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苦)의 뿌리는 에고(ego)의 생존욕에 있다. 그 생존욕은 ‘나’와 ‘나 아닌 것’으로 갈라지고, 생존에 ‘유리하다’와 ‘불리하다’로 갈라지고, ‘기분좋다’와 ‘기분 나쁘다’로 갈라진다. 이를 바탕으로 온갖 이분(二分)의 분별과 감정이 잇따라 일어나 생각생각으로 이어진다.
중생의 마음은 그 ‘이분’의 양쪽을 끊임없이 오락가락하므로 불안정하다. 안정되지 않은 마음 상태가 곧 ‘고’이다. 따라서 에고의 생존욕이 있는 한 ‘고’일 수밖에 없다.
결국 중생의 삶이란 에고의 만족을 위한, 에고에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한 갈등에 지나지 않고, 에고의 올가미에 걸려든 그 삶은 탐욕과 불안에 휘몰릴 수밖에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에고의 죽음, 즉 ‘자아라는 생각’, ‘자아에 대한 집착’의 소멸이다. 그것은 벼락이 내리쳐 안팎과 분별과 대립이 붕괴해 버린 폐허의 빈터이다. 그 빈 터에 지혜와 자비의 싹이 돋아난다.
<금강경>의 산스크리트 제목은 ‘vajracchedika-prajnaparamita-sutra’이다. vajra는 벼락, 번개, 금강석이라는 뜻이고, cchedika는 자르는 것, 부스는 것이라는 뜻이다. 즉, 일체의 고착 관념을 벼락처럼 부순다. 금강석처럼 자른다는 의미다. 구마라집은 cchedika를 금강(金剛)이라 번역했고, 현장(玄奘)은 능단금강(能斷金剛)이라 번역했다. prajnaparamita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 음사하는데 지혜의 완성이라는 뜻이고, sutra는 경(經)이라는 뜻이다.
원래 vajra는 천둥신 인드라(indra)의 무기이다. 또 금강저(金剛杵)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는 부처의 지혜를 상징한다.
<금강경>은 수보리가 묻고 세존이 답하거나 세존이 수보리에게 반문하여 대답을 유도하는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수보리의 첫 질문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려는 마음을 낸 선남자 선여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이다.
이 질문에 대한 세존의 답은 “자아라는 생각, 인간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목숨이라는 생각을 갖지 말라”로 시작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생각이나 관념이 집착으로 이어지고, 견해로 굳어져, 그것으로 말미암아 아만과 탐욕과 증오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아라는 생각’이 중생의 첫 번째 에고이다. “만약 아라한(阿羅漢)이 ‘나는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면, 이것도 자아와 인간과 중생과 목숨에 집착하는 생각이 된다.” 생각에 얽매여도 안 되지만 빛깔, 소리, 향기, 맛, 감촉, 의식, 내용에 얽매여 마음을 내서도 안 되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마음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세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언어 저편의, 언어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언어가 없어지고 생각이 끊어진 상태이고, 그러므로 인식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언어 자체가 이원성(二元性)이기 때문에 언어로써는 일체의 대립을 떠난 비이원성(非二元性)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그 어떤 가르침도 설할 수 없으므로 말을 하자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고 복덕(福德)이고 불법(佛法)이고 아라한이고 장엄(莊嚴)이고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고, 설법(說法)이고 선법(善法)이니,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요컨대 생각과 차별이 곧 얽매임이고 집착이라는 것이다. 생각이 일어나니 온갖 경계와 틀, 개념과 분별과 차별이 생기고, 중생은 그것들을 고정된 실체로 여겨 집착하지만, 그것들은 생각이 일으킨 허구에 불과하다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모든 생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려는 마음을 내야 한다.”고 했다.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한다는 생각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구하려는 생각이 곧 분별이므로 분별로써 구하려하면 잡히는 건 결국 분별의 내용일 뿐이다. 그러므로 분별의 축적으로는 결코 무분별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분별과 집착이 폭발해 버린, 이원성이 함몰해 버린 상태에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조차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관념에 대한 집착을 부정하고 또 부정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도 부정한다. 왜냐하면 쇠사슬에 묶이나 금사슬에 묶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생이 일으킨 차별은 허구여서 집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여래(如來)가 일으킨 차별도 뗏목에 불과하므로 거기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왜냐하면 여래는 무분별의 경지에서 가르침을 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언어를 빌려서 차별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같은 말이지만 중생의 말은 ‘분별의 분별’이고, 여래의 말은 ‘무분별의 분별’이다. 즉, 여래는 무분별의 바다에서 분별의 파도를 말하지만, 중생은 파도에서 파도를 말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금강경>에서 반복되는 “여래가 말한 X는 X가 아니라고 여래가 설했다. 그래서 여래가 X라고 말한다.”에서 첫 번째 X와 세 번째 X는 무분별의 상태에서 가르침을 펴기 위해 여래가 일으킨 차별이고, 두 번째 X는 중생이 번뇌와 망상으로 일으킨 차별이다.
요컨대 <금강경>의 핵심은 반야바라밀, 즉 지혜의 완성이다. 지혜의 완성이란 생각이나 관념이 타파되고, 얽매임이 없고, 차별을 두지 않고, 집착과 견해가 끊어진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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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수보리야, 여래는 이 중생들이 한량없는 복덕을 받을 줄 다 알고 다 본다. 왜 그런가? 이 중생들에게는 자아라는 생각, 인간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목숨이라는 생각이 없고, 진리라는 생각도 없고 진리가 아니라는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중생들이 마음에 생각을 갖게 되면, 자아와 인간과 중생과 목숨에 집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진리라는 생각을 갖더라도 자아와 인간과 중생과 목숨에 집착하는 것이 되고, 진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더라도 자아와 인간과 중생과 목숨에 집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진리가 아닌 것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이런 뜻에서 여래가 항상 ‘너희들 비구는 내 설법이 뗏목 같은 줄 아는 자들이니, 진리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진리가 아닌 것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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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시 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하더라도, 보살의 마음을 낸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에서 네 구절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우고 남에게 가르쳐준다면, 그 복이 저 복보다 훨씬 낫다.
어떻게 남에게 가르쳐 주느냐? 생각을 갖지 말고, 한결같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유위법(有爲法)은
꿈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기 때문이니
이렇게 관찰해야 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붓다께서 이 경을 다 설하시자 장로 수보리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모든 세상의 천신 인간 아수라가 붓다의 말씀을 듣고 모두 매우 기뻐하면서 믿고 받아들이고 받들어 행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