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발전한 이유는 '봉건영주제' 덕분이었다.
한국의 엉터리 역사학자들은 조선왕조를 옹호하면서 중앙집권체제가 우월한 체제라고 주장하지만,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전근대시대때 중앙집권체제를 선택하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지방관(유학자)들이 지방에 파견되면 지방의 발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대충 시간만 때우다가 아전들과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수탈했던 것이 조선의 중앙집권체제였다. 유교경전만 읽었던 엉터리 유학자들이 어떻게 나라를 발전시키겠는가? 중국과 조선이 유교성리학적 관점으로 엉터리 중앙집권체제를 했다가 경쟁이 없어져서 낙후된 체제를 유지하다가 근대시대때 망한 것이다.
중국중심의 조공/책봉 관계도 국가끼리 경쟁을 없애서 중국과 조선이 발전하지 못하고 망하는데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자고로 유교(성리학)+중앙집권체제+조공책봉관계는 망할 수밖에 없는 체제였다. 동시대의 유럽이 발전하고 근대화를 이룰수 있었던 것도 유럽대륙이 여러개의 국가로 나뉘어져 있었고, 이들 국가끼리 끊임없이 경쟁했기 때문이다.

국가든 사업체든 간에 경쟁자가 있어야 발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아시아는 중국이 너무 독점하여 경쟁이 없어져 버렸고 퇴보하게 된다. 고려의 우왕과 최영이 요동정벌을 하여 중국(명나라)과 경쟁을 해보려고 하니까 이성계, 이방원, 신진사대부같은 사대주의자들이 나타나서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켜 버렸다. 그만큼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독점력(monopoly power)은 강했다.
이렇게 중국과 조선이 유교적 세계관으로 인해 경쟁체제가 없어져서 퇴보할때, 일본은 내부적으로 '봉건영주제'라는 경쟁체제가 생겨서 동아시아 국가 중 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일본은 중세시대때 천황이 권력을 잃은 뒤 막부체제가 되었다. 하지만 다이묘(영주)들이 각지역에 할거하면서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다. 다이묘(영주)들은 독자적으로 법령도 만들고 군대도 조직하여 국가의 틀을 유지하였다.
15세기~16세기 센코쿠 시대(전국시대)가 되면 군웅할거시대가 되어 다이묘(영주)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게 된다.

<15세기~16세기 일본 센코쿠 시대>
겉으로 보면 센코쿠 시대가 혼란의 시대였지만, 이 시대가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서로 경쟁을 통해 발전했던 것이다.
다른 다이묘(영주)들한테 안 잡혀먹이려면 내가 강해져야 했기에, 각 지역의 영국들이 정신을 차리고 부국강병에 몰입했기 때문이다.
다이묘(영주)들은 부국강병을 위해 황무지를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고, 선진농업기술(수차 등)을 도입했으며, 저수지를 만들고, 제방을 쌓아 농업생산력을 늘렸다. 아울러 도로와 항구를 건설하고, 상업을 진흥하고 화폐도 발행하였으며 수출품을 개발하고 무역을 하여 경제도 튼튼히 하였다. 서양과 교류를 통해 신문물을 받아들였으며, 군사력을 튼튼히 하기 위해 신무기와 새로운 병법을 개발하였다.
농민들을 위한 정책도 추진되었다. 농민들을 쥐어짜고 수탈하기만 하면 농민들이 다른 다이묘(영주)에게 가버려서 국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인구와 국력을 유지하기 위해 농민들을 위한 세금정책/복지정책이 수반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의 모든 지역에서 부국강병을 추진하니, 일본전체가 발전했던 것이다.
17세기 초 일본전체가 통일되고, 에도막부가 들어섰다. 통일 후 평화가 찾아오자, 일본의 국력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전국시대때 경쟁으로 발전된 힘이 하나로 뭉처져서 잠재력이 폭발했기 때문이다.
에도막부는 다음과 같이 일본을 통치하였다. 막부의 직할지만 통치하고 각 번은 다이묘(영주)들이 알아서 통치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할 경우 또다시 센코쿠 시대같은 혼란의 시대가 올 가능성이 높았다.
혼란을 막기위한 에도막부의 보신책(保身策)은 다음과 같았다. 압도적인 국력으로 감히 다이묘들이 막부에게 못 덤비게 만들었던 것이다.
막부의 직할령은 일본 전체인구의 25%인 800만명(700만석)의 영지를 관할하고 있었고, 국제무역의 창구였던 나가사키를 직접 운영하면서 네덜란드, 중국과의 무역에서 생기는 이익을 독점했으며, 전국의 주요 광산(금, 은, 구리 등)개발권을 차지하여 화폐주조권도 독점하였다. 또한 오사카, 교토 등 주요 상공업 도시들을 직접 관할하여, 이곳의 상공인들로부터 받는 세금(자릿세, 물품세)도 엄청났다.
이때문에 수십개의 다이묘(영주)들이 한꺼번에 반란을 일으켜도 에도막부는 쉽게 진압할 수 있는 국력과 경제력이 있었기에 일본에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결국 군사적/경제적 힘이라는 실체적인 힘이 있어야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다. 아울러 번의 다이묘들이 각자 자기 지역을 통치하니까 행정의 치밀함과 효율성을 이룰수 있어서 일본전체가 더욱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에도시대때 일본은 중앙과 지방이 서로 견제와 경쟁을 통해 발전을 이룩하면서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일본은 되는민족이었던 것이다.
에도막부의 '참근교대'로 인해 일본전국에 도로와 역참도시가 발달하여 상공업이 진흥되었으며, 수도인 도쿄는 인구가 100만명을 넘겼다. 일본은 17세기~18세기때부터 도시화가 진행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로인해 17세기~18세기 에도시대때 이미 일본과 조선의 국력차는 상대가 되지 못할만큼 벌어지게 된다. 조선통신사의 기록을 보면 알수 있다.
조선통신사들이 일본변방 구석의 섬지역인 대마도의 부유함이 조선의 수도 한양보다 더 하다고 할 정도였으니, 도쿄나 오사카하고는 아예 비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통신사 강홍중은 대마도(쓰시마섬)에 당도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 오사카에 당도한 통신사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인겸: "수많은 집들이 모두 기와집이며, 오사카의 부호의 집은 조선 최대 권세가의 저택의 10배 이상의 넓이로 구리 기둥에 내부는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으니, 이런 사치스러움은 가히 비정상적이다. 도시의 크기는 동서남북으로 약 40km 정도로 굉장히 넓었는데, 놀랍게도 도시전체가 모두 번영하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다.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낙원'이란 말은 바로 오사카를 두고 한 말이다. 어쩜 이렇게 훌륭한 도시가 있을 수 있을까? 한양 번화가의 천 배의 발전이다. 중국의 북경도 오사카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 금수와 같은 일본오랑캐들이 이토록 평화롭게 번영하고 있었다니 원망스럽도다."

<오사카성>
당시 오사카는 강물을 끌어서 인공운하를 만들었고 그 위에 다리를 만들고 다리사이로 배가 지나다니도록 했다. 오사카에는 이런 다리가 200여 개이고 절은 300여개나 되고, 귀족들의 저택은 400~500가구, 좋은 집들은 수만채나 되었다고 한다. 또 출판문화가 발달하여 온갖 서적들이 쌓여 있는 서점가가 있었고, 식당, 술집, 약방, 화원, 그리고 기생들이 거주하는 화류거리도 있었다. 거리의 남녀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각종 장인들과 상인들이 도시 전체에 퍼져있었고, 국제무역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서양의 신문물(과학기술, 의학)도 들어와서 문명이 다채롭게 발전하고 있었다.
또한 무사(사무라이)들이 사회적으로 대우받고 있었고, 상무정신이 있어서 전쟁도 잘했다고 한다. 각 지역의 영주(다이묘)들은 모두 무사들었고 각 지역을 목숨을 걸고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무력(군사력)과 상업(경제력)이 결합하니 나라가 발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에도시대 오사카 모습>
이후 조선통신사들은 오사카보다 더 화려하고 규모면에서 2배나 더 큰 도시인 에도(도쿄)를 보고 또 놀라게 된다.
당시 조선통신사(사대부/양반)들이 한심했던 것은 일본의 발전과 부유함을 부러워하면서도 일본을 오랑캐라고 무시하고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근대시대때 일본과 조선의 국력차가 벌어진 이유는 8가지이다.
1. 일본은 상업이 발달하여 자본이 풍부했고, 상무정신(사무라이 정신)이 있어서 군사력도 튼튼했다.
2. 일본은 공평한 세금제도와 상업의 발달로 세수가 증가하여 국가재정이 튼튼했다.
3. 일본은 상무정신과 상업의 발달로 인해 합리적인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이토코토리(良いとこ取り) 정신).
4. 일본은 상업의 발달로 자본이 축적되었고 축적된 자본을 기술에 투자하여 기술이 발달하였다 (건축술 등).
5. 일본은 금, 은 등 귀금속 자원이 풍부하였고,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여 서양과 교류를 통해 신문물을 도입할 수 있었다.
6. 일본에 봉건영주제라는 경쟁적인 시스템이 있어서 지역끼리 경쟁을 통해 발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7. 일본은 수로와 운하가 발달하여 운송비가 낮아져서 대도시로의 발전이 용이했다 (도쿄, 오사카, 교토, 나고야 등).
8. 일본열도의 자원과 생산력이 한반도를 압도하였다.
반면에 조선은 성리학적 사농공상(士農工商) 사상으로 상업을 천시하고 억압하였고, 성리학적 문치주의로 군사력도 천시하였기에,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392년 이성계와 이방원이 조선을 건국했던 그 순간부터 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국가사상체계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삼한농경민족들의 두뇌가 아둔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거시적 관점이 부족하여 일본인보다 멍청했다. 유교의 본고장인 중국인들도 현실과 괴리가 있다고 송나라시대 이후에는 성리학을 버리고 실용적인 학문(양명학 등)을 추구했는데, 근대시대까지 교조적인 성리학에 빠져있었다는 것은 삼한인들이 아주 아둔했다는 것을 뜻한다. 현재 한국의 민간정치인들도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조선의 사농공상 사상>
오늘날 일본의 국회의원들은 대부분 예전 다이묘(영주)들의 후손들이다. 세습제로 운영되어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국회의원자리를 물려받는 것이다. 이때문에 일본은 귀족세력이 존재하여, 국가의 장기적인 경영이 가능하다. 국회의원들은 지금도 각 지역의 유력세력(다이묘)로서 자기지역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지킬 수 있는 존재들이다. 애국심이 강한 것이다. 아울러 사무라이 정신을 가지고 있어서 부정부패도 심하지 않다. 사무라이들은 가문의 명예를 소중히 하기에 부정부패를 지양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장기경영과 청렴함이 합쳐져서 일본이라는 나라가 번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발전의 역사만 봐도 세상은 우파적인 사고방식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좌파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면 그냥 망하는 것이다. 발전은 커녕 나라를 지킬수가 없다.
한국은 민주화 이후 망해가고 있다. 나라와 운명을 함께하는 상무정신을 가진 귀족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5년 단임제로 운영되니, 정권마다 정책의 일관성이 없고, 정치인들이 책임감이 없어서 국가의 장기경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직선제 민주주의 때문에 애국심 없는 좌파세력들이 무분별하게 정치판에 들어와서 나라를 망쳐놓았다. 문재인이 대통령을 맡고 박원순이 서울시장을 9년이나 맡았으니 나라가 제대로 될수 있겠는가? 사무라이 정신을 가진 일본정치인들과 달리 한국 민간정치인들은 상무정신이 없어서 나라를 지킬수 없다.
한국은 일본처럼 봉건영주제의 전통이 없어서, 지방자치제를 해도 실패하고 있다. 정치인들과 지방토호들이 상무정신이 없어서 부정부패가 심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방비리가 심하며 지방정치인들이 지방을 관리하고 발전시킬 역량이 부족하다. 이번에 세계잼버리 대회를 실패한것을 보면 알수 있다. 전라도가 특히 심한것 같다.
한국처럼 근본없는 나라는 나라와 운명을 함께하는 군부세력이 장기집권하여 나라를 이끌어야 하는데, 민주화세력이 무분별하게 민주화를 해서 나라가 어려워진 것이다. 군부가 장기집권하면서 제한적으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추진했어야 했는데 실패하고 만 것이다. 군부가 나설수 없다면 좌파들을 제도권 정치판에서 모두 쫒아내고, 우파장기집권체제라도 만들어야 할것이다. 세상과 역사는 우파적인 사고방식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