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란 존재가 커다란 정신적 일이나 육체적 일도 감당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있다는 것은 그들의 몸집만 봐도 알 수 있다. 여인은 생존의 죄와 잘못을 행동이 아닌 노고로 갚는다. 다시 말해 해산의 고뇌, 육아에 대한 걱정, 남편에게 복종해 그 인내심있는 반려가 되어 따뜻한 손길 노릇을 한다. 심한 고뇌, 희열, 노력 등과 같은 것들은 여성의 천분 밖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들의 생애애는 남자보다 훨씬 더 고요하고 참을성있게 흘러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남과 여의 생애는 근본적인 점에 있어서 어느 쪽이 더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은 아니다. 여성이 우리의 유년기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보육자나 교육자로서 적합한 것은 요약하건대 그들이 유치하고 어리석고 근시안적 사고를 갖고있기 때문이다. 즉 평생토록 큰 어린이에 그치는 까닭이다. 다시말해 그들은 어린아이와 남자의 중간적 존재이므로 남자만이 진정한 인간이라 할 수 있다.
뭐든지 정도가 높고 완벽할 수록 서서히 성숙하게 된다. 남자의 이성과 정신력이 성숙하게 자리잡는 것은 내가 보기에 30세에 도달할 무렵이지만 여자는 20세 정도이다. 그런데 이리 조숙하는 여자의 이성은 명색만 이성일 뿐, 실제로는 매우 열등한 것이다. 여자는 한 평생 어린이를 벗어날 수 없으며 언제나 눈앞의 것만을 보고 현재에만 사로잡히며 사물의 외관과 실상을 곧잘 오인하고 가장 중대한 일보다 사소한 일에 구애되곤 한다. 인간이 동물과 달라 현재에만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 대해 관심을 갖고 걱정을 하며 속을 석히는 것은 이성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 여성은 빈약한 이성을 갖고 있으매 남자에게 비하면 이성에서 비롯되는 여러 이해관계와는 인연이 멀다. 따라서 여성은 정신적 근시안으로써 협소한 시야를 갖고 있으므로 그 지성은 가까운 데만 예민히 볼 수 있고 먼 데의 것은 눈에 들지조차 않는 것이다. 그녀들이 때로는 미친듯 낭비를 하는 것도 이 까닭이다. 여성은 맘속으로 남자의 역할은 '돈을 버는 일', 여성의 그것은 '돈을 쓰는 일', '가급적 남편이 살아 있을 때부터 죽은 뒤에까지 돈을 쓰는 것'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남자가 가계를 위해 벌어들인 돈을 주고 간섭을 하지 않는 데에서 그녀들은 더욱더 이런 더러운 사고방식에 젖게 된다. 이리 하여 여인은 현금주의라는 사실은 대단히 나쁜 결과를 불러오고 있으나 거기서 오는 이득도 없지 않다. 여성은 우리 남성들보다 한 층 더 현재속에 살며, 따라서 견딜 만 한 현재라면 이를 곧잘 즐긴다. 또한 그녀들에게 고유한 명랑성으로 남자의 마음을 맑게 하고 때로는 위로자가 되기도 한다. 그녀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까운 길을 곧잘 발견하는데, 그것은 그녀들이 가까운 것만 잘 보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먼 곳에 한눈을 팔아 발 밑의 것을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많다.
자연은 일류를 번식하게끔 하고 그 올바른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젊고 건강한 남자를 도구로써 사용하며 이 법칙은 위력에 있어서 다른 어느 법칙보다도 우세하다. 본질적으로 말하면 여성은 다만 종족의 번식을 위해 존재하고 그 평생의 임무는 그것으로 끝난다. 따라서 그녀들은 항상 개채보다도 한층 더 종족 속에 살며 개체에 관한 것보다 종족에 관한 것에 더 충실하다. 그녀들의 이러한 태도는 그 행동 전체에 걸쳐 일종의 무분별이라는 특색을 지니게 된다. 이리하여 남자의 생활이나 행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향을 보여준다. 남녀가 결혼한 뒤에 충돌이 생기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은 이 때문이다.
본래 남자는 중립적이고 여자는 적대적이다. 그것은 경쟁자에 대한 증오감이 남자는 단체에 한정되어있지만 여자는 그녀들 전체에 파급되어 있으며 그녀들이 모두가 유일한 가사를 갖고 있는 데에서 비롯된다. 두 여자가 인사하는 것을 들으면 남자보다 더 우스꽝스럽다. 남자는 자기보다 훨씬 사회적 직위가 낮은 자에게도 대체로 다소의 겸양과 인정을 섞어 말하지만 여인은 그렇지 않다.
키가 작고 어깨가 좁고 가슴께와 둔부가 발달한 여자라는 족속을 아릅답게 여기는 까닭은 다만 성욕으로 인해 눈에 아지랑이가 낀 남자의 몰지각 때문이다. 여자의 아름다움은 하나에서 열까지 이 성욕이라는 충동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음악이나 시나 미술에 대해 그녀들은 사실상 아무런 이해와 감수성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녀들이 그를 이해하는 척 하고 떠들어 대는 것은 다만 남자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다. 그녀들이 객관적 감정수입을 할 수 없는 것은 남자가 모든 사물을 이해나 지배를 통해 직접 좌우하려고 하는 데 반해 여자는 단지 간접적 지배, 즉 남자를 통한 지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들은 태생적으로 모든 것을 남자를 손에 넣기 위한 수단으로 보고, 그 밖의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다만 외관상 그렇게 보일 뿐이다. '루소'는 말한다. "여자는 대체로 어떤 예술도 사랑하지 않으며, 어떤 에술에도 익숙할 수 없고, 아무런 천재성도 갖고있지 않다." 이것은 적어도 사물을 외관을 넘어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진작에 관찰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확인하려면 음악회라던가 오페라 등을 구경할 때 그녀들의 주의를 어디에 집중시키는가를 보면 된다. 여자란 대체로 가장 우수한 자라 할지라도 미술 방면에서는 위대한 독창적 창작을 한 일이 없었으며 하나도 영원한 생명성을 지닌 가치있는 작품을 제작한 일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여자에게서는 기대할 만한 것이 외관상의 것외에는 없음을 알 수 있다. 기술에 있어 그녀들에게도 남자들과 같은 소질이 있으므로 열심히 공ㅇ부하지만 명화라고 부를 만한 것은 그런 예시가 없다. 여성들은 정신을 객관적으로 활용할 줄 모르는데 회화에서는 그것이 무엇보다 직접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일부일처제도가 채택되어있는 곳에서는 결혼하는 것은 자기의 권리는 반감시키고 의무를 배가함을 뜻한다. 법률이 여자에게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허용한다면 그녀들에게 남자와 동등한 이성도 부여해 줘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법률이 여자에게 권리나 명예를 인정하고 그녀들의 자연스러운 상태를 무시하면 할 수록 실제는 이 법률의 혜택을 얻는 여자의 수는 점점 줄어 결국 나머지 대다수의 여자들은 그만큼 훨씬 더 많이 본래의 권리를 상실하게 된다. 법률은 여자가 어느 모로나 남자와 동등한 것이 아닌데도 전적으로 동등하게 여기며 일부일처제도를 통해 어듯 보면 여자에게 유리하지만 실은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입장을 부여하기 때문에 총명하고 사려깊은 남자들은 결혼이라는 불리한 약속을 하여 그런 희생을 당하기를 주저하는 것이다. 일부다처제도의 국민 사이에서는 여자가 저마다 생활의 비호를 받고있는데, 일부일처제도의 나라에서는 결혼한 여자의 수가 적어 나머지 여자들은 살아나가기가 힘든 형편에 있다. 그리하여 시들어빠진 노처녀로 하릴없이 허송세월을 하며 괴로운 노동을 하거나 창녀가 되는 수밖에 없다. 창녀가 되어 생활의 보람도 즐거움도 모르고 살아가는 여자들은 일부일처제도의 사회에서 남성의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가 되어있다. 그들의 목적은 현재 남편을 갖고 있는 여자가 남편을 가지려고 하는 여자들이 그릇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방어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여자들은 일부일처제도의 희생을 당해 구렁속에 빠진 것이다. 그러므로 넓은 견지에서 볼 때 여성들을 위해서라도 차라리 일부다처제도가 말썽이 적을 지 모른다. 아내가 만성병에 걸려있거나, 불임이 판명됐다거나, 또는 나이를 먹어 성적 매력이 없어졌을 때 남편이 둘째, 셋째 아내를 맞는 것이 왜 나쁜가? 난 그 이유를 찾아낼 수가 없다. 우리 모두가 적어도 어느 시기는 대개 사실상 일부다처주의자가 되어있다. 남자가 본래 많은 여자를 필요로 하고 이를 원하는 한 그가 자유행동을 취해 책임을 지고 여러 부인들을 먹여 살릴 수 만 있다면 이의가 있을리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