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월지와 동궁
월지와 동궁은 조선시대 양식이다. 경복궁, 창덕궁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특히 단청이 조선시대 상록하단(上綠下丹) 양식을 그대로 따랐다. 단청(丹靑)이란 목조건물에 여러 가지 빛깔로 무늬를 그려서 장식한 것으로, 단벽(丹碧)이라고도 일컫는다. 기능적으로 비바람에 나무가 썩지 않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월지와 동궁>
하지만 바탕색이 녹색인 단청은 중국 원나라~명나라 초기에 만들어진 단청이고 그 이전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신라문화재와 어울리지 않는다. 특히 조선시대 건물과 유사하여 신라문화가 파괴되는 부작용이 상당하다.
비록 신라시대 기록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발굴된 유물들과 동시대 중국 및 일본 건축물의 특성을 통해 신라시대 건축양식을 추정해볼 수 있다.
8세기 통일신라시대 단청은 이미 예상도가 존재한다. 그래픽 기술을 활용해서 꽤 정확히 고증하였다.


<8세기 통일신라시대 단청>
통일신라시대는 주변국인 당나라와 일본(나라시대) 처럼 붉은색 계통의 '주칠단청'이 대세였으나 삼국시대에 비해서는 녹색과 청색의 비율이 조금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 나라의 도쇼다이지 금당 천장의 단청을 조사해본 결과, 녹색, 청색을 사용해 천장을 꾸몄다는 결론이 도출된바 있다. 또한 삼국시대에 비해 더 많은 금구류를 사용함으로서 외부적으로 보이는 화려함도 삼국시대에 비해 훨씬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중이다. 실제로 동궁과 월지에서 서까래, 부연, 난간등에 장식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금구류가 다수 발견되었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 기와유물은 이미 많이 발굴되었다. 기와에서 신라문화를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가 '수막새'이다. 수막새란 목조건축 지붕의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기와이다. 이러한 수막새의 형태가 삼국마다 다르다고 한다. 신라는 독특한 연화문 모양의 수막새를 주로 사용했다고 한다. 신라 수막새 중에 사람얼굴무늬가 새겨진 것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신라시대 얼굴무늬 수막새>
위그림의 통일신라시대 단청(주칠단청 + 녹색,청색 + 금구류)과 신라식 연화문 수막새만 잘 고증해도 신라 문화재의 문화적 가치가 올라갈 것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자료들을 토대로 월지와 동궁의 건축물을 다시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앞으로 복원하는 모든 신라 건축물들은 위그림의 주칠단청과 신라식 연화문 수막새 기법을 따라야 한다고 본다.
2. 월정교
월정교는 서기 760년 경덕왕 시기때 궁궐 남쪽 문천에 건설된 다리이다. 월정교도 조선 + 청나라 건축양식으로 복원되어서 고증이 잘못되었다.


위의 사진들을 보면 알겠지만 단청은 월지와 동궁처럼 바탕색이 녹색인 조선양식이다. 월정교 문루 보고서에 따르면 명지대학교의 동궁과 월지 단청 복원 보고서 연구 결과를 토대로 동시대 중국 당나라와 일본 나라시대의 유구들을 참고하여 적색을 주된 색으로 사용하는 주칠단청안이 채택되었으나, 기존 월정교 누각 단청과의 조화를 이유로 결국 또다시 상록하단식 단청으로 채색되고 말았다. 초기 복원(누각)이 잘못되니까 전체 복원이 잘못되어버린 것이다.
또다른 문제는 학계의견과 달리 아치형이 아니라 일직선의 들보교로 복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12세기 고려시대 문신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경주 월정교 교각 형태가 나온다. "무지개 다리 그림자 거꾸로 문천에 비치었네" 구절로 볼 때 석조 아치교였어야 제대로 고증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문헌기록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고증하여 복원하였다.


발굴 당시 아치에 쓰이는 부재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치형 다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신라가 들여왔던 당나라식 다리 건축에서는 석조 구축을 하지 않고 나무로만 아치를 만드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당나라 건축을 받아들인 일본식 다리에서도 보이는 구조로 단지 석조 구축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 만으로는 아치형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다. 청명하상도에서 보여주는 송나라 다리 역시 중간에 석조 구축이 없는 아치형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기록인 관련 문헌(고려시대 기록)을 무시하고 문화재를 복원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지붕복원도 논란이 많다. 청나라시대 중국 남방의 풍우교(비바람을 피하기 위한 다리) 형태라는 것이다. 목조 건축의 흔적과 불에 그슬린 기와가 출토되었으므로 월정교가 지붕이 있는 누교형태의 다리였음은 확실하지만, 그 이외의 사항을 전혀 알수없다. 이로인해 지붕은 상상복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지붕은 그렇다 치더라도 단청과 기와는 신라식(주칠단청 + 녹색,청색 + 금구류 + 수막새(연화문))으로 그리고 교각을 문헌기록에 맞게 아치형으로 다시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 황룡사 9층 목탑

황룡사는 서기 553년(진흥왕 14년)에 세워졌고, 이 절의 9층(80m) 목탑은 서기 643년(선덕여왕 12년)에 자장 법사(慈藏法師)의 권유로 세웠졌다. 신라가 망한 뒤에도 경주(동경)의 랜드마크로 잘 보존되어 있었지만 1238년 제3차 여몽전쟁때 몽골군의 침입에 의해 불타서 사라지게 된다.
경주시는 2035년까지 목탑을 복원하기 위해 '황룡사역사문화관'을 건립하였다.

<황룡사 역사문화관의 목탑 모형>
황룡사 9층 목탑은 기록이나 유물이 없어서 사실상 상상만으로 복원해야 한다. 일본 나라시대 목탑을 모델로 복원한다고 한다.

<고후쿠지(興福寺, 흥복사)는 일본 나라현 나라시에 있는 불교 사원이다.>
일본 나라시대 목탑은 백제 기술자들이 만든 백제식 목탑이라고 한다. 신라식 목탑과 조금 다를 수는 있겠지만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될것 같다. 신라시대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을때도 백제 기술자들을 동원하였기 때문이다. 황룡사 찰주본기에 따르면 아비지(阿非知)라는 백제의 기술자가 서기 643년 신라가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우는데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비지는 신라의 요청을 수락한 백제가 파견한 기술자로 645년부터 소장(小匠) 200여명을 거느리고 목탑을 완공한 것으로 되어있다.
사실상 복원이 아니라 중건(새롭게 다시 짓는 것)이지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목탑 특성상 불타기 쉬워서 과거에도 수차례 중건하였기 때문이다. 황룡사 9층 목탑이 중건되면 경주의 랜드마크로 좋은 관광자원이 될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