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사정권 이야기 나올 때마다 반복되는 것은 1980년 당시의 김대중 지지자 시점의 재소환과, 과거 60년대 남로당 민족주의의 박정희에 의한 봉합에 억울해하던 계층인 초고령 노인 운동권 시점의 이야기다. 여기서, 이 틀을 고스란히 놔두고 전두환 찬양하는 김용삼 기자의 의중도 모르겠고, 강용석의 의중도 모르겠다. 그렇게 하면, 초고령 노인 운동권 기준으로는 상생이다. 그러나, 국민의 힘은 ‘노인정당’ 고정되고, 일베성향 젊은 유권자들은 무한대의 가스라이팅을 당한다.
1971년 박정희-김대중 대선때부터 김대중 후원회장으로 유명한 민중신학 두목 목사는 ‘반공=파시즘’이란 말을 꺼내고, 1930년대 독일을 기준으로 히틀러 사회와 박정희-전두환과 연결된 일반국민을 연결시켰다. 김용삼 기자는 전두환을 빤다고 자동으로 그 유권자들의 모습과 연결이 아니다. 90년대 이후로 미시적 생활사 차원에서 김영삼 김대중 지지자들이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독일 교회와, 미국 민주당 교회를 업고, 무제한적 가스라이팅과 정신탈곡기를 즐겼다.
냉정한 말로 유불선 신앙이 있는 곳에 파시즘이라고 걸면 무조건 걸린다. 그런데, 그 당시에 국민소득 천달러~4천달러 시절의 지성 사회에서 파시즘과 파시즘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었을까? 6.25전쟁 트라우마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과연 전쟁 트라우마에서 기인한 反共은 파시즘과 동일시될 수 있을까?
작금의 한국 지성계는 1930년대 파시즘 사회의 강제 재소환 분위기다. 레이달리오의 ‘금융위기 탬플릿’ 뿐만 아니라, 미국 민주당 계열의 경제학자들이 쏟아내는 경제사책들은 후진국 권위주의와는 차원이 다른 파시즘의 고유한 특성을 알게 됐다.
1910-1920년대 부채버블에 의한 거대한 자본집적이 나타났다. 그로 인해서 서방자유진영의 고유한 룰을 잊어버리고, 특히 독일 전쟁 배상금에 빠진 독일의 경제침체를 빼준다면 영혼까지 준다는 상태에 빠졌다.
오히려 파시즘은 후진국 권위주의인 군사정권 보다는 지금이다. 법치주의를 둘러싼 완전하고 완벽한 해설서가 있다. 하나도 사용안된다. 경제학 이론을 둘러싼 완전한 해설서가 있다. 하나도 사용안된다.
민주당은 1인 통치권자 반대만 하고, 일당체제 독재 반대를 신앙적으로 안한다. 반면에 자유민주는 1인이든 1정당이든, 1파벌이든, 1종족이든 모든 형태의 서방교회 기준으로 교회의 특정층 독점을 부정하는 논리의 국가조직형태다.
문재앙은 남로당-북로당 연합의 원불교 백낙청 촛불 마왕의 일당독재를 구현하려 종전선언을 하려 했다. 호주총리는 그 의도를 완벽하게 알고, 사실상 문재앙이 ‘개벽신앙 레닌’(자유헌정질서 파괴하고 나라를 김정은에 팔고 싶다)하고 싶다는 욕망을 좌절시키고, 훈장질했다.
이 상황 이후에 1980년 민주화 평가는 당연히 역사 평가가 달라진다.
김용삼기자는 <역사는 계속 다시 쓰여진다>는 말을 모른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기자의 과잉 오지랖도 ‘지랄 하고 자빠졌네’로 보는게 진짜 민주사회다.
생각해보자. 1930년대 히틀러 사회에 저항하던 독일인들은 히틀러 파시즘 사회에서 관직을 게르만족이 독점하고 싶다 이기야!! 하는 것과 싸우면서, 스탈린 볼셰비즘도 결국 줄 잘 서서 관직 독점하고 싶다 이기야! 하는 것임을 알았다.
문재앙 종전선언 이후로는 1980년 역사평가는 당연히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제도권은 김용삼기자나 조갑제기자 등 민주당의 프레임을 기슬를 절대 못내는 ‘사쿠라정신’으로 똘똘 뭉쳐진 분들만 남고, 제도권에 우파학자로 저술을 할 기회자체를 싹을 밟아 버렸다. 지금 까놓고 말해서, 좌파는 계속 다시쓰는 한국현대사를 논해도, 우파는 조갑제기자나 김용삼 기자 같은 강철 사쿠라 때문에, 민주당 역사프레임의 허구성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반론의 정당한 기회가 없다.
상생, 상생 하는게 굉장히 위험하다. 사실은 서양법적인 자유주의를 훼손하여 중공식 지배질서를 심는 의미로 연결된다. 정용검 아나운서 같은 인문학 젬병이 말하는 상생과, 호남개벽파 먹물이 알고 하는 상생은 다르다. 모든 형태의 국가조직에서 사용되는 ‘상생’이란 말도 헌법 위반이다.
냉정한 말로, 김대중좌파가 군사정권에서 파시즘으로 걸었던 모든 것은 ‘영남 개벽파’의 영남식 개벽신앙일 것이다. 그러면, 호남식 개벽신앙의 작동의 모든 흔적도 자기 모순이 된다. 이 역시도 공정한 학문의 기회와 종교의 자유로, 자유롭게 말할 기회를 요구하고 아니면 기존의 신화는 허구라는 이야기로 수렴해야 한다.
한국사회는 지식산업센터가 과잉공급으로 공실이 투성이인데도, 중공처럼 빈집이 될 건물을 짓는다. 이 역시도 마찬가지로, 자유민주사회의 개방경제를 할 도덕성이 없는 탐욕의 형태다. 이런 사회를 이룬 이들이 민주화의 주체라고 논하면서, 군사정권 저개발 권위주의를 파시즘으로 논할 수 없다.
영화 서울의 봄은 김대중 후원회장 민중신학 두목 목사의 논지를 중심으로, 민주당 지지층=유대인이고 군사정권은 히틀러 파시즘이라는 공식을 세우려는 의도에 있다. 그러나, 형수와 통화로 유명한 이재명의 경우에, 형수는 권력이 그렇게나 좋은거냐고 할 때, 이재명은 보지를 찢는다는 말로 응수를 했다. 결국, 보지를 찢는 유대인은 가능하냐의 문제와 연결된다.
동시에, 이재명 후원회장인 원불교 백낙청의 남북연합체 수립으로 이어지는 계기도 파시즘이 아닐 수 없다. 정확한 의미의 파시즘이다. 즉, [근대의 이중과제 및 한반도식 나라만들기]는 남로당 종족의 파시즘이 맞다. 국제사회에서 번역해도 퍼질 것이다. 백낙청은 레닌 볼셰비키 혁명 유형을 원불교 교리로 하려 했다. 조선일보 송의달기자는 정신나가서 이런 내란죄 현장을 알면서, 북한인권만 위한다면 덮는다고 했는데, 조선일보 송의달기자도 파시즘이 제대로 걸렸다.
김대중 세력은 유교자본주의를 파시즘의 근거로 설정했다. 상생, 상생 거리는 다양한 형태의 호남개뻑따구 신앙도 당연히 파시즘이다. 조갑제기자와 김용삼 기자같은 강철 사쿠라 정신은 전라도의 개뻑따구 신앙과 함께 군사정권의 개뻑다구 복원하여, 중공식 지배체제를 이루는 데 슬그머니 젊은 세대 영혼 탈곡기는 묻어가자고 한다. 이것도 파시즘 유형의 당연한 현실이다.
또, 파시즘 독일 사회에서 아무도 계명을 안 지킨다. 칼 바르트, 본회퍼 및 몇 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슬픈 역사다. 버블이 곧 터진다는 데 김기현 대표는 장로라는 데, 자기 약속을 자기가 안지킨다. 이것도 파시즘의 전형적인 형태다.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재평가하면 다 달라진다.
당시에는 지도부의 판단이 전부를 다 동의했다고 간주하는 일이 있었다. 즉, 문재앙의 생각이 김정은 짝짜꿍이면, 미디어에 속아서 최순실 프레임을 힘겨워해서 박근혜 탄핵에 동의한 모두를 같다고 보았다. 본인은 이렇게 과거에 개뻑다구 신앙 기준으로 미숙한 판단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 과거를 돌아가는 순간, 역시 군사정권 기득권자 극소수와 민주당 지배체제라는 개뻑따구 신앙 노인들의 파시즘 연합만이 배부르다.
도대체, 왜 우리사회는 조선왕조 붕당 공식으로 과거를 재소환하는 것에서, 현재를 중심으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우파의 시도는 없을까?
보지를 찢는 유대인은 가능한가?
자본집적 없는 제3세계 권위주의가 파시즘인가? 파시즘은 모든 참고서, 모든 인력, 모든 지성 도구 놔두고 이성의 몰락이다. 오히려, 지금이다.
전두환을 낙인 찍어야 한다거나, 미화해야 한다거나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런 프레임에 깔린 호남개벽파의 남로당 씨족 붕당 신화의 허구성 비판을 왜 안하느냐가 중요하다. 영남과 호남의 개벽파 종족끼리 짜고치는 일당체(부정선거, 불법탄핵)에 알아서 기는 흐름이면, 이것도 역시 파시즘 사회의 모습이다.
처음부터 그들의 의중에는 6.25 전쟁 트라우마에 있는 국민들의 고통을 최대치로 극대화하려는 의도에 있는데,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면 동의 못받을 까봐, 하지도 않을 보편민주나 하지도 않을 기독교외형을 빌린 것이다. <사기>다. 사기는 부당이득죄 대상이다. 민주화 신화를 사용한 모든 주체가 실제로는 민주주의와 기독교가 아니라, 개벽신앙과 종족주의를 구현했다. 이것도 파시즘이다.
파시스트 백낙청, 파시스트 이재명, 원불교 파시즘. 이런 말이 우파진영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회가 되는게, 전두환을 옹호하는 것보다 최우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