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때 중앙정부가 거두어 들이는 공식세율은 10%였다. 하지만 탐관오리들이 많아서 조선백성들이 실제 부담하는 세율은 엄청높았다. 조선 중앙정부가 재정이 열악해서 중앙관료에게 너무나도 적은 봉급만 지급하였고 지방관리들은 아예 봉급을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보수 봉사직이었던 것이다.
 
 



결국 지방관리들은 백성들을 수탈하여 알아서 먹고 살아야 했다. 즉 조선은 구조적으로 탐관오리들이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국의 일부 경전들(주자학 서적)만 참고하여 조선을 설계한 신진사대부(성리학자)들의 실수였다. 

 
 



탐관오리들의 가혹한 수탈때문에 수확량의 절반이상씩 뜯겨서 굶어죽을 판이었다. 탐관오리들이 수확량의 7할(70%)을 뜯어가는 순간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굶어죽기 때문이었다.

 





- 일제시대가 들어서자 세율이 낮아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갑오개혁(甲午改革)을 통해 조선의 낡은제도와 악법들을 고쳐나갔다. 
 
<갑오개혁>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는 세율을 낮추어서 탐관오리들의 수탈과 폭정에 시달리던 조선백성들을 해방시켜주었다.

조선총독부는 가난한 조선백성들을 위해 일본보다 세율을 낮게 유지했다.

조선이 농업사회였기에, 일본정부가 조선에서 거둘 수 있는 세금은 대부분 농지세였다.

이 농지세 세율이 조선은 1.3%에 불과해 일본 (3%) 보다 오히려 낮았다. 조선이 일본보다 가난했기에, 조선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 세율을 낮추어 준것이다.

조선에서 거둔 세금만으로는 조선총독부 공무원들 월급의 10분의 1밖에 충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총독부 관리들이 일본에 가서 예산을 따와야 했다. 


- 토지수탈론도 허구이다.
일제의 한반도 수탈론중에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토지수탈론이다. 하지만 이것도 명백히 거짓말이다.

1910년 일제는 조선의 토지를 열심히 조사하고 있었다. 

 
"토지를 사유지로 인정받고 싶으면 신고기간 내에 신고를 하세요. 신고를 하지 않은 토지는 국유지로 삼겠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문맹률이 높아서 농민들 중에 까막눈이 많았기에 신고기간내에 신고를 못한 농민들이 많았다. 

이로인해 많은 토지가 국유지로 되자, 토지분쟁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일본은 17세기 에도시대부터 글을 읽고 쓸줄 알았던 일본인들은 전체인구의 70~80%에 달했다. 무사(사무라이)들은 거의 100% 글자를 읽고 쓸 수 있었으며 일본 백성들도 남자의 49~54%는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이때문에 조선총독부는 조선백성들도 글을 읽을 줄 안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문자 특권층(양반)들이 문맹률을 전혀 개선하지 않아서 문맹률이 90%에 달했다. 

이후 조선농민들의 높은 문맹률 사정을 파악한 조선총독부는 언제든지 사유지로 신고하면 조선농민의 사유지로 인정 해주었다.

이로인해 전국 484만 정보의 토지 중에 471.3만 정보가 조선농민들의 사유지로 인정되었다. 무려 전체 토지의 97.4%가 사유지로 인정된 것이다. 일제는 절대로 조선의 토지를 수탈하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의 백성들을 일본국민으로 흡수하러 온것이기에, 조선의 토지 그 자체를 뺏는데는 관심이 없었다. 

조선백성들이 사유지를 갖고 농사를 열심히 지어서 쌀을 생산하면, 일본은 그 쌀을 돈을 주고 사먹었다. 조선은 일본으로의 쌀수출 덕분에 부를 창출할 수 있었다.

삼성도 일본으로의 쌀수출로 성장한 기업이다. 당시 경남 의령군, 진주시 등에서 생산된 쌀이 마산항에 집결하여 일본으로 수출되었는데, 삼성 이병철 회장이 마산에 쌀 정미소를 건설하고 쌀 정미업으로 부를 축적하여 삼성상회를 만들었고, 이후 삼성그룹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삼성그룹의 시초가 된 삼성상회(쌀정미업)>



즉, 좌파역사학자들의 일제수탈론은 허구인 것이다. 

한일합방으로 민족국가가 사라지고 일본제국의 2등국민으로 들어간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일반백성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탐관오리가 사라졌고, 세율이 낮아지고, 노비가 해방되었고 신분제가 폐지되었고, 유교악습이 폐지되었고, 인프라(도로, 철도, 다리 등)가 건설되었고, 도적이 사라지고 치안이 안정되었으며, 공식문서에 한글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한반도 인구가 증가한 것을 보면 알수 있다. 1910년 한일합방 직후 1,300만의 인구가 1942년 2,600만명으로 2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그만큼 일제시대때 일반백성들의 생활수준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고, 일본제국이 만주를 점령한 덕분에 한반도내에서 전쟁과 내전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