투가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해댔다. 그자는 신문 편집인의 신분을 십분 발휘해 키냐르완다어로 후투 의식화를 부추겼다. 후투 의식화는 네거티브 전략을 이용해 성취되었고 카이반다는 이 운동을 고취하게 하고자 투치족을 공격할 것을 부추겼다.가톨릭 교회는 1950년대 후반 이후부터 후투족에 가세하고 가톨릭 교회의 많은 성직자가 학살에 협조했다. 르완다 학살에 협조 한 일반 주민의 대부분이 '투치족 학살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한 것이다'고 여겼고 정부 조사 결과 가톨릭 교회 역시 학살에 직접 가담한 것으로 밝혀졌다.
아프리카 르완다 내전 당시에 100만명이 학살 됐는데
이 배후에 유럽 국가들과 가톨릭의 공작이 있었고
범인 도피를 도움
지금 한국 상황도 비슷하다
르완다 내전 한번 검색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