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교체가 되도 촛불 문단을 띄우는 조선일보, 그것을 바라보는 호구 우파
-이재명 후원회장 백낙청의 민중민족문학이란 무엇인가?-
 
 



94년에 ‘역사비평사’에서 ‘한국정치의 지배이데올로기와 대항이데올로기’란 책이 나왔다. 민정당 민족주의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민주당 민족주의를 대항 이데올로기로 내세웠다. 백낙청은 민주당 민족주의에 속한다. 민정당 민족주의를 이끈 조선일보의 입장은, 민주당 민족주의에 착실한 굴종주의로 변했다.
 
문재앙은 지난 3.1운동 100주년 행사에서 ‘영호남 개벽신앙’ 양분파의 공통분모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미당 서정주는 1920년대 좌익 정신의 기원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 내용의 최종 완성본은 이미 문재앙 때 3.1운동 100주년 행사로 드러났다.
 
조작없는 한국현대사로서 일제시대는 항일운동의 중심은 조선공산당운동으로 ‘단일 대오’였다. 조갑제기자는 민정당 민족주의 비위 맞추면서, 같은 논리로 이중생활의 어법을 쓴다. 양측을 진실하게 바라본 성찰의 결과로, ‘사실’이 정말 그러할 때는 ‘사실’을 받아들이는게 맞다. 어차피, 사실을 외면해도 사실로 돌아선다. 항일운동의 중심에는 ‘친중좌익의 아버지’인 단재 신채호 선생과 박은식 선생이 있었다.
 
민정당 시대부터 김영삼 시대까지, 아니 김대중 정부를 거쳐 노무현 정부 초반까지, 도대체 ‘신채호’와 ‘박은식’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를 일반국민은 납득할 수 없었다. 민정당 국정교육은 신채호와 박은식을 이념초월적 민족주의로 설명했다. 그러나, 정반대로, 대단히 이념적이며 지향점은 임시정부 창조파로서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구체적으로 지향했다.
 
소련공산당은 러시아혁명 직후 한반도에 공산당의 조직국과 분국을 내세웠다. 그리고, ‘중국’이 망하고 중국을 대체할 중화세계를 찾던 사대부들은 소련의 레닌이 사는 크렘린궁을 중화세계로 선택했다. 이제, 유교 경전 대신에 소련 공산당이 보내는 공산주의 교본이 대체했다.
 
이 세력 중에 한 영남분파가 이승만 정부에 줄 서고, 이 세력에 다수파인 호남분파가 남로당을 세우고, 인민공화국도 세우고 총궐기를 세웠다. 그런 속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건국)을 했으나, 김일성은 남로당 구출을 명분으로 남침했다.
 
6.25전쟁은 큰 상처를 남겼다. 특히, 부족주의 정주민 심리가 강한 한국사회에서 종족끼리 서로 살상하는 문제가 나타났다. 민주정의당은 민족끼리는 착한데 수입품 공산이념이 작용했다고 논했다. 민주당은 꾸준히 수입품 이념은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했고, 토착이념이 공산이념에 지대하게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그런 의미로, 김일성을 민족반역자로 평한 민정당 민족주의에 맞서서, 리영희는 도리어 자유민주 취하는 영남 성향의 보수정부(민정당)이 민족(정확히 알고 난 이후에 바라본 ‘민족’개념은 공산민족 부족주의)에서 일탈했다고 논한다.
 
이승만 박정희의 반공정부의 오랑캐몰이에 대하여 그것을 복수하려는 의도로, 대한민국을 멸망시키겠다는 후천개벽 종교가 백낙청의 신앙이다. 백낙청의 후천개벽 신앙은 ‘분단극복’이란 의미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후천개벽 신앙으로 기존의 자유민주 대한민국을 격멸시키겠다는 진심을 은폐한 통정한 허위표시에 지나지 않는다. 80년대 후반에 대학에 입학했던 세대들은 다 안다. 그때, 유행했던 말은 헤겔의 ‘지양’(AUFHEBEN)을 원래 독일 철학 맥락에서 벗어나게 써서, 소멸시키겠다는 단일 의미로 썼다. 그 당시 본인 포함한 비운동권이 경계심을 갖자, 일반국민을 현혹하면서 동일한 의미를 내포한 말로 바꾼 것이 ‘극복’이다. 군대에서 ‘대한민국을 극복하다’는 말이, 결국 격멸시키다는 의미일 수 밖에 없다.
 
백낙청의 민중민족문학은 결국은 찢재명의 촛불과 개딸 현상으로 맺어진다. 일제시대 소련 지배영향권을 그리워하는 씨족적 단결과 연결된다. 그 속에서 비밀결사 은밀한 조직에서는, 현행의 실정법은 의미가 없다.
 
당시의 민정당 공안부서는 민족해방통일전선을 내란의 의미로 보았다. 그런데, 한 순간부터 북한공산당의 대남공작이 대남공작이 아니라, 세계화에서 빚어지는 국경의 넘나듬으로 해석하려 했고, 그렇게 북한의 수교국 영향권을 한국 대기업의 수출길로 쓰려했다.
 
일본식 성장 모델에 토대가 된 권위주의 정권의 재벌은, 백낙청 촛불 문단을 토대로 중공식 부동산 성장모델을 취했다.
 
군사정권 국가주의 성장 모델은 반대가 있어도 끝까지 최종순간 대가리가 깨질 때까지 우김의 시간이 있었다. 오늘 촛불 두목 백낙청의 아바타인 이재명의 연설이 있다. 아무런 내용이 없다. 이재명과 연결된 부족의 부족주의를 다양한 형태의 가치중립적 서양철학용어를 빌려서 쓴다. 결국, 중국식 성장 모델은 꾸준히 부족중앙의 금고를 지향하는 관료주의로 나타난다.
 
미국이 중공을 비판할 때 지속 불가능한 성장 모델이라 지칭했다.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공유지의 비극’으로서 숱한 공산당 관료들의 공유지로서 중앙정부 재정으로 나타난다. 그 재정이 파탄이 안 나려면, 무한대의 부채 버블 쳇바퀴가 멈추면 안된다. 그 버블 쳇바퀴가 멈추는 순간, 결국은 줄어드는 소득의 지평까지 위험이 분산된다.
 
한국의 부동산 정부 부양은 버블이 터진 이후 어떻게 국가개조를 할 것인가, 시간을 버는 데 생각해야지, 궁극적으로 막을 수 있다고 확신하면 안된다. 버블이 안터진다고 하면 결국은 촛불 두목 백낙청과 관련된 문인 사대부들의 세금 도둑질 목록으로 깔끔하게 털릴 것이다. 이리 도둑질되고 북한에 털리고 하느니, 버블 붕괴로 허공에 날리는 것이 사실은 정의 구현이다.
 
일제시대 소련공산당 영향권 분파에 드는 부족주의만으로 생각하고, 그 나머지를 칼로 무 자르듯이 배제하는 것이 백낙청의 민중민족주의다. 조갑제기자의 이들이 시민민주주의라는 주장은 완벽한 사기로 끝났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고의적 사기가 아니라, ‘집단 병신’에 가까운(사회에서 하는 말로 ‘기지도 못하는 데 나는 척’) 차원으로 다수 유권자를 속이는 줄도 모르고 속이는, 지식내용에 책임이 불가능한 문제일 것이다.
 
일제시대 소련 마을의 부족주의로(당연히, 친북적이고 친중적이고 친 소련적인) 이들끼리의 잘 먹고 잘 사는 세계는, 재정 집행의 상식성의 주장과 적확하게 충돌한다.
 
문제는 그렇다. 촛불 두목 백낙청은 우파 유권자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백낙청의 원조 아바타 문재인은 우파 국민기본권을 전부 팔아넘길 종전선언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 촛불 두목의 백낙청 문단의 지향점은 투명하다. 그런 이념을 확대하는 집단 조직이다.
 
여기에 도대체 조선일보는 왜 후원하나?
 
백낙청은 게오르크 루카치 사상에 기초한 소련 공산주의와 그 연장선 동구 리얼리즘을 주장하다가, 분단체제론으로 중공판 일국양제에 해당되는 한반도판 남북연합체에 촛불을 줄세우는 선전 선동의 문학으로 바뀌었다.
 
일반인이 알기에 영남 유교는 조선시대에 정치적 패배 여파로 은거하여 서원 교육을 강조하여, 인간본성 중심이고, 권력중심은 호남 유교의 관행이다. 국제사회에서는 자유민주진영이 인간본성을 살리는 법과 제도 중심이고, 푸틴과 시진핑이 권력중심의 사유를 보인다. 조갑제의 新羅도 냉정한 말로 이준석 종족주의자의, 조갑제 특유의 우파=호구라고 보는 관점이다. 사실, 新羅도 17-19세기의 영남지방 사대부와 연관된 씨족 습속을 기준으로 역순으로 과거를 희구하는 방식이 있다면, 친중좌파의 아버지 신채호 선생이 발견한 신라는 공산당군대의 진취성의 발견이다. 조갑제 기자의 이승만이 기독교인 이승만에 개벽신앙 코드로 덧입힌 ‘가짜 이승만’을 퍼뜨리듯, 조갑제의 新羅는 영남의 내용을 전라도 우월주의(권력지상주의)로 왜곡한 신라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개벽파 노인들이 문화를 전라도좌파로 친소련 친중 친북으로 기울게 조작을 한다.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의 원조는 1970년대부터 독일쿠데타 같은 사고를 보였다고, 그의 추종문인은 밝히고 있다. 조선일보 문화면은 조선일보 독자를 호구로 여기며, 고강도로 우파를 엽기적으로 이지메하는 문인들을 되도록 우파에 친숙하게 하는 움직임을 시도하고 있다.
 
정말로 밝히고 싶은 내용은 촛불 문단 백낙청 쫄다구들이 아는 내용이나, 백낙청 아바타 이재명이 생각하는 그 관점인 변형윤-박현채 학파의 경제는 지속 불가능하다. 특히, 국제사회가 권력충돌로 균열이 쉬운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없다는 전제로 북한공산당을 지렛대로 수출길 넓히자는 발상은 ‘한국 국민’의 전부를 담보잡은, 정통적인 호구잡는 정치경제학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벽파 노인들은 각 씨족별로 ‘한’을 내세우며, 아무도 1987년 6월에 한다고 약속한 서양법 및 그에 연결된 시장경제를 지키겠다는 약속은 안 지킨다.

조선일보 문화면 편집행태는 ‘원조 학폭’인 학생운동집단의 최종 두목을 비호하는 측면으로, 학폭 가해자 학부모 같은 행태다.
 
 
 
 

법치 시장경제 문화에 돈을 안 쓰고,

대한민국이 없었다는 전제로 체제전복의 조직확장 하세 하는 선동문학 문단을

지원하는 조선일보, 그 신문을 봐야 하는 우파 유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