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지조례 오늘 본회의 거쳐 내년 시행
내년 4월부터 일본 도쿄도(東京都)에서는 혐한(嫌韓) 시위를 비롯해 특정 민족·인종에 대해 차별을 조장하는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가 전면 금지된다.
도쿄 도의회 총무위원회는 4일 혐한 시위를 포함해 헤이트 스피치 관련 집회로 판단되는 경우 도립(都立)공원 등의 공공시설 이용을 제한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이 조례는 5일 본회의를 거쳐 내년부터 전면 시행될 예정이다. 일본 오사카(大阪)시와 가와사키(川崎)시가 헤이트 스피치를 억제하기 위한 조례를 만든 적은 있지만, 도쿄도와 같은 광역자치단체가 이를 사전에 막기 위한 조례를 만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도쿄도의 움직임은 일본의 다른 도도부현(都道府縣)에 파급 효과가 크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조례엔 헤이트 스피치 발언이나 시위 등을 담은 동영상이 인터넷에 게재된 경우 이를 삭제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조항도 포함돼 있다.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기관에서 심사 후, 헤이트 스피치 집회를 주최하는 단체와 개인을 공표하는 것도 가능하다.
도쿄도에서 헤이트 스피치 금지 조례를 만들어야 할 정도로 혐한론은 일본에서 한동안 상승 곡선을 그려왔다. 2012년 12월 자민당 재집권 후 우경화 현상이 강해지고, 한·일 양국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로 대립하면서 일본에서는 혐한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일본 정부 자료에 따르면 2012년부터 3년 반 동안 '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이 주로 주도해서 벌어진 혐한 시위는 총 1152건. 이 집회에서는 '조선인 죽여라'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서점에는 '대혐한시대(大嫌韓時代)', '나쁜 한국(惡韓論·악한론)' 같은 책들이 깔리기 시작했다. 35년간 식민지배로 피해를 본 국가를 향해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혐한론이 극단으로 치닫자 일본의 지식인들과 평범한 시민들을 중심으로 자성(自省)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재일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가와사키에서는 165개의 일본 단체들이 혐한 시위를 막기 위해 뭉쳤다. 이들은 지난해 7월 '함께 행복하게'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혐한 시위를 무산시켰다. 일본 남성들이 '오토코구미(남자 조직)'를 만들어 혐한 시위대에 물리적으로 맞서기도 했다. 이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도 만들어졌다.
일본 정부는 헤이트 스피치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후에야 대책 마련에 나섰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2016년 1월 한국 국회의원들을 만났을 때 '헤이트 스피치는 일본의 수치'라고 했다. 같은 해 일본 국회는 처벌 조항이 없는 헤이트 스피치 금지법을 제정했다. 지난해 12월 일본 내각부(內閣府)는 인권 관련 정례 여론조사에서 처음으로 헤이트 스피치 관련 조항을 포함시켰다. 3000명을 대상으로 한 이 조사에서 헤이트 스피치에 대해 '불쾌하고 용서할 수 없다'는 응답이 45%였다. 그러나 헤이트 스피치를 표현의 자유라고 응답한 이들도 17%였다. '넷우익'으로 불리는 이들은 여전히 소셜 미디어를 통해 혐한론을 퍼뜨리고 있다.
2020년 올림픽을 개최하는 도쿄도는 헤이트 스피치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올림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국제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해 조례 제정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 최근 일손 부족으로 외국인들의 도쿄 내 취업이 급증하고 있는 상황도 염두에 뒀다. 이번 조례안에는 성(性) 소수자 등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막기 위한 조치도 담겨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