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대 에도시대부터 일본은 상수도 시설을 건설하였다. 

특히 인구 100만이 넘었던 수도 도쿄(에도)에 식수를 공급하려면 우물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때문에 에도막부 주도하에 상수도가 건설되었다.

상수원은 강상류 산골짜기의 맑은 물이었다. 

이 맑은 물을 노천수로를 따라 도쿄 가까이 오게 한 뒤에 땅속에 묻힌 석재수도관이나 나무수도관을 통해 상점이나 가정집으로 식수를 공급하였다. 


 
<맑은물이 흐르는 '상수관'과 더러운 물이 흐르는 '하수관'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어서 깨끗한 물을 쓸수 있었다.>



 



노천수로 곳곳에는 '상수원보호구역' 및 '초소'를 설치하여 인근의 주민이 방뇨하거나 생활폐수를 유입시키지 않도록 엄격히 감시하였다. 

이러한 상수도 시설의 전체 연장길이가 간선 부분만해도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렀고, 지선 부분을 포함하면 에도시대 초기(1600년대 초반)에 이미 세계최고 수준의 상수도 시설을 갖추었다고 한다.



<에도시대 상수도 시설 유적>



                                                                        <에도시대 상수도 시설 유적>


 
<에도시대 상수도 구조>




다만 수도관이 대부분 목재로 건설되어서 유지보수비용이 많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에도막부가 워낙 재정이 튼튼하여 유지보수하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에도시대 목재 수도관>

 


상수도는 국가에서 운영하였기때문에 시민들에게 수도요금을 부과하였다. 수도요금은 도로에 면한 건물의 폭에 비례하여 결정되었으며, 평균적으로 건물한채 당 1년에 400엔(한국돈 4000원) 정도로 아주 저렴하였다. 당시 수도계량기는 없었기 때문에 물을 많이 쓰든 적게 쓰든 평균적으로 1년에 4000원의 요금만 부과했던 것이다. 

이렇게 상수도 시설이 발달하자, 공중목욕탕도 성행하였다.


 




 



 
<공중목욕탕의 물을 데우는 방법>




공중목욕탕은 아침 8시에 오픈하여, 저녁 8시에 문을 닫았다고 한다. 요금을 받고 탈의실까지 구비해놓았다. 요금은 100엔(1000원) ~ 200엔(2000원) 정도로 가격이 저렴하여 평민들이 이용하기에 좋았다. 

에도시대 목욕탕에는 증기를 이용한 사우나도 있었다고 한다. 


 




공중목욕탕의 주요고객은 평민들이었다. 귀족들은 자신의 저택에 개인욕실과 사우나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에도시대 노동자들은 고된 노동이 끝나고 공중목욕탕과 사우나를 이용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마무리였다.  

 




남탕의 경우 여탕과 달리 2층 형태의 구조였다. 그 이유는 무사계급(사무라이)의 경우는 항상 칼을 차고 다녔기 때문에 2층은 사무라이들의 칼을 진열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즉 2층은 사무라이 전용공간이었다. 사무라이들은 2층에서 바둑을 두고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일본의 공중목욕탕 역사는 중세시대 가마쿠라 막부(1185년부터 1333년)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이미 교토 등 대도시에는 요금을 받고 탈의실이 구비되어 있는 공중목욕탕이 영업했다고 한다. 




게다가 에도시대때 평민들의 참배여행이 늘어나면서 전국의 역참마을에는 온천여관도 발달하게 된다. 평민들이 자유롭게 여행을 다녔다는 것은 그만큼 에도시대때 일본의 경제적 수준이 높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일본은 1830년에만 전국적으로 486만명이 참배여행을 즐겼다. 일본인 6명중 1명이 최장 500~600km의 장거리 여행을 즐긴것이다. 이러한 여행열풍으로 일본 전국의 숙박업, 요식업은 호황을 누리게 된다. 당시 전세계에서 평민들이 이렇게 안전하고 자유롭게 전국을 여행할 수 있었던 나라는 일본이 유일했다. 




               
                                             <에도시대 역참마을 풍경: 숙박업과 요식업이 번성하였다.>




일본은 17세기 에도시대때 이미 세계최고 수준의 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상업이 고도로 발달하여 선진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것이 원동력이었다. 아울러 일본은 지배층들이 굉장히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동시대 조선은 한양같은 대도시에도 상수도 시설이 없어서 오물 섞인 우물물을 마셔서 한양도성의 물맛이 너무 짜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로인해 조선은 콜레라, 장티푸스 같은 수인성 전염병에 걸려서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실학자 박제가는 다음과 같이 조선의 수질오염과 하수처리 문제를 지적하였다. 


"한양에는 수레가 없어서 오물을 쉽게 퍼가지 못하고, 사람들은 냇가나 거리에 분뇨를 함부로 버리고 있다. 도성의 물 맛이 짠 것은 바로 함부로 내다 버리는 똥오줌 때문이다. 다리 밑을 보면 인분이 덕지덕지 달라붙어서 큰 장마가 아니면 씻기지 않는다."


조선의 수도 한양에는 상하수도 시설이 없어서 상수(깨끗한물)와 하수(더러운물)가 섞여버리니 저런일이 발생한 것이다.  


일본이 서양문물을 일찍 받아들여서 조선보다 발전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전부터 국가시스템과 사회발전 수준에서 일본이 조선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고 봐야 한다. 자체적으로 상업이 고도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일본은 자체적으로 사회가 발전되어 있었기에 사람들이 깨어있어서 이후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자주적으로 국가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불가능했다. 아프리카가 아시아보다 서양과 더 먼저 교류했지만 발전하지 못했듯이 조선은 지배층들이 성리학 사상에만 빠져서 전국민의 절반이 노예(노비)였을 정도로 사회가 낙후되어 있었기에 설사 서양과 일찍 교류했다고 해도 발전할 수 없는 나라였다. 조선은 지배층들이 너무 무능했다. 




* 일제시대 조선땅에 공중목욕탕이 들어서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시대가 되자 일본에 의해 조선땅에도 공중목욕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사람들은 1년에 목욕을 한번 할까 말까였기 때문에 몸에서 악취가 심했기 때문이다. 구한말 조선인들의 피부가 까맣게 보이는 것은 목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취뿐만 아니라 몸안에 이와 빈대도 가득했다. 


 
<조선시대 백성들: 평민과 노비>


일본인들은 조선사람들을 보고 ‘오,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차마 맡을 수도 없고, 도저히 견딜 수도 없는 냄새, 끔찍하고 지독한 냄새, 지옥 같은 냄새! 라고 표현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들에게 적어도 이틀에 한번은 목욕을 할것을 권장하였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공중목욕탕을 지으려 했을 때 유교문화에 빠져있었던 한국인들은 남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이 망측하다며 반발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전국 곳곳에 공중목욕탕을 지어서 조선인들을 개화시켰다.

아래 사진들의 목욕탕 굴뚝들은 모두 일제시대때 세워진 것이다. 화력좋은 석탄으로 목욕탕 물을 계속 뜨겁게 데웠다고 한다. 목욕탕 물을 계속 뜨겁게 데워서 열탕을 만든 것은 조선사람들 몸에 붙어있는 기생충들(이, 빈대 등)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현해탄(대한해협)을 오가는 부관 연락선의 배안에도 목욕탕을 만들어 놓았다.  

 


한국의 공중목욕탕 문화는 일본이 만들어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