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요하문명 유적 분포도 >
일명 요하문명이라 불리우는 이 유적들의 첫 발견은
1919년 스웨덴의 지질학자인 안데르손이
처음 발견함.
이후 1940년대 말 중국의 학자들도
이곳을 주목하여 발굴을 하다가
50년대 말에 들어서 중국의 국내사정을 이유로
발굴이 미뤄지게 되었음.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70년대 중엽에 들어서
다시 이 유적들의 중요성이 부각되며
발굴이 재개 되었는데
이 유적들을 연대가 놀랍기 그지 없었음.

< 흥륭와 유적의 집터 >
소하서(小河西)유적은 기원전 7000년의 작은 부락 유적으로
생각되었다가 최근에 들어서 그곳이 흥륭와 유적과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5500년경의 유적임을 확인 됨.
그래서 동북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은
흥륭와(興隆洼) 유적으로 생각되어지고 있음
그 집터들을 보면 백
몇십 채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걸 볼 수 있는데
그 당시의 인구가 만만치 않게
많았음을 알려 줌.

< 순장 풍습 >
그리고 이 흥륭와 유적의 특징중 하나는
바로 무덤에서 찾아 볼 수 있었는데
사람의 무덤에 당시의 돼지를 같이 묻어
순장했다는 것과
잘 만든 옥기(玉器)들을 함께 묻었다는 것임.

< 흥륭와에서 출토된 옥결과 옥기들 >
이 옥기와 옥으로 만든 귀걸이인
옥결들은 이 지역 전반에 걸쳐서 발견되는데
이 옥결의 존재가 요하지역에서
터전을 잡던 사람들이 어디로
이동했는지도 확인 해줌.

< 사해유적의 집터 >
비슷한 시기의 사해유적에서도
흥륭와에서 발견된 옥기와 옥결들이
다수 출토었고
두 지역의 옥기와 옥결의
구성성분을 확인한 결과
서로 같은 곳에서 채굴한 옥을
사용했던 것으로 확인 되었음.
그리고 이 사해유적은
안 그래도 흥륭와와 사해에서 발굴된
옥기들을 보며 충격을 받았는데
더한 충격을 주는 유적이 발굴되었음

< 용 형상물 >
바로 7000년 전 쯤에 만들어 진 것으로 생각되는
용의 형상물 때문임
이 형상물 때문에 중국 사학계는
이곳이 중화의 원류가 확실하다고
흥분도 했으나
황하에 존재하던
앙소문화와 그 후대인 용산문화가
중국의 시조인 화하(華夏)족의 원류라고
확정하고 있던 터라
일원일체(一原一體)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던
중국의 주류 사학들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음.
당시에 도대체 설명이 안되었기 때문.
분명 일원일체설에 따르면
황하에 터를 잡은 황제 헌원이 북쪽의 치우와
남쪽의 염제 신농을 때려잡고
천하를 통일하여 화하족을 이루었는데
그 보다 더 오래된 시기에 용의 형상물이
요하지역의 사해유적에서 발견되어 이곳이
가장 오래된 중화의 원류라고 주장해버리면
도대체 황제 헌원은 어디에 있었던
인물이 되는가? 라는 거대한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거임.
지금은 급히 논리를 바꿔 황제가 요하에서 발원하여
황하로 이동했다는 주장을 하는데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임.
이것은 한 가지 종류의 유물만 보아도 논파가 가능함.

< 같은 시기의 옥결들 >
그것은 바로 옥결!
흥륭와와 사해유적에서 출토된
옥결들이
우리나라의 강원도 고성 문암리 유적에서도
출토되었음.
이를 바탕으로 하면
이 당시에 고성의 문암리 유적까지
같은 문화권의 사람들이 살았다는 근거가 될수있음.
만약 황제가 진짜 요하 사람이었다면
황하까지 저 옥결들이 발견되었어야
말의 앞뒤가 맞게 됨.

< 흥륭와와 사해유적의 옥의 원산지인 수암의 위치 >
그런데 흥륭와 유적과 사해 유적
그리고 고성의 문암리 유적은 옥기만
공유 했던 것이 아님.

< 사해 유적 빗살무늬 토기 >
이 지역에 널리 퍼져있었던 토기는
바로 '빗살무늬 토기'였음.
이 유적보다 약 1000년정도 이후의
유물이지만 황하지역의 토기를 살펴보면
전혀 다른 유형의 토기를 사용해왔음.

< 앙소문화 토기 >
바로 위의 토기처럼
앙소문화에서 용산문화로 이어지는 토기의 특징은
바로 채문토기 즉 '칠무늬 토기' 입니다
또 빗살무늬 토기의 분포도 또한
황하와는 요하가 서로 다른 문화권인 것을 알려줌

< 시베리아와 주로 북방에 분포되었던 빗살무늬토기 >
빗살무늬 토기는 바로
북방에 널리퍼진 토기였고
요하를 거쳐 한반도에 들어왔음
즉 당시 요하 문화권의 사람들은
한반도로 이주를 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겠음
그리고 옥기와 토기 뿐만이 아님

< 적봉시의 삼좌점 산성 >
흥륭와와 사해유적 시대를 거쳐서
홍산문화대에 이르면
요하의 사람들은 이렇게
산성을 쌓고 제단을 만들었음.
이 성을 쌓는 방법 자체가 중원이 아닌 북방에서 유래된 것으로
독특한 특징이 하나 존재하는데

< 삼좌점 산성의 치 >
바로 치(雉)
중국의 황하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축성 방식임.
그리고 이 당시보다 후대인
황하지역에서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 주를 이루었지 이렇게
돌로 성벽을 쌓진 않았음.
이 치는 시간이 흘러 고구려 성들에게서
그 전통이 이어져 그들의 특징이 되었음.
그리고
이 요하문명의 꽃이라고 불리는
홍산문화 우하량 유적에서
중국 사학계를 또 충격에 빠트리는
유물이 1980년대에 발견됨

< 홍산의 여신상 >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여신상이 발견되었음.
5500년전의 여신상!
그 눈에는 옥구슬이 박혀있었고
표정은 단호 했음.
이것은 예전에는 자연에 있던 것들을
숭배하던 신앙을 지나
조상을 숭배하는
신앙의 단계로 넘어왔음을 의미하는것임.

< 우하량의 여신묘 터 >
이 우하량의 여신묘에서는
여신상뿐 아니라
여러 유물들이 또 발견 되었는데

< 옥으로 만든 웅룡(熊龍)>

< 곰발 토기와 새의 발톱 토기 >
곰을 표현한 옥과
흙으로 만든 곰 발 그리고 곰의 턱뼈까지
발견되었음.
이 여신묘에서는 여신만을 숭배 한 것이 아니라
곰에 대한 숭배도 나타남.
이런 신앙의 결 또한
중국의 황하와는 전혀 다른 유형이었음.
이들이 만약 중국 사학들의 주장대로
황제 헌원의 무리이고
요하를 떠나
황하로 갔다고 한다면
반드시 이런 문화를 사용한 흔적이
황하에도 남았어야하는데 그런건 존재하지않음.

< 여신상 복원품 >
중국 사학계가 이곳을 황제의 발원지나
다른 무엇인가로 억지로 포장하려는 이유는
오직 중국만이 동북아시아 문명의 발원이어야 한다는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입각했다고 볼 수 있음.
사실 중국사서인 사기(史記)에서도 저 지역은
옛 조상들의 땅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옛 조선이 있던 땅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그러고 보니 곰에 대한 신앙이 있는게
고조선의 환웅과 웅녀의 전설과 연관성을 찾을수있음
하필 또 그 지역이 고조선과 관계깊은 요하유역임
그래서 중국 사학계는
이 요하에서의 발견과 장강이남
월족의 양주고성의 발견으로
더이상 일원일체의 중국을 주장하기에
상당히 불리해졌고
이젠 오히려 다원일체설이 주류이고
장강이남과 요하의 사람들 모두
본인들의 조상이라고 기존 학설을 바꿈

< 문명 분포도 >
하지만 웃기는것은
장강이남의 문명은 월족 즉 오스트로네시아계통의 사람들이
건설했고 바다를 통해 여기저기 오고 가다가
그들의 근거지인 양주고성을 버렸다는게 증명이 되었고
요하의 문명 또한 유골들을 조사한 결과
동북방의 DNA가 2/3 이상이라 사실상
중국 황하 이북지역 사람들과도 상이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밝혀짐
더이상 요하와 장강을
다른 중국의 조상 누군가로 포장하기
힘들어 졌다거임
그래서 그들은
흥륭와 유적이 있는 마을을
그저 중화제일촌(中華第一村)이라 비석을 세우며
포장하고 있을뿐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