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은 김대중처럼 ‘중도’를 공산마을 종족주의로 규정하면 지지율이 폭락할 것 – 국힘은 ‘조갑제기자’와 함께 망한 우파를 어찌할꺼냐부터 풀어야
 
 

한동훈의 ‘중도확장’에 명분적으로는 찬성한다. 그러나, ‘중도확장’이란 말 자체가 현실의 한국정치는 ‘허경영’의 불로유 수준으로 대단히 자의적이고 주관적으로 쓰여 왔다. 그런 점에서 우려를 제시한다. 필자는 非운동권이다. 非운동권이면서 철학과 사회과학을 졸지에 30년 독서했다. 필자에겐 트럼프 공화당이 집권하면 “럼프형이 최고!!” 한미동맹 오케이, 해리스가 집권하면 미국 민중정치의 힘을 믿습니다 “해리스 짱!!” 하며 누가 되든 응원하는 멘트가 준비가 돼 있다. 필자는 西學의 중도가 맞을 것이다.
 
필자의 ‘중도정치’와 한동훈이 같은 개념정의가 아닐 경우에 허경영의 사이비종교 본진인 하늘궁에 강제 신도가 된 느낌을 보수층이 느낄 수 있다고 본다. 지금 적는 글은 한국에서 간행된 이 분야 책자를 전부 뒤지고 하는 이야기다.
 
 
❶ “중도정치”는 가장 기본적인 뜻은 수도권 양반가문(기본적으로 수도권은 老論 나와바리) 중에서 왔다갔다 기회주의 성향이되, 양반의 밑천인 농토가 쥐꼬리 만한 양반계층을 의미한다.
 
❷ 그리고, 이승만을 필두로 ‘미국-일본’을 중화세계로 청나라 황실을 대체할 영역으로 바라보는 유교 붕당 체계를 우파.
 
박헌영이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 내내 민족해방운동이 소련돈 먹었으면 레닌의 크렘린궁이 청나라 황실 대체 아니냐? 남북한이 모두 소련이 주도권(공산화)가 돼야 한다고 믿는 유교붕당체계를 좌파.
 
이를 뺀 나머지 영역을 ‘중도’로 규정한다. 해외 외신기자가 규정한 이래 현재까지 쭉 유지되고 있다.
 
여기서, ‘중도=중간’으로 보면 큰 오해가 온다.
 
수도권의 작은 농토의 기회주의 성향의 양반가문은 결과적으로 양반 붕당 지도 분파로서, 좌클릭의 경향이 짙다.
 
중도파가 장악한 시대로 기록한 현대사논문들은,
 
첫 번째로 남북연석회의. (모두가 이 결과물을 다 안다고 본다)
두 번째로 4.19 시대 좌파의 모습이다.
 
‘중도’정치는 당사자는 자기들을 ‘중간’으로 기록하지만, 외부에서는 좌클릭으로 중도정치의 다수파가 비춰진다.
 
남북연석회의 참여한 공식적인 공산당연계자를 뺀 나머지 인사들의 경우, 자신들의 조상 발언에서 공산언어 찾아보라고 한다. 찾기 절망적으로 어렵다. 하물며 김규식 박사는 민족혁명당 수장으로 소련이 공산주의 리더로 주목했으나, 김규식 박사의 남북연석회의 발언록 봐도 공산파의 발언 맞나? 그런 뜨악해짐을 느낀다. 그러나, 남북연석회의는 명백한 좌클릭의 행사다.
 
촛불 두목 백낙청의 원불교 일원상진리 교리가 진실을 말해준다고 본다.
 
종말론적 종족의 소환은 그 안에서 ‘우파’도 있고 ‘좌파’도 있고 ‘우 6-좌 4’도 있고, ‘좌 7 우 3’도 있고, 다양한 이들이 섞여있을 것이다. 이를 원불교(사탄교) 일원상진리로서 백낙청이 중앙에 중도 중용 조화 균형 상생을 이루었다고 논한다.
 
원불교(사탄교) 백낙청 장본인은 원불교 교리 일원상진리의 실현으로 본다. 그러나 외부의 시선으로는 민중민주주의 민족해방 통일전선으로 본다.
 
김대중은 평생 ‘중도 우파’라고 스스로 규정했다.
 
보수정당은 김대중을 좌파로 규정한다. 문제는 그렇다. 김대중의 ‘새정치 국민회의’는 좌파 60, 우파 40의 결합이다. 김대중 중심으로 김대중이 중심을 잡고 연합했다. 그 좌파 60이 분가해서 열린우리당이 되고, 오늘의 이재명 더불어 민주당이 되고, 그 40이 분화돼서 결국 국힘에서 윤석열 한동훈이 나오는 계기가 됐다.
 
문제는 ‘중도’를 김대중의 개념 규정처럼 규정해버릴 때, 보수정당은 아무도 정답을 모르는 씨족습관으로 돌아가게 된다. 즉, 허경영 불로유를 믿습니까? 하는 레벨의 추종자 모으기로 들어선다는 이야기다. 이성적 논리로 대충은 따라잡는다.
 
필자는 70년생이다.
 
민주정의당 전두환 시대를 겪었다.
 
우파책만 공부하세요. 좌파책 ? 읽지 마세요.
 
헤겔? 유럽좌파와 가까워요
칸트? 자유주의 신학이랍니다. 읽지 마세요.
 
그러면 뭘 읽으라고!!
 
반대로 좌파는 이런 식이다.
 
그대는 전진 출판사의 레닌전집을 읽었는가?
 
그대는 소비에트 철학연구소에서 만든 세계철학사를 읽었는가?
 
혁명정신이 투철한 그대는 어떻게 책꽂이에 부르주아 반동책을 꽂는가?
 
우리는 분명히 좌파측에서 보면 우파가 이렇게 보이고
우파측에서 보면 좌파가 이렇게 보이고,
이런 시점을 갈구하지만 어디에서도 발을 못 붙이던 때가 있다.
 
미국인은 트럼프 지지자는 해리스 지지층과 담을 쌓아야 하고, 해리스 지지층은 트럼프 지지층과 담을 쌓아야 한다. 한국인에겐 미국 공화당 지지자들의 서적이나, 미국 민주당 지지자들의 서적이나, 똑같은 미국 정치의 책이다.
 
필자는 대승불교 차원으로 양 이념 화해? 이러한 것과 차원이 다르다. 양 정당이 모두 기독교정당이라는 사실에서 기독교가치와 맞물린 서양철학을 핵심으로 바라본다.
 
필자가 의미있게 바라보는 것은
 
미국 민주당의 블랙라이브즈 매터스와 얽힌 시각과, 한국의 더불어 민주당의 5.18 헌법전문론의 차이다. 미국 민주당의 공산혁명을 배제한 프랑스 계몽주의 중심의 사회민주주의 가치와, 여전히 원불교 백낙청 통해서 남북연합체라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한반도 버전의 미망에 바진 차이다.
 
필자에겐 더 이상 ‘우파 학문만으로 달관한 붕당’에 소속 여부가 중요하지않다. 그리고 지금 운동권 출신 책벌레 유튜버들의 대부분이 필자와 엇비슷한 잡식성 독서가로 바뀌어 있다.
 
1) 원불교(사탄교)인들이 원불교 교단 중심으로 종교 줄세우기 방법이 있고, - 원불교 구미에 맞는 것의 자의적 취사선택이 이루어진다.
 
2) 법 앞의 평등으로 헌법적인 종교간 평화가 있다.
 
한국 헌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취한다.
 
독일 기독교민주당과 독일 사회민주당이 연합하여 하나님앞에 국가계약 이룬 결과물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그 법질서를 수용했기에, 사민당 언어로도 읽을 수 있고, 기민당 언어로도 읽을 수 있다. 양쪽을 다 해석가능한 사람이되 하나님 앞이 진실한 서학 중도와, 양쪽에 간에 붙었다 쓸게 붙었다 가능하면서 양쪽이 모두 특정 종족이어야만 한다는 규칙을 까는 것은 다르다.
 
독일 사민당 친미파 위르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이론에서 의사소통의 전제조건으로 이성적 전제조건을 다는 경우,
 
그리고 원불교인들이 다양한 신앙의 대화를 주장하지만, 결국은 원불교인들의 갑질이 북한공산당 5호담당제처럼 이루어져야 하는 경우,
 
완전히 완벽히 다르다.
 
진짜 문제가 돼야 하는 경우는 이것이다.
 
자유경제원이 전부인 것으로 알던 보수진영은 리병태 수준의 한심한 경제평론을 듣기를 강요당해야 했다. 정규재가 대단하지 않은데 그 수준의 이야기를 듣길 강요당해야 했다.
 
경제유튜브를 보면 정말로 수준높은 식자층이 많다.
지금은 사쿠라 조갑제 수준으로 하향 평준화된 망한 보수 문제다.
 
우파유튜버들 중에서 우파정당을 찍는 유권자 눈높이에 맞는 이들이 거의 없다.
 
기본적으로 의사소통을 위하여 기본조건으로 논해지는 기초정보 자체가, 사쿠라 조갑제는 씨를 말리듯이 미래세대의 학문의 자유를 진멸급 박멸을 했다.
 
우파정치 내용에서도 비슷할 것이다.
 
사실, 잡식성 독서가로 우파 및 좌파책 동시에 다 본 독서가가 자유경제원에 억눌려온 경제유튜브 숫자만큼 많을 것이다.
 
조갑제나 김세의씨, 등 기존의 人의 장벽에 막힌다.
 
“우파”라고 규정된 어법의 대부분은 6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 미국 공화당 세계패권시대에 미국공화당과 비위맞춘 영남 사람들의 씨족주의가 많다. 그 씨족주의가 곧 보수주의는 아니다.
 
그 씨족주의가 보수주의라는 전제로
 
이승만 이용사업
박정희 이용사업이 있다.
 
그 씨족주의로 간다는 전제로, 김대중진영의 중도라고 주장하며 좌파 혁명사상을 파는 일이 가능하다.
 
한동훈은 73년생이다.
 
이 세대는 43년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20대였고, 동시에 지금에서 그 세대가 은퇴안하고, 군사정권 수준의 지성에서 멈춰 버린 채 미래의 지성을 콱콱 틀어막는게 현실적으로 나타난다.
 
 
군사정권은 사회통합을 위해서 독재정치를 세웠다.
 
독재 없는 사회통합하려면, 투명한 이성언어어야 한다.
 
그런데, 기지도 못하는 데 나는 척 해온 40년대생의 종신 지배체제에 쌓여 있다.
 
사실 냉정한 말로 조갑제처럼 신라를 논하면, 그 신라가 김일성주의나 공산주의 표현이 아니라고 하기 불가능하다.
 
김일성 북한도 신라교육을 한다.
 
조갑제 본인이 계속 사쿠라짓 계속하면서 씨족이 보수니까 보수다. 이런 궤변도, 투명한 이성언어 중심의 경쟁구도에서는 사라진다.
 
사실, 한국 국민에겐 ‘미국정치’의 보수/진보는 의미가 없다. 이재명 민주당이 진보를 주장하며 ‘엽기적’이기 때문이다. 또 조갑제는 보수를 주장하면서, 저능 저열한 씨족주의이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이 기본적으로 보수진영에 출판문화가 있어야 편하다. 이게 없다.
 
원불교(사탄교)인끼리 보수-진보를 싹 장악하는 과정에서는 보수에 정보가 그대로 폭망하는게 편할 것이다.
 
헌법 질서로 헌법적 중도정치에서는 사쿠라 조갑제 때문에 망해도 너무 망한 보수진영 인문사회학을 방치하면 안된다.
 
40년대생이 지금 현실에서 30여년 전을 생각할 수 있다. 그분들에겐 자유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에겐 뭔 소리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할배야. 그게 의미가 있니 이 시대에? 하는 반론권이 중요하다.
 
그런데, 원불교(사탄교)인끼리 다 줄세우고 자기가 중앙에 축을 세우는 의미로서, 그런 호남식 중국봉건제의 다시 반복 안되나?
 
즉, 영남식 중국 봉건제냐, 호남식 중국 봉건제냐,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비론. 모든 형태의 중국 봉건제 안녕! 이 한국보수주의의 살길이다.
 
요점이 이것이다.
 
지금 국민의 힘의 가장 커다란 문제점은 김영삼 정권을 세운 40-50년대생 할아버지 들 기준으로 그분 인식론 수준이기에,
 
모든 것이 다음세대에겐 미치고 팔짝 뛰고 짜증나고 뒤집어질 정도로 몽롱하고 자의적이다.
 
씨족적으로 내내 그래야 해서 그 틀을 벗어나지 말아야 하며, 그 속에서 노예화를 보수주의로 인정 못한다는 것이 물밑의 여론이다.
 
김영삼 정권을 세운 김대중 세력 꼭두각시 노인들의 사고구조를 계승하며, 그 틀안에서 변주곡 하면 당연히 그간 벌어진 모순은 극대화된다.
 
좌파와 우파를 모두 회통하는 잡식성 사고를 가지는 경지이냐, 아니면 원불교 교리 안에서 공산씨족 종족주의안에 부분 분담으로서 보수냐는 천양지차로 다르다.
 
자유경제원 만 보아야 해서 리병태 수준이 전부인줄 알았던 국민에게 경제유튜버 경쟁구조는 상큼했다.
 
마찬가지로, 보수국민에게 조갑제나 김세의가 전부인 수준에서 정말로 재생해야 할 영역이 재생될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기본적인 영역에서 개념이 투명해야, 그 중간이란 영역도 소통이 몽롱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