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은 한일기본조약을 맺고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했다. 공식명칭은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이다. 한일기본조약은 이미 1965년 2월 가조인되었지만 청구권협상은 난항을 거듭한 끝에 6월 22일 타결되면서 양국은 서명과 함께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했다. 한일기본조약의 ‘2조’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즉 1905년 을사조약은 한일기본조약 2조에 의해 이미 무효가 된 것이다.

한일기본조약에 수반되는 관련 협정으로는 ▲한일어업협정,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및 대우 협정, ▲경제 협력 협정, ▲문화재 협정부속협정 등 4가지다. 흔히 청구권이라고 불리는 경제협력협정의 공식 명칭은 ‘한일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결정’이다. 서문에는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및 양국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희망하고 양국 간의 경제협력을 증진할 것을 희망하여 같이 합의하였다’라고 명시되었다.

이 협상으로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와 상업차관 3억 달러 등 총 8억 달러를 1966년부터 1975년까지 10년간에 걸쳐 받았다. 1965년 당시 한국의 연간 수출액은 1억 7000만 달러에 불과했다.


우리는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으로 알고 있지만 공식 명칭에는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보다는 경제협력에 방점을 두고 있다. 왜일까? 일본의 배상 근거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조약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14조에서 일본은 연합국에 2차 세계대전에서 입은 물질적인 손해와 정신적인 손해 배상을 지불할 것을 명시했다.

그러나 한국전쟁과 미·소냉전 구도 하에서 자유진영 국가 대부분은 일본에 대한 배상 요구를 포기했다. 배상금을 받은 나라는 샌프란시스코조약 49개 조인국 중에서 필리핀, 월남, 버마, 인도네시아 등 4개국이다. 한국은 일본과 전쟁 당사국이 아니기 때문에 배상금을 요구할 자격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배 배상금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만약 식민지배 배상금이라고 한다면 일본보다 훨씬 많은 식민지를 가졌던 영국, 프랑스 등에 외교적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결국 미국의 막후 중재로 공식 명칭은 ‘한일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결정’이 되었다. 우리는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금 성격으로 생각하고 받고, 일본은 경제협력자금으로 공식화하면서 마무리 지었다.

한일기본조약 체결 과정에서 미국은 다분히 한국 편을 들었다. 한일협상 과정에서 우리만 일방적으로 대일(對日) 재산청구권을 요구한 것은 아니다. 일본 역시 대한(對韓) 재산청구권을 요구했다. 한국에 남겨놓은 일본인의 사유재산을 돌려달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은 대한청구권(對韓請求權)을 요구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미국은 ‘한국에 있는 일본 재산은 비록 개인사유재산이라 하더라도 일단 유엔군이 처리해서 그대로 한국 정부에 이양한 것이기 때문에 일본은 하등 그 재산권을 주장할 수 없다’고 일본에 명확히 밝힘으로써 일본의 대한청구권은 힘을 상실하게 되었다.

2007년 노무현 정부가 공개한 5권의 한일회담 문서집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당시 대학가에서는 굴욕외교라고 매도했다. 80년대 운동권세력은 김종필-오히라 회담에 마치 이면합의가 있었던 것처럼 선동하기도 했다. 2007년 노무현 정부는 1965년 한일회담 문서집을 일방적으로 공개했다. 외교관례를 벗어난 행동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당시 박정희정부가 매우 성공적으로 한일회담을 했고 실리 또한 챙겼음이 밝혀졌다.

우리가 일본에 요구했던 8개항의 대일청구권요강을 살펴보면 ①조선은행을 통하여 반출한 금(金) 249,633kg 및 은(銀) 67,541kg ②1945년 8월 9일 현재 일본 정부의 조선총독부채권 반환 청구 ③1945년 8월 9일 이후 한국으로부터 송금된 금품의 반환 청구 ④1945년 8월 9일 현재 한국에 본사 본점 또는 주된 사무소가 있던 법인의 재일재산의 반환 청구 ⑤한국법인 또는 한국 자연인의 일본국 또는 일본 국민에 대한 일본국채 공채 일본은행권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청구권의 반제청구 ⑥한국인의 일본 정부 또는 일본에 대한 개별적인 권리 행사에 대한 항목 ⑦전기 제 재산 청구권에서 발생한 제과실의 반환 청구 ⑧전기의 반환 및 결제의 개시/종료에 관한 항목 등이다.

이 중에서 특히 ⑤항에서 피징용 한국인 미수금과 전쟁에 의한 피징용자의 피해에 대한 보상을 구체화 했다. 징용자 수는 노무자 667,684명, 군인 및 군속 365,000명 총 1,032,684명이라고 산정했다. 개인청구권에 대해서는 5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에서 “우리(한국)는 나라로서 청구하며 개인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조치하겠다”고 언급했다. 따라서 개인청구권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마무리되었다고 일본이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다.
 



청구권자금 백서(白書)

박정희 정부는 1976년 한일기본협약에 따른 청구권 금액 사용 내역을 국민들에게 소상히 밝히는 ‘청구권자금백서’를 발간했다. 당시 정부는 청구권자금 사용의 기본 방향과 사용 기준을 정하는 ‘청구권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관리했다.

기준은 ①모름지기 모든 국민이 이익을 평등하게 받을 수 있어야 하고, ②국민소득이 증가되는 용도에 쓰여져야 하며, ③시설자재, 원자재 또는 기계류를 불문하고 한국의 주도적인 의사에서 결정되어야 하며, ④후손에 넘겨주어서 두고두고 기념될 수 있는 대단위사업(大單位事業)에 투자되어야 한다고 정하고 청구권자금에 의한 수혜를 대한민국 국민으로 특정화(特定化)시켰다.

1976년 경제기획원이 발간한 청구권자금백서에 따르면 포항종합제철의 설비에 들어간 자금은 전액이 外資(외자)였다. 포항제철 건설에는 청구권 자금의 23%인 총 1억 1948만 달러가 투입되었다. 경제기획원은 청구권자금백서에서 포항제철 건설에 대해 특별히 언급했다. ‘포항종합제철은 그야말로 우리 先烈(선열)들의 흘린 피와 땀의 代價(대가)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고 하면서 ‘포항종합제철 건설의 성공은 국민의 자신감을 북돋우어 국제경쟁력을 견지할 수 있도록 뒷받침한 심리적 효과가 더 컸다’고 지적하였다.

포항제철 건설 당시 고(故)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이 관계자들에게 ‘만약이라도 실패한다면 역사와 국민 앞에 씻을 수 없는 대죄를 짓는 것’이라면서 ‘실패할 경우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앞바다에 빠져 죽을 각오를 하라’고 한 일화는 유명하다.

1966년부터 10년에 걸쳐 무상자금과 차관 5억 달러를 제공받아 이 중 55.6%(2억 7799만 달러)를 광공업에, 18%(9000만 달러)를 SOC 확충에 활용했다. 대일청구자금을 종자돈 삼아 종합제철소, 고속도로, 항만, 전기에 투자해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일궈 냈다. 좌파세력은 위안부와 징용피해자에게 돌아갈 배상금을 박정희 정부가 가로챘다고 선동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런 논리는 계속되고 있다.

냉정히 따지고 보면 일제식민시대 피해는 위안부와 징용피해자만이 아니다. 우리 민족 전체가 피해자라면 피해자다, 따라서 대일청구권자금은 위안부나 징용피해자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온 국민이 그 대상이어야 한다. 포항제철과 고속도로 건설 등 경제개발로 전 국민이 경제적 혜택을 누렸기에 대일청구권자금은 값지게 사용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굳이 특정 피해당사자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한다면 우리 정부가 하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