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사신은 중국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왔기에 '칙사'라고 불렀다.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 외교를 표방한 조선왕조에 있어서 칙사 대접은 말그대로 국가적인 대사였다.
 



명나라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서 국경도시 의주에 도착하면 정승급 인물이 접반사로 임명되어 영접을 나갔다.

이어 사신이 지나가는 안주, 평양, 개성 등 주요 도시에도 고위급 신료들을 보내 문안케 하고 성대하게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명나라 사신이 한양 근처에 당도하면 영은문(迎恩門, 은혜로운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문) 주위에 있는 모화관(慕華館, 중화를 사모하는 여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도록 배려하였다. 

 
구한말 영은문(迎恩門) 사진: 서울 서대문 지역



명나라 사신이 모화관에 당도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조선국왕이 직접 모화관으로 행차하여 사신들을 영접하였다. 

이후 명나라 사신이 한양 궁궐로 가는 동안 '채붕(비단이나 색종이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을 설치하고, 광대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환영식을 열어주었다.


 



명나라 사신이 경복궁이나 창덕궁에 도착하면 황제의 칙서를 맞이하였는데 그 모습이 가관이었다. 

1425년 2월(세종 7년)때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이날 세종은 한양에 들어온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느라 하루 종일 바빴다. 창덕궁에 도착한 세종은 사신들과 두 번 맞절을 하고 차를 마신 뒤 황제의 칙서를 받았다.

 



그리고 사신들을 숙소인 태평관으로 보내고 얼마 후 세종이 직접 방문하여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후 세종은 신하를 태평관으로 보내 사신과 수행원들에게 선물을 한 보따리 씩 주었다.

사신이 귀국할때면 성대하게 고별잔치를 베풀어주었고 돌아가는 거점(개성-평양-안주-의주)마다 문안인사를 시켜 가는 길까지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명나라 사신들은 환관출신이 많아서 아주 탐욕스러웠으며 속국이라 얕잡아보며 조선 조정을 괴롭혔다. 

이때문에 사신단이 한번 오면 조선은 왕실 국고의 절반 이상이 거덜났다. 

1429년(세종 11년) 명나라 사신이 귀국할 때 챙겨갔던 선물과 뇌물은 200 궤짝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궤짝 1개당 나르는 인부가 8명이 필요했으니, 챙겨간 선물과 뇌물을 운반하는 인부가 1,600명이고 행렬만 2km 였다고 한다. 

1602년(선조 35년) 명나라의 황태자 책봉 사실을 알리려 왔던 고천준이라는 사신의 횡포도 대단하였다. 압록강을 건너서 의주에 당도한 뒤 한양에 도착할 때까지 들르는 지역마다 은과 인삼을 내놓으라고 횡포를 부렸다. 수만 냥의 은을 다 쓸어가버려서 조선에 은이 고갈되었다고 한다. 

 




"의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수천 리에 은과 인삼은 한 줌도 남겨지지 않았고, 온 나라가 전쟁을 치른 것 같았다."(선조실록)

‘올 때는 사냥개처럼 갈 때는 바람처럼(來如獵狗去如風)/ 모조리 쓸어가니 조선 천지 텅 비었네.(收拾朝鮮一罄空)/ 오직 청산만은 옮길 수 없으니(惟有靑山移不動)/ 다음에 와서 그림 그려 가져가리.(將來描入畫圖中)’ - 음력 1602년(선조 35) 3월, 조선을 다녀간 명나라 사신 고천준(顧天埈)을 수행했던 동충(董忠)이란 인물이 남긴 시구




명나라 사신 뿐만 아니라 사신단을 수행하는 서반과 군관들이 자행하는 폐단도 상당했다. 이들은 명나라의 국력과 칙사의 권위만 믿고 질이 낮은 중국산 물건들을 조선에 강매했고 조선인들로부터 각종 물자들을 약탈하였다. 일부 성격이 거친 수행원들은 조선인 견마꾼(마부)을 구타해 살해하는 일도 있었다. 


문제는 탐욕스러운 명나라 사신단이 조선에 자주왔다는 것이다. 세종 재위 때에만 명나라 사신이 36 차례나 조선에 파견되었다. 1년에 평균 1.13회씩 조선을 방문했으니 매년 조선에 왔던 것이다. 

이때문에 조선왕조는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명나라 사신단이 지나가는 길목인 서북지역(평안도, 황해도)은 사신을 접대하느라 재정이 거덜나서 백성들이 굶어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교훈: 부국강병을 통해 국력과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 또한 거대한 중국을 상대하려면 혼자서는 힘들고, 한미일 동맹을 통해 세력 균형을 이뤄야 한다. 한국에서 친중좌파는 매국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