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이지유신은 일본이 근대국가로서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덴노의 권위에 입각하여 군대와 관료기구를 정비하고, 중앙집권국가의 확립을 시도했다. ‘왕정복고(王政復古)’라고도 불리는 메이지유신은 덴노를 최고 지위로 올리고 쇼군을 제거하여 계층적인 질서를 단순화했다. 고대에만 일시적으로 사용되었을 뿐 그 후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덴노(天皇)’라는 호칭이 메이지유신 이후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바아, 메이지유신은 ‘덴노 호칭의 부활’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메이지유신은 흑선의 출현과 정국이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한 것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낀 싸스마 번, 조슈 번, 토사 번과 비젠 번 등을 중심으로 한 서남지방의 유력 번들의 하급무사의 근대화 추진을 위한 혁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메이지 신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무엇보다도 근대 국가의 전제조건인 정치적 통합, 즉 막번 체제를 해체하고 강고한 근대적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메이지 신정부가 채택한 방법은 덴노라는 상징을 전면으로 나타낸 ‘왕정복고’의 이름 아래 약 300개 정도의 자립성을 가진 번을 해체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위체제로 흡수 통합하는 것으로, 이는 일본 전국을 하나의 행정시스템으로 통일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덴노의 역할이 확대되었다. 메이지유신에서 덴노가 완수한 정치적 역할로 ‘권위 부여 장치’, ‘정통성 부여 장치’로서의 역할을 들 수 있다. 메이지유신에 따라 권력은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서남웅번을 중심으로 하는 메이지 신정부로 이행되었다. 메이지 신정부는 막부 권력의 정통성의 근원이었던 덴노를 받들어모셔 자신들의 정통성 획득에 노력하였다. ‘일군만민’의 정치체제에 있어서는 직접 교쿠(玉)를 받드는 정치집단이 강대한 정치적인 실권을 갖게 된다. 서남웅번의 유신관리들은 막번 체제를 부정하고, 왕정복고 쿠데타로 다이묘들에 의한 연합정권 구상을 무산시킴으로써 신정부는 실권을 장악했으나 능력은 있어도 신분이 낮았던 탓에 권위가 없었다. 그러나 자기들이 만든 신정부의 시책을 일본 전국에서 시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들의 권위를 높일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고대 이래 일본 최고의 권위자이자 신적인 권위를 함께 가진 덴노의 권위를 최대한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메이지 신정부는 체제변환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여, 문명개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덴노를 국민적 결집점으로 만드는 시책을 차근차근 시행해 나갔다. 일반국민에게는 인상이 약했던 덴노를 궁전에서 나오게 하고, 전국 각지를 순회시켜 봉건제도로부터 국민을 해방시킨 ‘해방자로서의 덴노상’ ‘국민의 큰 어버이로서의 덴노상’을 국민에게 주입함에 따라 국민의 애국심과 신정부에 대한 충성심을 불러일으켰다.
불안정한 사회의 국민은 대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권위를 요구한다. 오랜 기간 동안 무사 정권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덴노 정권 성립 당시는 국민의 대부분이 덴노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있었다. 때문에 정부는 먼저 덴노의 존재를 일반인민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당시 전국 각 지역에서는 우지가미(氏神)에게 제사를 드리는 신사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덴노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정부는 덴노가 민중이 믿고 있는 신사의 신 중 최고신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의 자손이고 각 지역 신사에 있는 신의 지위는 천자(天子)인 덴노가 승인한 것이며, 덴노는 ‘정일위이나리다이묘진’보다 지위가 높다고 가르쳤다. 이를 통해 메이지 정부는 덴노가 가진 ‘천자’라는 신적인 권위에 대한 경외심과 복종심을 국민에게 주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인격적인 존엄보다 훨씬 강렬하고 심각한 정치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메이지정부는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잘 정비된 관료제와 군대가 있어도 인민의 정신적인 지배가 없으면 권력을 안정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러므로 메이지정부는 덴노의 신격화에 노력하고 의무교육을 실시했다. 국민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원리로서 메이지헌법 반포 다음 해인 1890년 10월에 ‘교육에 관한 칙어’가 반포되었다. 교육칙어는 모든 학교교육의 기본원리로서만이 아니라 국민의 정신생활에 있어서의 최고 규칙이 되었다. 군인에 대해서는 1882년에 병사가 엄수해야 하는 도덕의 근본을 규정한 ‘군인칙어’를 반포했다. 군인칙어는 병사의 덴노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고, 상관에 대해서도 덴노에 대한 것과 같은 복종을 명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육칙어와 군인칙어를 통해 메이지정부는 모든 국가행사를 덴노와 연결하고 국민을 덴노의 신민(臣民)으로 교육했다. 여기에서 덴노를 큰 어버이로 하고 국민을 적자로 하는 가족국가론, 덴노 가문의 우지가미를 최고신으로 체계화하는 동족공동체론이 등장한다. 그 이외에 덴노의 탄생일과 덴노가 관여하는 행사의 날을 축제일로 제정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근대 덴노제 국가에서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한 것이 아니라, 절대가치인 덴노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위치에 따라 인간의 서열이 결정되었다. 이 서열에서 최고로 영예 있는 신민의 지위는 대신(大臣)과 대장(大將)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