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수는 경남 창녕 출신으로 고려 말기의 무신이었다. 같은 경상도 출신 고려귀족이었던 이인임(경북 성주)과 친척관계였다. 

조민수는 고려의 무장으로서 많은 족적을 남겼다. 

공민왕때 조민수는 홍건적의 1차 침입 당시 순주부사(평남 순천)로 있었는데,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 이인임(李仁任) 등과 함께 병사들을 징발하여 군사력을 증강시켜 모거경이 이끄는 4만명의 홍건적을 물리치는 공을 세워 2등 공신이 되었다. 당시 홍건적 4만명 중 압록강을 건너서 살아돌아간 자는 300명에 불과했다. 명나라 건국세력인 홍건적을 전멸시켰다는 것은 고려군의 무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후 조민수는 전리판서, 동지밀직사사 등을 역임하고 충근보리공신의 호를 하사받았다.

우왕 때 조민수는 경상도 도순무사를 지내 왜구(일본해적)를 방어하였다. 김해, 대구 전투에서는 왜구에게 패했지만, 밀성(경남 밀양)과 청수역(경남 진주) 전투에서 왜구를 격파하였다. 조민수가 직접 돌격하여 왜구의 수급 13급을 취했다고 한다. 이에 조민수는 고려조정으로부터 의복, 술, 말을 하사받았다. 



 



고려군과 조선군의 차이점은 조선군은 창과 칼을 쓸줄 몰라서 일본군을 보면 도망치기만 했지만, 고려군은 창과 칼을 쓸줄 알아서 일본군(사무라이)과 교전을 벌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고려는 외국의 도움없이 자체적인 군사력으로 홍건적과 왜구(일본해적)를 물리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무력을 바탕으로 5만명의 원정군을 꾸려서 요동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반도 왕조들 중 한반도 밖으로 군사력을 투사할 수 있었던 왕조는 고려왕조가 유일했다. 상무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대륙의 국제정세는 원나라(몽골제국)가 몰락하고 한족정권인 명나라가 급부상하고 있었다. 

1368년 명나라군이 원나라(몽골제국)의 수도인 연경(베이징)을 포위하자 좌상시(左常侍)로서 의정주등처안무사(義靜州等處安撫使)가 되어 명나라의 위협에 대비하였으며, 충근보리공신(忠勤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조민수가 명나라를 방어하기 위해 서북면(평안도) 도체찰사로 있을때 일이었다.

당시 명나라 정료위(요동) 도사였던 고 모씨가 몽골제국의 잔존세력이었던 나하추와 북원이 고려에 접근하는지 부하들을 장사꾼으로 변장시켜 정탐하다가 조민수에게 들켰다. 당시 명나라(중국)는 고려와 북원(몽골)이 연합하여 명나라에 대항할까봐 요동과 평안도 지역을 수시로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조민수가 명나라의 군사들을 꾸짖어 쫓아버렸다. 

조민수는 이 행동으로 인해 반명자주노선을 고수하던 우왕과 최영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1379년(우왕 5) 문하평리(門下評理), 1383년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군되었다. 다음해 밀직부사로서 전라도조전원수(全羅道助戰元帥)를 겸임, 1385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우왕과 최영의 신임을 얻어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것이다.

1388년 우왕과 최영은 명나라군이 주둔하고 있는 요동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우왕은 조민수에게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를 맡겼다. 좌군도통사 직위는 이성계가 맡았던 우군도통사보다 더 높은 직위였다. 우왕과 최영이 조민수를 신임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최영은 조민수에게 이성계가 반역하면 목을 치라는 밀명까지 내렸다. 


 




하지만 조민수는 5만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의 위화도까지 진격했다가, 왕명을 어기고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하였다. 강대국 명나라와 정면대결은 어렵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것이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이후 조민수는 이성계 일파에게 탄핵당하여 제거되었고, 고향인 경남 창녕으로 유배되어 거기서 죽게된다. 



 




한국사람들이 멍청하고 거시적 관점이 떨어진다고 생각되는 것이 위화도 회군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다. 해석들이 모두 엉터리들이다. 

당시 요동땅을 되찾느냐 마느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요동을 점령했다가 금방 명나라한테 다시 빼앗겨도 문제가 없다. 명나라의 침공은 외교적으로 막고, 그 이후에 국력과 군사력만 잘 유지하면 요동땅을 되찾을 기회는 많았기 때문이다. 명나라 말기, 근대시대때 중국이 흔들릴때 얼마든지 요동땅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부강한 고려왕조가 무너져서는 안되었다.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감히 한민족 최강왕조인 고려를 멸망시키고 잘되려고 해? 현실은 고려가 한민족 최강이었다. "고려 = 고구려 상무정신 + 태조왕건의 상업" 이것을 뛰어넘을만한 부강의 사상적 체계가 없었다. 이때문에 그 누가 나와도 고려보다 더 부강한 나라를 만들수가 없는게 현실이었다. 그만큼 한민족(삼한민족)은 약한민족이었다. 

고려왕조가 무너지고 어떠나라가 건국되었는가? 유교탈레반 조선왕조였다. 무능했던 송나라의 성리학적 문치주의를 그대로 모방하여 나라가 약해졌다. 조선은 고려에 비교도 안될정도로 약한나라였다. 

조선이 건국되고, 성리학적 사농공상과 문치주의로 군사력과 상업이 무너지면서 민족이 아예 망하게 된 것이다. 군사력과 상업이 있어야 영토를 만주로 확장하고, 문명이 발달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해져서 망하게 된 것이다. 조선은 맬서스 트랩으로 망한나라이다. 조선후기가 되면 인구증가로 목재가 부족해져서 산이 모두 민둥산이 되어버렸다. 자원과 식량이 턱없이 부족해졌다. 그런데 군사력이 약해서 영토확장이 불가능하니까 내부적으로 고사한 것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국인들이 대부분이다. 조선건국과 동시에 잘못된 사상으로 문명발전이 불가능하여 민족자체가 망한 것이다. 이슬람 원리주의자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이 발전을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유교탈레반 조선은 아프가니스탄이랑 비슷했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 그냥 빨리 일본에 합병되어 일본인이 되는 것이 더 좋았다. 임진왜란때 일본에 합병되었어야 했다. 그정도로 조선은 발전가능성이 제로여서 조선왕조가 유지되면 나라가 발전이 안되고, 백성들이 온갖 수난(외침, 자연재해, 전염병, 기근 등)을 당하다가 추하게 망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결말이 그랬다.   

구한말 조선에 온 서양인들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인들은 중국인들처럼 장사(상업)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인들처럼 전쟁을 잘하지도 못한다. 도무지 장점이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답답한 노예(노비)근성의 민족이다." 

아니다.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한반도인들은 중국인 못지 않게 장사(상업)도 잘했고, 일본인 못지 않게 전쟁도 잘했다. 유교탈레반들이 다 망쳐놓은 것이다.

조선건국세력인 이성계, 이방원, 신진사대부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이것만 봐도 알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