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은 만주 하얼빈에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인물이다. 하지만 안중근의 저격행위는 오히려 조선의 독립을 어렵게 만들었다.
1905년 러일전쟁 승리 이후 미국과 영국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하였다. 이에 일본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을 맺어서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조선의 고종은 유럽(헤이그)으로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렸다. 이에 격분한 일본은 조선을 아예 병합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병합에 반대하였다. 반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경제적 부담이었다.

하지만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였다.

조선병합을 반대하던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일본은 10개월 뒤인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條約)'에 의거하여 조선을 병합하였다.
조선을 병합한 일본은 엄청난 재정을 지출하여 조선을 개발하였다. 낙후된 조선사회와 경제수준을 일본과 비슷하게 끌어올리려고 많은 투자를 하였다.
아래사진들을 비교해보면 구한말에 비해 일제시대때 많이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한말 서울거리>

<구한말 남대문 거리>

<구한말 서울 주막>

<일제시대 서울거리>

<일제시대 명동거리>

<일제시대 커피숍>
일본은 위생사업에도 많이 투자하여 콜레라, 장티푸스같은 전염병 퇴치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일제는 철도건설에도 투자하여, 한반도 전체를 거미줄 같은 철도망으로 연결시켰다. 서기 1908년 부산에서 신의주를 연결하는 한반도 종단철도를 건설한 뒤에, 1911년에는 압록강 철교를 건설하여 한반도 철도를 만주철도와 연결시켰다.

<일제시대 조선 철도망>
일제시대때 특급열차 아카츠키호가 서울-부산 간을 6시간 대에 주파하였다. 부산에서 급행열차를 이용하면, 만주의 창춘(長春)까지 35시간,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9일, 프랑스 파리까지 11일이면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경부선 아카츠키호 식당칸>

<경부선 아카츠키호 1등석>

<경부선 아카츠키호 1등석: 칼라버전>

<경부선 아카츠키호 일반석>
하지만 조선병합으로 인해 일본은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지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러일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빚을 진 상태였다. 1905년 일본 정부가 보유한 금이 1,200만 파운드이고 연간세수가 1,900만 파운드였다. 하지만 전쟁비용은 일본의 8년치 국가예산을 쏟아부어야 했다. 결국 일본은 국채를 발행해서 전쟁비용을 충당해야 했다. 러일전쟁의 19개월 전쟁기간 동안 발행한 엔화 국채는 총 7,200만 파운드, 영국과 미국에 진 외화국채가 8,200만 파운드. 즉 전비의 83%가 국채로 충당되었다. 그동안 일본의 국방비가 GDP의 16.6%로 치솟고 정부 부채 비율도 무려 40-50% 포인트가 늘어 전후에 일본 정부는 8년치 정부 세입을 넘는 부채를 졌다. 이런 큰 재정적 압박을 받자 일본 정부는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긴축재정정책을 펼치고 영리사업에 나섰다. 심지어 1895년 청나라로부터 할양받은 대만섬 개발에 돈이 많이 들기에 프랑스에 팔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0년 8월 조선까지 병합하자 일본은 재정적자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이 막대한 재정을 들여 조선개발에 나서자 일본본토 주민들의 경제적 수준이 개선되지 못하였고 경기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장기경기침체는 일본의 군국주의를 부채질하였고 2차세계대전 패전의 악몽을 가져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