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민은 ‘부동산’의 포로가 됐고, ‘부채’의 포로가 됐다. ‘이지 머니’의 포로가 됐다. 민족복음화 운동이 펼쳐지면서 사회의 규범잣대가 세워지는 이면에서, 40-50년대 출생세대는 무당신앙을 그리워했나 보다. 그러한 특정 세대의 욕망에 터잡아서, 가계부채와 부동산 가액의 폭풍 상승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민족복음화 운동 당시의 윤리로는 전부 금지된 영역이었다.

 

부채 버블은 터질 것이다. 문제는 ‘버블 붕괴’ 이후일 것이다. 과거보다 훨씬 작아진 경제영역을 기초로, 사회가 작동돼야 할 것이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한반도를 휘어잡았던 노론계급의 향수와, 이와 연결된 직계존비속은 여전히, 러시아혁명(공산혁명)에서 소련이 그러했던 가치처럼 정부 세금 창고만 독차지하면 이웃에 무슨 해악을 끼치던 하겠다는 의지와 연결돼 있다. 그들은 ‘민족신화’를 악용한다. 민족신화에 젖어 버리면, 노비계급이 생활하는 메카니즘에 저절로 국민을 순응하게 한다.

 

신화가 아닌 현실의 세상에서는 ‘직장’을 유지하기 위한 상호협력이 필수다. <이지머니>에 기초해서, 버블을 확산하고 그 이익을 자기 마을로 손실을 너네 마을로 하는 것은, 사실은 끝이 났다. 이제는 노골적인 ‘현실’의 움직임만이 남는다. 근로자들은 직장의 부도 방지를 위해서, 상호협력을 하는 것이 앞으로 지루하게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일본 대차대조표 불황의 선례에 비춰 볼 때) 군사정권 때에 규범을 강요하던 것을, 지난 30년 일체 부정하고 욕망을 풀어 버렸다.

 

한국교회는 신앙인구 몸집에 비해서, 말씀을 무조건 지킨다는 인구가 매우 부족했다. “이지머니”발 부채버블이라는 사탄마귀에 너무 쉽게 오염됐다. <아니오>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부족하고, 교회란 이름으로 권력에 줄 서는 일이 계속됐다.

 

한국 교회가 꿈꾸는 세상은 신분제가 없어지고, 특수계급도 노예제도 없는 세상이다. 반면에, 북한공산당은 특수계급도 있고 노예제도 있다. 고려연방제에 줄 대기를 원하는 남로당 후예세력은 주체사상은 아니지만, 조선왕조 민족신앙에 기초하여 북한공산당 공산주의에 준하는 모종의 사이비종교 시스템을 구한다.

 

북한공산당에 종속된 남로당 인민공화국에 몰빵한 호남개벽파의 경우에서 ‘친중’은 통일(종족 대동)이고, 기독교는 분단(타종족인 오랑캐다)이라 말해왔다. 통일운동은 사실상 조선왕조 붕당정쟁으로 어느 붕당에 종족정치의 갑을 부여하느냐의 문제요, 어느 쪽도 헌법 4조를 구현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한국교회는 말씀연구보다 세상참여를 하려는 의지가 어느 순간 압도했다. 한국교회에 양반 후손이 끼어 있을 수 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분들이 ‘다른 복음’으로 후퇴할 때, 일반성도들은 ‘아니오’하고 저항하지 못했다.

 

주체사상과 김일성주의가 아닌 통일도식은 모조리 ‘특수계급’과 ‘신분제’를 복원하는 노선을 취하며, 주체사상 김일성주의 특수계급에 자기가 개벽파 가문이 원래인데 크게 하나의 기득권 논리로 끼워 달라는 논리를 전제한다. 동전의 양면처럼, 국민기본권은 은근 슬쩍 박탈을 전제한다.

 

노비로서 주인 마님만 잘 모시면 되는 입장이 아닌 한, 모든 국민에게는 삶의 영역에서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다. 특수계급을 노골화하여 잇권을 여기서 독점하기로 한다,고 하지 않는 한, 공정한 법질서는 시장경제의 전부와 상응한다.

 

법 질서는 법의 질서를 신뢰하는 자에게 손해받는 감정이 없어야 함을 전제한다. 백낙청 촛불 두목에 내란죄 처벌이 법치주의에 생명인 것은 이런 이유다. 한쪽에서는 남로당 인민공화국 질서로 법치를 흔들면서, 헌법질서가 온전하길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모든 사태의 기원에는 고려연방제에 상응하는 중공식 지방정부를 한국지방자치가 구현하려는 의지에 있다. 중국의 지방정부가 토지사용권을 판매하여 지방정부 공무원 확장했듯이, 노무현은 이 논리를 그대로 가져다가 노무현의 10.4를 지향하는 지방자치 공무원 확장을 구현했다. 이것이 문재인의 판문점 및 평양선언에 이른다.

 

부동산이 완전히 부서지면, 노무현의 10.4를 지향하는 공무원 공화국이 무너진다. 그때에는, 노무현의 공식 따라서 정부 부처가 인위적으로 세종시에 찢어 놓은 것은, 서울로 원위치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부채버블과 부동산 공화국을 초래한 모든 원인의 사회적 심판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그 이후의 문제가 남는다.

 

사실, 국민소득 천달러 때에 미래를 낙관한 한국교회 분들을 오늘의 시점에서 생각해보자. 결코, 쉬운 선택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야말로 울며 씨를 뿌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부채버블과 부동산 공화국이 붕괴되는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그때 그 분들의 몫 같은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어제, 오늘, 내일이 동일하시다.

 

孟子를 통해서 사대부는 神이 됨을 느끼지만, 기독교인이 됨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힌 자아를 통해서 이웃을 바라봄을 배운다. 맹자를 통해서 부족국가로서 人治의 사회관을 배우지만, 성경을 통해서는 종족을 넘어서는 국민국가로서 사회관을 배운다.

 

이제, 다시 씨를 뿌려야 한다.

 

한국교회가 믿는 하나님은 저출산의 하나님이 아니다. 종족간의 상호불신을 통해서, 결혼을 못하겠네.... 라고 느끼는 것과 정반대를 지향하는 것이 성경의 윤리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