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몇몇 학자들은 북한 정치체제의 구성에서 친족관계 규범과 용어의 위상을 탐구해왔다. 암스트롱은 북한의 초기 혁명정치가 “유교적 가족주의와 스탈린주의를 결합”시킨 것인데, 그중 김일성을 향한 집단적 효성이 가장 특이한 요소라고 지적했다.
2. 인류학자 이문옹은 북한의 정치질서를 “가족국가”로 정의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민중과 최고지도자의 관계는 꼭 친족 간의 관계와 같아서 현대 공산주의 체제의 북한을 한 가족국가라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그는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고 그가 바로 국사에 대한 모든 지혜의 원천이며, 국가의 운명은 꼭 한 가정의 운명과 닮았다.”
3. 실제로 오늘날 북한의 매체는 “어버이 장군님을 높이 모신 우리 인민은 모두가 한 식솔이고 내 나라는 어디 가나 친혈육, 화목한 대가정입니다.”라고 주장한다.
4. 다른 전문가들은 흔히 북한을 “유교국가”라고 부른다. 한국전쟁 연구로 저명한 커밍스도 같은 관점을 취한다.
5. 신유교국가라는 개념은 남한과 일본의 최근 북한 관련 문헌에서 널리 언급된다. 이 개념은 북한 현실의 여러 면모를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예를 들면 북한의 공식 매체들(서적, 방송, 정치집회, 대규모 공연)은 유교 전통에서 강조하는 인간의 윤리적 성향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인 충과 효를 인민에게 주입시킨다.
6. 1990년대 후반에 평양 조선혁명박물관을 찾은 방문객들은 도처에 전시된 김일성의 조각상과 유품뿐 아니라 조선왕조 마지막 왕 순종의 조부인 대원군과 연관된 척화비도 보게 되었다. 대원군은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에 맞서 개혁파를 숙청하고 쇄국정책이라는 극단적인 방어조치를 통해 왕조의 유교적 정치질서를 지켜내려고 시도했다. 사학자 김성보는 조선왕조 말기의 쇄국정책과 오늘날 북한의 자기방어적 고립 사이의 유사성에 기반을 두어 북한을 신유교국가로 개념화할 것을 제안했다.
7. 사회주의 혁명이 혁명 이전의 과거와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사회를 만들었다고 주장하지만 여전히 그 과거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기존의 많은 연구들이 있다. 북한, 중국, 베트남에서 일어난 혁명운동은 모두 과거의 봉건 유교 전통을 극복하려고 애썼다. 암스트롱은 북한의 국가건설 초기의 이러한 과정을 상세히 기록했다. 하지만 암스트롱이 주목한 것처럼 북한혁명은 자신들이 봉건적 착취적 퇴행적이라고 규정한 전통을 공개적으로 부정하면서도 이와 병행하여 사회적 통합과 정치적 강화를 목적으로 유교 전통을 재구성해서 활용하기도 했다.
8. 이에 대해 이문웅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북한에서 전개된 문화과정은 아마도 정치 지도자에 대한 강력한 충성심을 통하여 표현된 효의 연장으로 통합된 하나의 새로운 유교적인 사회 즉 가족국가에로의 변천으로 요약되어도 좋겠다. 어떤 점에서는 주희(朱熹)가 꿈꾸었던 사회가 바로 공산주의 북한에서 형성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9. 비슷한 주장이 1980년대와 90년대 초 남한의 정치민주화를 향한 격변기에 남한 지식인들과 학생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 주장은 민족주의 정서에 호소했는데, 외세에 지배받는다고 여겨진 남한에 비해 민족문화와 정신을 더 온전하게 지켜낸다고 주장하는 북한에 대해 점점 더 공감하게 된 것이다.
10.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의 죽음은 북한사회에 심각한 충격과 균열을 가져왔다. 북한에서 ‘대국상(大國喪)’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은 온 사회를 한순간에 정지시켜버렸다. 수십만의 애도자들이 평양의 광장을 메우고, 외부인들이 보이게도 진심이 어린 슬픔을 거대하게 집단적으로 표현했다.
11. 이런 집단적 애도의 장면은 남한사람들에게는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몹시 이질적인 것이었다. 익숙했던 것은 애도자들이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 한국사람들이 대개 가족장례에서 공적으로 애도하는 풍습에 따라 슬픔을 드러내어 곡을 하는 방식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평양의 거리에서 대규모 추모행사가 이질적으로 보인 이유는 한국의 전통관습에서 공개적으로 통곡하며 애도하는 것은 통상적으로 정치지도자가 아니라 죽은 가족과 친지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12. 연이어 반복되는 한마디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우리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우리 곁을 떠나시었습니다.” 학교에서는 교장이 뉴스를 듣자마자 슬픔을 격렬하게 표현하기 시작했고 그 방에 모여 있던 교직원들이 따라 울었다. 그 교장은 “전사자 가족” 출신으로, 조국해방전쟁에서 전사한 군인가족에게 주는 상당한 특권과 물질적 혜택을 누리는 신분이었다. 이 학교의 교사들은 그날 교장을 따라 집단적으로 크게 통곡했다.
13. 여러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의 죽음은 많은 북한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죽음과 비슷한 것이었고, 집단적인 애도와 이어진 장례절차는 거대한 가족국가적 행사였다. 명목적인 장례절차는 열흘간의 장례 전 애도기간을 포함해 백일간 이어졌고, 이후에 삼년으로 연장되었지만 사실상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14. “김일성 주석께서는 생존시 북한은 한 가정이라고 말씀하시었는데 그때 서방 사람들에게는 그이의 말씀이 리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화요일에 진행된 영결식은 북조선 인민들이 김일성 주석을 자기들의 어버이로 모셔왔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김일성 주석의 서거에 대한 북조선 인민들의 비분의 감정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다.”
15. 김일성 사망 10주기를 기념하여 2004년 7월 2일자 북한 <로동신문>에 실린 추모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버지를 잃고
폭우 쏟아지는 만수대언덕에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가고
천만자식들 어푸러져 목놓아 울고
전승광장을 지나는 수령님 영구차를
두팔 벌려 막아시며
정녕, 이 길만은 못가신다고, 못가신다고.
‘장군님 따라 승리의 한길로’라는 제목의 이 시는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의 고난의 행군을 그리고 있는 긴 서사시다. 제목의 ‘장군님’은 새 국가지도자인 김정일을 가리키며 시의 대부분은 건국지도자가 사망한 뒤 이 새로운 지도자가 가족의 국민적 결속을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가에 관한 것이다.
16. 이 서사시에 따르면 이러한 노력의 뒤에는 후계자의 깊은 효심과 전 지도자와의 견고한 정신적 유대가 있다. 북한이라는 국민가족은 새 지도자의 효심을 목격하고 존경하게 되면서 슬픔을 극복하고 영광스런 미래를 향해 하나된 진군을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정치적 유대는 두 가족적 영역(김일성의 가족 안에서 그리고 이 가족과 국민이라는 가족 사이)에서 작동하고, 새 국가지도자로서의 김정일의 위상은 죽은 국부(國父)에 대한 효성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수행하는 데서 나온다.
17. 김정일은 ‘상주(喪主)’로서 국가 전체가 관여하는 장례행사를 이끌었다. 이 서사시에 따르면 김정일이 이 역할을 주인답게 잘 수행하는 과정은 1994년 이후 북한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러한 메시지는 이 시대 북한의 다른 수많은 문화예술작품에서도 반복적으로 나온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현재의 북한정치가 기본적으로 장례와 추모의 정치라는 점을 알게된다.
18. 가족국가의 상징적 속성도 몇가지 주요한 변화를 겪어야 했다. 이전의 지도자는 몇십년간 국가의 유일한 창건자 아버지였다가, 1994년에는 조상으로서의 존재로 변화했다. 북한은 국가 최고지도자가 살아 있는 정치적 아버지에서 건국의 시조(始祖)로 변하는 것을 수용하기 위해 여러가지를 조정해야만 했다.
극장국가 북한 - 카리스마 권력은 어떻게 세습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