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만인의 일본 식민 통치에 대한 인식은 쉽게 찾아볼 수 있으나, 대부분의 자료는 대만의 한족들의 인식에 국한되어 있고, 대만원주민들이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자료는 비교적 적다.

본 글은 대만원주민 중 하나인 부눈족(布農)이 세대별로 일본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해 다룬 글을 번역한 것이다.
부눈족은 16개의 대만원주민 민족 중 하나로 그 중에서 수가 4번째로 많고(약 5만 명), 역사적으로 대만 중부의 고산 지대에서 수렵채집과 화전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들의 활동 영역은 후에 대만 동부와 남부까지 확장되었다.
일본의 대만 통치가 시작된 후에 일본은 자원 확보를 위해 대만 산지 지역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부눈족을 비롯한 고산 지역의 원주민들은 일본 통치에 저항했으나 일본은 부눈족을 비롯한 대만원주민들을 강제이주시킴으로써 이들의 저항을 무력화했다.
1910~1914년, 일본은 5개년 이번계획이라는 강제이주 정책을 시행한다. 일본군이 원주민들이 거주하는 고산 지대에 액용선을 치고 그 경계 안의 원주민들을 철저히 고립시켜 원주민들에게 항복을 강요했다. 원주민들이 항복하면 원주민들을 무장해제시킨 후 일본군은 철수, 일본 경찰이 그 지역의 치안을 유지한다.
대만원주민은 1930년에도 우서 사건을 비롯한 봉기를 일으키는 등 일본의 통치에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소개할 부눈족은 시디크족과 더불어 일본 통치에 가장 오래 저항한 민족 중 하나이다. 부눈족은 1906~07년 일제에 봉기를 일으켜 진압당한 바 있고, 1915년에는 수십 명의 일본인을 살해한 다훈 사건을 일으켰으며 1917년에는 경찰서를 습격하는 단다이 사건을, 1921년에는 토시요 마을 사건을 일으킨다. 1930~40년대에도 부눈족의 경찰서 및 마을 습격은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1941년 벌어진 나이혼로쿠 사건 이후 부눈족은 일본군의 진압 과정에서 기존 마을이 불타고 새로운 마을로 다시 강제이주당한다.
일본은 무력으로 원주민들의 봉기를 철저히 진압하는 한편, 원주민들의 애국청년단체 조직을 장려하고 교육과 산업 정책을 통해 원주민들에게 일본인으로의 민족 의식을 심으려고 노력한다.
실제로 일본의 동화 정책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둬서, 태평양전쟁 동안 많은 대만원주민 청년들이 다카사고의용대에 지원해 전장에서 싸우기도 했다. 이 의용대에 지원한 청년 중에는 가족들이 일본군에게 죽거나 우서 사건을 일으킨 시디크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1세대 부눈족의 일본 인식
일본 통치를 처음 받게 된 부눈족 1세대는 일본 통치가 시작됐을 때 이미 성인 세대였으며 일본으로부터 교육을 받지 못한 일본 식민 통치에 통합되지 못한 세대이다.
종종 대만총독부의 기록에는 총독부로부터 칭찬을 받은 모범적인 원주민들의 사례가 보이나, 평범한 대만원주민들이 어떻게 일본을 인식했는지 보여주는 경우는 적다. 그러나 부눈족이 1900년대부터 1940년대 초까지 지속적으로 일본 통치에 저항했고 그 중심에 있던 세대가 1세대였음 고려하면 그들의 일본 통치에 대한 인식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나오는 사례도 1세대 원주민들이 직접 이야기한 경우가 아니라 집단적 기억을 공유하는 자녀 세대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알려진 내용들이다.
1. X같은 일본인
L은 1926년 타이둥의 산간 지역 나이혼로쿠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위에서 소개한 나이혼로쿠 사건 때문에 1941년,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은 새로운 마을로 강제이주당한다. 그녀는 당시 아버지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한 말을 기억한다.
"리푼 타키!" (좆같은 일본인!) 그녀의 아버지는 일본인에 의해 불탄 마을을 뒤돌아봤다.
2. 이주 정책에 대한 불만
1931년 태어난 T는 4, 5살 쯤에 타이둥 북부에서 일어난 산불로 기존에 살던 강 옆 마을에서 산기슭에 있는 마을로 이주당했다. T는 아버지가 마을을 떠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지만 최종적으로 친척들에게 설득되어 현재의 마을로 이주한 것을 기억한다.
3. 입양 반대
D는 1923년 산 중부 마을에서 태어났다. D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D는 원주민 아동 교육 센터를 다녔는데 그곳의 교사이자 경찰관이었던 일본인 Y는 D를 무척 좋아했다. Y와 Y의 아내는 아이를 갖지 못했고 그래서 Y는 D의 어머니에게 D를 입양하고 싶다고 말했다. D의 어머니는 이 제안에 대답하는 걸 꺼려했고, 이 소식을 들은 D의 외삼촌은 경찰서에 달려가 Y에게 항의했다.
"만일 내 조카를 뺏어간다면, 여기 있는 일본인을 모조리 죽여버리겠소."
결국 Y와 Y의 아내는 D를 입양하는 걸 포기했다.
2세대 이야기
1세대와 달리 2세대는 일본 통치가 시작됐을 때 태어나, 일본 제국의 교육을 받고 동화 정책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다. 일본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대체로 '친일적'이고, 일본 시대를 향수스럽게 추억하는 경향이 있다.

(다카사고의용대, 대만원주민으로 구성된 일본 제국의 의용군)
1. 다카사고 의용대에 지원하다
1920년에 태어난 E는 앞서 언급된 L의 형이다. 그의 아버지가 일본 법을 싫어했기 때문에 E는 원주민 교육 기관에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2차대전이 시작되고 E는 다카사고의용대에 지원해 뉴기니에서 전투했다. E에 의하면,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이 옳고,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참전한 사람들을 가장 용감하다고 생각하는 당시 사회분위기에 고무되어 다카사고의용대에 지원했다고 한다.
전장에서의 E의 영웅적인 이야기의 일환으로, E는 "일본은 군함 수가 적은 작은 나라였지만, 세계일류국가가 되기를 원한 매우 욕심많은 나라였다."고 말했으며 "일본은 사람으로 싸웠지만, 미국은 무기로 싸웠다. 이렇게 큰 차이가 나서 이길 수 없었다."고 말했다.
2. 하이술은 영웅이 아니다.
대부분의 부눈족은 산간 마을인 나이혼로쿠를 그들의 고향으로 간주했으며, 나이혼로쿠 사건을 일으킨 하이술을 일제에 대한 마지막 저항자로 여기며 그들의 용맹함을 강조했다. 실제로 2000년대 초 부눈족의 마을에 방문한 연구자는 하이술의 용맹함을 강조하는 극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극의 배우였던 1932년생 노인 R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하이술은 우리의 영웅이 아닙니다. 하이술의 습격 때문에 우리 모두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혼로쿠 사건 이후 사냥 제한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2002년 토착 원주민 재단은 정부의 도움을 받아 일부 부눈족 노인을 헬리콥터에 태워 옛날 나이혼로쿠 마을로 데려갔다. R 또한 이 때 옛날 마을로 갔는데, 깃대 앞에서 친구들과 일본어로 기미가요를 제창했다. R은 "기미가요를 부른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단지 원주민아동교육센터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노래를 불렀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이술과 그의 동료들)
3.
W는 1931년 지역의 번역가였던 한족 아버지와 부눈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나이혼로쿠에서 자랐다.
나이혼로쿠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녀는 원주민아동교육센터에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그 당시를 이렇게 떠올린다.
"스가와라 경찰과 다른 경찰의 어린 아들이 죽어서 안타까웠습니다. 산기슭 마을로 이주한 후에, 일본인을 많이 죽여봐야 의미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중에 일부 부눈족은 항의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이술은 잘했어! 일본인에 대한 복수였어."
그러나 W에 따르면 1923년에 태어난 W의 남편은 하이술의 부족원이었지만 다카사고의용대에 지원했고, 나이혼로쿠 사건에 대해 "우리에게 평생 골칫거리였고 그 사건 때문에 하이술에게 짜증이 났다."고 말했다.
4.
P는 1922년 난터우현 산악 중부에서 태어났다. 일본의 이주 정책에 따라 그녀가 12살이 되던 해 그녀의 가족과 친척들은 산기슭의 새로운 마을로 이주한다.
P의 마을에서 연구자를 만날 때마다 P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인들이 너무 그리워요. 우리는 일장기를 들고 기미가요를 부르며 많은 사람들을 전장으로 보냈습니다."
다른 마을에서도 마찬가지로, 산기슭 마을의 부눈족 노인들은 연구자의 일본 국적에 대해 특별한 존중을 표했다.
부눈의 한 노인은 "일본은 전쟁에서 졌지만, 일본정신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여성 노인은 연구자에게 전통 축제 공연을 위한 각본을 건네주었다. 이 각본은 노인들이 일본 시대에 배운 간단한 가타가나들로 적혀 있었다. 연구자가 이런 중요한 자료를 공유해주는 이유를 묻자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발리(연구자의 부눈족 이름), 당신이 일본인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연구에 유용하게 써주세요."
전후에도 이어진 관계
일본 통치가 종식됐지만 이제는 국민당의 시대였다. 그런 의미에서 부눈족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독립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이제는 "중국화의 물결"이 부눈족에게 들이닥쳤고, 원주민 사회와 갈등을 빚었다. 2세대의 부눈족은 그런 와중에도 일본과의 개인적 관계를 유지했다.
1. 황위 계승에 대한 관심
1927년에 태어난 U는 패전 전 해군의 자원봉사자로 일했고, 전후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2000년대 연구자가 현장 연구를 하는 중, U는 반복적으로 일본의 황위 계승 상황에 대해 관심을 표현했다.
"일본의 황위 계승 상황이 너무 불안해요. 황태자[나루히토] 아직 아들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발리, 일본인들에게 이 제안을 전해주세요. 아들이 없다고 딸에게 황위를 물려줄 필요는 없어요. 우리 부눈족이 하는 것처럼, 천황의 가까운 친척의 아들을 후계자로 선택하는 게 좋을 수 있어요."
2. 일본 외교 전략에 대한 비판
1928년에 태어난 B는 나이혼로쿠 사건의 주모자와 같은 부족에 속하지만, "친일파"인 것으로 더 유명하다.
B는 15살에 한 달 간의 군사 훈련을 받았다. B에 따르면 1945년, 미국이 오키나와를 침공한다는 소식을 듣고 B는 증원군에 지원했지만, 군함 부족으로 거절당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B는 일본군이었던 한족들과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
B와 인터뷰 하는 중, B는 종종 연구자의 말을 끊고 현재 일본의 약한 외교 전략을 비판하며 2차 대전 일본의 지배적인 전략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 그는 식민지 시대 일본의 교육과 오늘날 대만의 교육을 비교하면서 부눈의 젊은 세대가 대만에 의해 부패했다고 비난했다.
3. 일본인 교사와의 관계 유지
앞서 언급된 T는 일본 교육을 6년이나 받았다. 졸업 후 일본인 경찰이자 교사였던 K는 T의 성실함과 일본어 능력을 높게 사서 T와 그의 친구들을 경찰서의 심부름꾼으로 교용했다.
1980년대 T는 부눈족 친구가 다른 일본인 경찰 겸 교사인 D와 접촉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T는 D에게 편지를 쓰고 나고야의 D의 집에 세 차례나 방문했다. 또 20년 전, D가 대만에 살았을 때 낳은 딸도 대만을 방문했다. 그 후, D의 딸과 T는 몇 번이고 서로 편지를 주고 받았다.
T는 일본 시대 일본인 경찰관 겸 교사들이 부눈족 아이들을 잘 돌봤다고 말한다. T는 "엄격한 선생님도 몇 있었지만, 지시에 따르면 때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일본인과 일본이 그립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인은 이방인이 아니기 때문이죠. K의 자녀들과도 연락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부눈의 모든 2세대가 친일적인 것은 아니다. 1920년대에 태어난 한 부눈 여성 노인은 "전 일본 교육을 받지 않아서 일본인에게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합니다."라고 말했으며 나이혼로쿠에서 태어난 1933년생 부눈 노인은 "제 기억에 일본은 매우 엄격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인에게 친근감을 느끼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3세대 이후
3세대는 2세대의 자녀 세대로 대만 독립 직후 즈음에 태어난 세대이다. 4세대부터는 대만의 민주화와 원주민 인권 운동이 벌어진 시기에 태어난 이들이다. 모두 일본의 통치를 전혀 경험하지 않았으나 그들도 앞선 세대와 집단적 기억을 공유하며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키웠을 것이다.
1. 어른들은 일본인에게 세뇌되었다.
1958년에 태어난 H는 평소 과묵하지만 술에 취하면 종종 난징대학살, 무샤 사건, 일제의 노동력 및 삼림 자원 착취를 비판한다. 또 그는 반복적으로 부모 세대의 부눈족이 친일적인 건 일본 식민정부에게 세뇌당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H는 부눈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며 부눈족의 정체성을 공고히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종종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인은 불로초를 찾아 떠난 고대 중국인의 후손이지. 너희 일본인과 우리 중국인은 똑같아."
2.
1957년에 태어난 K는 앞서 언급된 U의 아들이다. K는 역사적으로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한다. K는 동시에 자신이 토착민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결국 소수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중국공산당이 대만을 정복하더라도, 부눈은 대만 한족에게 억압당했다고 말하며 새로운 통치자(공산당)에게 엎드릴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3.
1957년에 태어난 F는 초등학교 교사이다. F는 대만 본성인이 다른 사람들을 앞지르는 데 익숙하다고 말하지만, 부눈족에게 중요한 것은 우정이라고 말한다. 반면 그는 외성인이 무례하지 않기 때문에 믿을만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는 국민당이 대만의 해방자라고 주장하는 교육을 신뢰하지 않는다. F에 의하면 그의 부모 세대는 일본 통치를 높게 평가했고, 그의 할아버지도 일본을 비판하지 않았다.
4. 아버지의 일본식 교육
1956년에 태어난 M은 B의 장녀이다. M의 아버지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편협한 인물로 일본식 교육으로 자녀들을 길렀다. M은 자녀들에게 복종을 명령하고 때로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M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아버지의 폭력을 용납할 수 없었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전쟁 전, 전시 상황을 고려하면 아버지 세대에는 엄격한 일본식 교육이 틀림없이 필요했다고 깨닫고 있다.
5.
1963년에 태어난 N은 부눈문화교육원 재단 회장의 남동생으로 재단 문화부의 전 관리자이다. 그는 파이완족 아버지와 부눈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스스로를 중국인이라 생각하고 그 정체성에 의심을 품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대만원주민 인권 운동이 벌어지고,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N은 원주민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그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비판하면서, 이제 부눈족의 오늘과 지역 역사의 연계를 목표로 삼는다.
6.
1965년에 태어난 Q는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저는 일본의 통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에 대해 강한 감정을 느끼지 못합니다. "주요 경제 강대국, 전자제품, 일본인의 근면함" 정도를 빼면요."
7.
1972년에 태어난 C는 학교에서 일본과 일본인을 "흉악하고 교활한 침략자"로 배웠다. 그러나 대중매체와 일본인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이러한 인식은 사라졌다. C는 "어느 나라에나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다."고 말하면서 일본의 경제력과 근면성실함을 높게 평가하지만, 이제 일본은 그의 세대에게 "중요하지 않은 타국"일 뿐이라고 말한다.
요약
1. 일본 통치 이전에 태어난 1세대는 일본 제국을 이방인으로 간주하고, 경계와 저항의 대상으로 여김.
2. 일본 통치 시기에 태어난 2세대는 일본의 교육과 일본인이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일본인의 엄격성과 차별 정책에도 불구하고 부눈족을 가르치고 지원하는 세력으로 인식하게 됨. 이 세대의 일부는 의용대에 지원하고 반란에 동조하지 않았으며 전후에도 일본과의 관계를 유지하기도 함.
3. 전후에 태어난 3세대는 국민당에 의해 중국화 교육을 받았으며 이에 따라 일본을 조국인 중국을 침략한 식민지 개척자로 간주함.
4. 민주화, 대만원주민 운동 시기부터 태어나고 자란 4세대 이후는 이제 일본은 식민지 역사와 관련없이 경제 강국 또는 문화 강국 정도로 인식하게 됨.
출처
Multi-layered ‘colonial experience’ Collisions, contacts, and reencounters of the Bunun with ‘Japan’, Naoki ISHIGAK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