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르곤이 이끄는 청나라군은 1644년 5월 27일 산해관에 입관하였고, 6월 5일 베이징에 입성하게 된다. 중국대륙의 권력이 명나라 시대에서 청나라 시대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당시 베이징성은 오랜 전쟁으로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특히 쌀이 부족하였다. 베이징의 쌀값이 매우 비싸서 쌀 한 말(8kg) 값이 은 3전으로 평시보다 3배 정도 급등하였다.
이때문에 청나라는 요동의 모든 쌀을 베이징으로 운송하여 쌀값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이로인해 청나라의 재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요동에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때 청나라 실력자 예친왕 도르곤은 약소국 조선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에 조선왕 인조는 쌀 1만 석을 베이징으로 보냈다.

이에 조선 조정은 현재 조선의 재정으로는 쌀 20만 석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7만 석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청나라가 최소 15만 석은 보내야 한다고 하자, 10만 석으로 타협을 보게 된다.

청나라 도르곤이 즉시 쌀을 보내라고 하자, 조선 조정은 급히 쌀을 운반할 배를 모았다.
"쌀 운반할 배를 각도에 나누어 정하였다. 평안도 20척, 황해도 25척, 경기도 10척, 충청도 65척, 전라도 68척, 경상도 11척, 각 아문의 배 12척, 통영의 배 12척 및 삼남 지방에 전부터 정해 놓은 배 80척까지 모두 합하여 3백 척이었다."
당시 조선이 베이징으로 보낸 쌀 11만 석은 조선왕조의 1년치 국가재정이었다. 도르곤이 조선의 1년치 세입을 모두 빼앗아 간 것이다. 결국 조선은 심각한 재정난과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다.
"원래의 전결(田結)에 대한 1년 치 세입이 10만여 석인데 지출하는 수효는 11만여 석으로, 백관 이하 액정서 하인 등에 이르기까지 차등에 따라 비율대로 소미를 섞어 요를 지급하겠다. 을유년(1645년, 인조 23년) 한해 동안 소용된 수량을 가지고 살펴보건대, 쌀이 11만 6천여 석이 되어야 계속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삼세미(三稅米)로서 올라온 것과 아직 거두지 않은 수량이 겨우 7만여 석이고 해서의 소미는 올라오기도 하고 올라오지 않기도 하는데 모두 3만 3천여 석으로, 합해서 계산하면 최대치로 잡아도 겨우 10만여 석입니다."

한국이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서 오늘날 부국이 된것은 한미일 동맹 덕분이다. 하지만 친중좌파들이 다시 조선시대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중국영향권으로 들어가면 기술과 국부를 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