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의 국민은 ‘국민’ 아닌 ‘민중’-
페이스북 주커버그와 미국 민주당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국의 종교갈등이 있다. 미국 민주당의 지성은 딱 조중동이 다루는 영역에서 멈춘다. 즉, 한국 대학생과 어리버리에서 멈춘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서학’과 ‘동학’의 싸움이다.
서양문화를 중국경전속에 읽는 씨족신앙으로 읽을 것인가? 서양문화를 서양문화로 기독교를 통해서 서양문화로 읽을 것인가?
서양법의 국민은 ‘서학’으로 읽어야 한다.
종교개혁 정신과 근대계몽주의 차원에서 근대국민국가가 형성됐다.
국민은 하나님앞에서 국가를 이루려는 언약에서 나타난다. 모든 국민은 하나님앞에 국가를 이루려는 책임이 있다.
한국사회는 모든 매스미디어에 전라도 씨족신앙 지배자들이 차지하고, 사법부까지 차지해서, 한 당파 독점의 자의적 판단이 이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분야 총체적 왜곡이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성령공동체로서 교회됨은, 시장에서는 어떻게 표현되나? 부르주아 무역 질서로서 교환관계로 설명된다. 이 물건이 얼마?-얼마의 노동가치? 이런 내용이다. 종교개혁이 성경의 자기 책임이 있듯이, 시장경제도 궁극적으로 자기책임이다.
개방적 질서의 힘은 결국은 자기 책임주체의 의식과 동전의 양면이다.
반면에, 원불교 백낙청은 처음에 자신들을 ‘민중’이라고 지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국민’이란 단어를 훔쳐서 쓰고 있다.
원불교 등 일제 강점기 공산마을 동학은 지주/사대부가 혁명가로 일제와 맞싸우고 공산마을 하나의 부족통합이었다. 그리고, 항일운동 연합에 소련공산당 후원은, 그 자체로 일당독재 공산당이다.
볼셰비즘의 군중이 러시아 짜르 토착세력을 짓밟는 초월의지가 있듯이, 일제 강점기 조선공산당도 그러하다.
중국 농민반란 신앙에서 씨족중심의 맹자의 民은 그 어떤 경우도 국민이 될 수 없다.
기억할 사람은 다 기억한다. 김대중지지 진영에서 전두환 노태우 때 국민윤리 논하던 그 시절에 民이라고 그랬다. 이젠 다시 국민이라고 한다.
국민과 민중의 차이는 한꺼번에 보여주는 것이 이재명과 트럼프의 차이일 것이다.
이재명은 레닌 스탈린-모택동-김일성-박헌영 등 제일 꼭대기에 귀족연합의 잇권을 세우는 바지의 측면으로 작동한다. 트럼프는 국민주권주의로 지배했던 기독교귀족그룹의 최근의 지배자다. 트럼프가 다소 왕적인 모습이 나타나도, 서방교회 양태론 이단 엇비슷한영역일 것이지, 동방교회 이단의 종속론에서도 극단 형태로, 나아가는 종족권력중심주의의 종교화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국민주권주의는 목자 지도자와 양떼 국민관계로서 양떼 스스로도 책임을 지지만, 목자가 보충하는 영역이다.
반면에, 민중주권은 귀족공동이익의 연합체의 직속 영역이다. 이성이 뭐가 필요하나? 이재명 만세. 이런 식으로 종속하여 궁물 먹자.
보수우파진영의 최고의 슬픔은
보수우파진영이 사쿠라 조갑제 기자 보유진영이라는 것이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용어혼란을 조갑제기자가 추진한다.
조선시대 사색당파로 아무개 대감의 사노비다, .... 하는 쪽은 민중주권에 연결된다. 오직 법에만 따르며 모든 형태의 종속주의를 거부한다, 여기서 국민이 나온다.
한동훈이 국민눈높이란 말을 썼다. 국민과 민중의 차이를 모른다. 오히려, 국민은 법, 규칙, 규범을 내세워야 한다. 한동훈도 원불교 박지원 상전 말 잘 들으랴. 위에서 주는 가이드라인대로 연기하느라 미칠 것이다.
사회를 둘러싼 핵심가치영역에서 사심없는 공론논쟁이 있어야 국민의 힘이 있다고 봐야 된다.
사쿠라 조갑제기자는 한동훈이 제 정신이라고 보는데, 사쿠라 조갑제기자가 이분 보수논객 30년 역사가 사실은 비정상이었기 때문에 나오는 판단일 것이다.
필자는 영남왕권제 씨족종교 기준으로 한동훈을 보는게 아님을 잘 아실 것이다. 아이큐 100 언저리로 다중어법으로 이웃에 현혹하지 않고 담백하게(머리나쁜 사람의 변명) 살아왔기에, 느끼는 다중어법으로 사람헷갈리게 함의 피곤함이 문제다. 서양법은 투명해야 한다.
귀족연합이 세도 너무 강한 지금이, 왕이 너무 셌던 시기를 욕할 자격은 없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