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러시아 문명의 귀환’
 
  이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으로 부상하고 있는 국가는 당연히 러시아다. 얼핏 보면 러시아는 포퓰리즘과 큰 관련이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푸틴 정권은 24년째 국가를 통치 중이고, 소련 시절부터 형성된 군부, 검찰, 정보부 엘리트들이 막대한 자원을 통제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정은 다르다. 푸틴 집권기 첫 10년만 하더라도, 러시아의 엘리트층과 중산층은 서구와의 연결을 통해 이득을 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전임 보리스 옐친 시기에 국영 기업 민영화로 막대한 부를 쌓은 과두재벌(올리가르히)은 물론이고, 푸틴이 러시아를 안정화시킨 결과, 양대 핵심 도시인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형성된 중산층도 있었다.
 
  하지만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비롯하여 인접한 탈(脫)소비에트 국가들을 둘러싸고 서구와 본격적인 대립 구도를 세우자, 푸틴이 의지해야 하는 주요 지지층은 급속히 바뀌었다. 2014년 크림(크름) 병합과 돈바스 전쟁으로 시작된 경제 제재는 서구와 연결된 재벌과 중산층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대신에 다시 서구와 대립하며 ‘위대한 러시아 문명의 귀환’을 외치는 푸틴의 새로운 민족주의적 수사에 동조하는 지방 도시들과 농촌 지역이 푸틴의 가장 큰 지지 세력으로 떠올랐다. 말하자면 푸틴의 포퓰리즘에서 ‘진짜 국민’이 맞서야 할 타락한 엘리트는 이미 푸틴이 제압한 상태였고, 대신에 러시아를 다시 해체시키고, 우크라이나 돈바스의 러시아인 동포를 위협하는 ‘진짜 적’으로 서구가 부상하게 된 것이다.
 
 
  ‘해양 세력’ vs ‘대륙 세력’
 
  이 결과 2014년 이후 크렘린에서는 새로운 세계관을 구상하여 자국은 물론이고 해외에서까지 지지자를 모으는 홍보에 주력했다. 세계는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는 문명 세력과 그것을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해체시키는 서구의 금권(金權) 세력으로 나뉜다는 것이 새로운 세계관의 핵심이었다.
 
  성(性)과 가족은 여기서 핵심 전장(戰場)으로 부상했다. 미국 주도의 서구 국가들은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페미니즘, 성소수자 이데올로기를 전파하여 가족을 해체시키고 동성애를 조장하니, 전통 문명의 가치를 보전하는 세계, 특히 유라시아의 전통주의자들이 연합을 해 맞서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우크라이나에서 서구화를 지향하는 유로마이단 혁명이 일어나자 “서구는 기독교적 뿌리에서 멀어지고 있지만, 러시아는 기독교에 뿌리를 둔 전통 가치로 돌아가고 있다”고 언급했다.
 
  미국의 ‘단극(單極) 세계’에 맞서는, 지역 강국들이 주도하는 ‘다극(多極) 세계’를 만들겠다는 러시아의 비전에서 유라시아 각지의 우익 포퓰리스트들은 잠재적인 주요 협력자로 부상했다. 특히 푸틴의 정책을 설명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사상가인 알렉산드르 두긴은 이런 아이디어를 더욱 적극적으로 주창했다. 두긴은 세계사 자체를 이성의 이름으로 모든 관계를 화폐로 환산하는 ‘해양 세력’과 해양 세력에 맞서 숭고함을 지키는 ‘대륙 세력’의 대립이라고 하며, 해양 세력의 패권에 맞서는 전 세계적인 대륙 세력 동맹의 필요함을 역설했다. 두긴이 주목한 대륙 세력은 오스만 제국을 이은 튀르키예, 이슬람 성직자들이 통치하는 이란,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는 중국, 새로운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헝가리, 힌두교에 따라 국가를 재조직하는 인도였다.
 
  당연히 이 국가들이 러시아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러시아와 대립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화적 자유주의와 세속주의를 요구하는 국내의 반발과 서구의 압박이 가해질 때, 이들은 종종 러시아와 같은 목소리를 내면서 ‘국민의 의지’를 근거로 자신들의 정책을 정당화하고자 한다.
 
  ‘위대했던’ 역사를 낭만화하는 경향도 빼놓을 수 없다. 푸틴은 러시아 제국과 소련을, 모디는 이슬람을 믿는 무굴 제국에 맞선 마라타 연합을, 에르도안은 오스만 제국을 내세우며, 강력한 지도자하에 단결된 제국의 영광을 스펙터클하게 연출해 오늘날에도 전설적 역사가 다시 부활하고 있다는 신호를 발신하며 지지자를 규합한다.
 
 
  두긴과 배넌
 
2018년 9월 22일 로마에서 열린 반EU 행사에서 연설하는 스티브 배넌. 이 자리에서 그는 “이 포퓰리즘 운동의 새로운 엘리트는 사회의 애국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사진=AP/뉴시스
  유라시아 우익 포퓰리즘은 대양 건너편, 유라시아 바깥의 미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 포퓰리즘의 전통 위에 있는 인물로, 전통과 문명을 얘기하는 유라시아 경향과는 구분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2016년 대통령 선거 당시 트럼프의 숨겨진 책사로 명성을 떨친 스티브 배넌 같은 인물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기독교에 근거한 미국의 가치가 거대한 북미 대륙의 중소 도시와 농촌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이 고귀한 평민 대중을 착취하는 뉴욕과 캘리포니아의 ‘타락한’ 금권 세력과 문화 엘리트를 축출하고, 미국만의 전통적 가치를 되살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러시아의 두긴과 놀랍도록 흡사한 세계관인데, 실제 배넌은 두긴의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두긴과 사적으로 만나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을 정도다.
 
  최근 전통주의를 치켜세우는 패트릭 드닌을 비롯한 신우익 지식인들이 헝가리의 오르반을 고평가하는 경향도 매우 뚜렷하다. 지정학적인 이해관계가 때때로 다를 수 있어도, 일종의 문명주의라고 할 수 있는 신흥 우익 포퓰리즘 공통의 세계관은 국가 간 영향을 주고받으며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