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2일 조건없는 항복문서 서명.

 


 

무조건 항복문서에 서명한 일본인들은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미국의 처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독일처럼 분단 되지도, 철저한 전범 재판을 받지도, 

기술자와 과학자를 공공연히 납치 당하지도 않았다. 

중요한 영토를 많이 잃지도 않는다.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수 많은 일본여인들이

온 몸을 던져

천황가와 자신의 조국을

파멸의 구덩이에서 건져 올린 것이다.
물론

끊질긴 일본의 대미 로비와

전 후 곧바로 이어진 냉전이 큰 역할을 했다. 

미국은 제국 일본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48개국이 참가하여  서명한 강화조약,

Treaty of Peace with Japan

또는 San Francisco Peace Treaty 에 의해

일본은 1952년 4월 28일(조약 발효)에

명목상 미 군정기를 끝내고

패전국에서 다시 명목상 주권을 회복한다.

대한민국이 샌 프란시스코 조약의

초청 대상국이 아닌 이유가

분단문제(중공과 대만처럼, 초청대상을 하나로 특정할 수 없는 이유)로 인한 것이라고 하는 말하는 자들이 있다. 
참 개잦같은 소리도 가지가지 한다.
거짓말 하는, 거짓을 가르치는 것을

좀, 제발 부끄럽게 느껴라! 


영국은 일본에 부역한 조선을
전범국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을 잊지마라! 


특별히 조선을 혐오하는 것이 아닌,
전 후 자국의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한
일관되고 논리적인 외교적 표현이다.

====동북아 역사넷 자료======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edeah.d_0006_0010_0030_0010

 


이 조약
제14조 a항 2
일본의 국가와 기업 그리고 개인이 과거 해외에 가지고 있던 재산을 현지 국가에 제공함으로써 일종의 배상을 지불하도록 규정.
제4조
한국과 같이 전쟁 당사국이 아닌 국가에 대해서도 일본 재산을 처분을 통한 청구권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정.
제14조
일본이 전쟁 기간 피해를 끼친 연합국과 양국간 협정을 체결하여 배상하도록 규정.

 

이 규정에 따라
일본이 1950년대에 배상을 지불한 국가는
필리핀·베트남·버마·인도네시아 등 4개국으로
배상금은 총 3,643억 4880만 엔에 달한다.
그리고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양국간 협정을 통하여
일본이 연합국에 준하는 배상을 지불한 국가는
라오스·캄보디아·싱가포르·말레이시아·

미크로네시아·버마(추가) 등 6개국으로
총 605억 8000만 엔의 배상금을 지불했다.

한국의 경우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까닭에

일본으로부터 연합국에 준하는 배상은 받지 못했으나,

1965년에 체결된 청구권 협정을 통해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의 자금을 받았다.

회담 과정에서 한국정부는
배상적 성격을 강조했으며

협정 체결 후 한국 국민들에게 그러한 성격임을 홍보했다. 

반면에 일본정부는
어디까지나 ‘경제원조’ 내지는
‘독립축하금’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했으며
협정 체결 후 그렇게 자국민에게 설명했다. 

제16조
중립국과
일본의 동맹국에 있던
일본의 해외 재산 등을 통하여
일본이 연합국 포로에 대해 보상을 지불하도록 규정.
이와 관련해

일본은 1955년에 45억 엔을 국제적십자사에 지불했다.

=======끝======

 

대만(ROC)은

1952년 4월 28일 일본과 양자 조약(Treaty of Peace between the Republic of China and Japan)을 체결한다.
필리핀은

1956년 5월 양국 간에 배상 협정이 체결된 후

1956년 7월 16일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비준한다.

소련은

1956년 10월 19일 일본과 국교회복 공동선언을 한다.
인도네시아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대신 1958년 1월 20일

일본과 양자 배상 협정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대한민국은

1965년 6월 22일 배상문제를 종결 짓고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大韓民國-日本國間-基本關係-關-條約)을 맺어

관계(국교)를 설정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72년 9월 25일 국교를 맺는다.
북한은 2008년 기준 이르기까지

약 17 년 간 총 13회의 정부간 국교정상화 협상과

총2회의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배상문제로 미수교 상태이다.


양아치 거지인 북한이

드높은 주체사상으로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개소리는  하지마라!

좌빨들아!  무식은 자랑이 아니다! 

 


 

이상 자질구레한 혓바닥은 여기서 줄인다.

만약
누구와 친구가 되거나 적이 되어야 한다면,
어떤 관계든 맺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우선 상대방을 이해해야 한다.
이해는 곧 용납이나 수용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의 현실인식과
상황에 대한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복합적인 심적상태를 이해함으로서
적으로서, 또는 친구로서 
앞으로 관계를 맺어 나가는데 있어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자신을 이롭게 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상대가 자신을 증오한다는 사실이나 

그 이유를 모른다면 

얼마나 위험한가?

대일본 미국 측 참고자료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2-54v14p2/ch1?start=1

한반도의 6.25 전쟁에 연합국의 전비로
일본은 얼마나 부담했을까? 안궁금?
내고 싶어서 낸 것이 아니라서 무시?
연합군은 한국을 사랑해서 참전?
영원한 씹선비의 나라!
대한민국은 조선을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가가 건국한 나라인 까닭으로
일정기에 대해서는 공화국의 자유인으로서
무관함을 느끼지만,
한국전은 그것과 다르다. 

인간은 남을 속일 수는 있지만 

자신은 속이지 못한다. 

자부심은 부끄러움이나

꺼림칙한 속에서 자랄 수 없다. 

 


 

■요시다 독트린 - 회피와 비상

 

1950년 6월

존 포스트 덜레스(John Foster Dulles)가 방일하여, 

한국전쟁 중에  일본의 재무장을 통해

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을 회복하려 하자

그것을 회피하고자  만들어진 일본의 외교정책이다.


John Foster Dulles (left),

William Sebald(주일미대사),

head of *SCAP's diplomatic section, and
Yoshida Shigeru in Tokyo in spring 1951.
*SCAP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연합군최고사령관(連合国軍最高司令官)

(출처:https://apjjf.org)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吉田 茂, Yoshida Shigeru:1948~1954년 재임)

일본이 다시 세계 강대국이 되기 위해
한국전의 휘말리는 위험을 피하면서

동시에 빠른 경제 회복을 원했다. 

 

맥아더가 초안하고 수정을 거쳐

1947년 5월 3일에 시행한 헌법 9조의 제약을 이용하여

일본의 선택을 미국에게  설득한다.

우여곡절을 겪고 결국 맥아더가 중재한다.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요시다 독트린은

평화주의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일본이 국제관계에서 취한

현실주의 외교(the realist foreign policy)였다.


1960년대에 요시다의 뒤를 이은
이케다 하야토와 사토 에이사쿠 등
후속 정치인들에 의해 확립된
일본 외교 정책의 기준이 되는 접근법이다.


일본은 부담과 의심을 피하면서

산업 인프라 재구축을 시작,

무제한 경제성장에 리더쉽과 국가적 에너지를 쏟았다.

그 정치 방침은 1977년에 와서야

요시다 독트린(Yoshida doctrine)이라는 말로 정의되었다.

1. 냉전에 있어 공산주의에 대항하며 미국과의 동맹을 굳건히 한다.

     (일본의 안보)
2. 안전보장은 미국에 의존하며 자위력은 최소한도로 제한한다.

     (군비 및 지출 최소화)
3. 일본은 국제관계에 경제외교를 중시한다.
     (경제 성장 및 회복)

이런 요시다 독트린은
사실 다음의 후쿠다 독트린으로 자극받은
국제정치학적 레토릭에 지나지 않을 지 모른다.
어쨌던,
지난 시대를 발전적으로 수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는 시도이다. 

 


 

1977년에 후쿠다 다케오 총리가 

마닐라에서 동남아 외교 3원칙,

 '가슴과 가슴(heart-to-heart)'라는

"후쿠다 독트린"을 발표한다.

군사대국 포기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경제 원조 및  신뢰관계 구축을 통해

일본의 공적개발원조(ODA)가

동남아시아에 집중되고 민간투자도 확대한다.

 

일본은 과거처럼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며 무력침공이  아닌

평화로운 상호호혜의 방식으로

동남아로 시장(생산&소비)을 확대한 것이다.

일본의 경제성장은 액셀을 밟는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은 

엔고의 여세를 몰아

일본-동남아시아의 경제협력관계는 더욱 견고하게 된다. 

이런 관계는,

아시아 외환 위기 시기에

AMF(아시아통화기금) 설립시도로 이어지나

미국의 반대와 중국에 의해 좌절된다.

다시 98년 10월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대장상이 

300억 달러의 규모의 엔화 자금으로 

아시아 실물경제 회복을 돕는 '미야자와 구상'으로 이어진다.

뒈중이도 그 돈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영국에 이은 미국의 시대를 연,
브레텐우즈 체제의 일부로서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를 이해한다면

97년 9월말 홍콩에서 열린 G7-IMF 회의에서

아시아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일본이 제안한

AMF(Asian Monetary Fund )의

국제정치학적 의미를 이해하리라 본다. 


 

 

<참고>

중국 1980.04.17 IMF 가입 (대만축출)

https://www.joongang.co.kr/article/1534822#home

중공이 IMF로부터 대출 받을 수 있는 '쿼터'는

5억5천만 SDR (특별인출권)로

이는 6억9천3백만「달러」에 상당하는 규모다.

중공의 IMF가입은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에 의해 이루어졌다.

(1971년 10월 25일 제1967차 유엔 총회가 알바니아가 발의로 대만 UN 상임이사국 지위 박탈-축출, IMF는 지위 승계로 인해 중국 가입일은1945.12.27, 일본1952.8.29,대한민국 1955.8.26-WB가입과 동일)

 

기사와는 다르게(기레기?-무식?)
세계은행은
1980년 4월 16일 중국의 대표권을 대만(ROC)에서 
중공(PRC)로 변경했다. (대만축출)
따라서 중공의 World Bank 회원가입일은 1945.12.27일 이다. 
중공은 첫 차관을 1981년에 도입한다. 

(대한민국 1955.8.26, 일본 1952.8.13)




아시아 외환위기는 경제에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워싱턴 합의(Washington consensus)와

GATT체제의 WTO체제(95년)로의 전환,

미국의 아시아에서의 균형외교(견제외교:일본견제, 중국지원),

제국의 화폐로서 달러의 가치문제, 

소련 해체에 이어지는 미국의 패권 질서,

미국 국내 경제 - 무역 수지 문제등이 복잡하게 얽히는 문제이다. 

 

WTO체제 하에서 자신의 장점이 

최대한 발휘되는 상황을 조성하고 

세계 경제를 석권해가는 일본을 누르고 

아시아에서 그 맞상대를 키워야 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아시아 외환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또한 현재의 미ㆍ중 패권경쟁과  일본과 동아시아의 미래,

대한민국의 미래와도 무관하지 않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이다. 

 

 

위대한 혁명가가 투쟁을 통해 건국한 대한민국,

70여년 인내와 도전으로 이룬 자랑스런 발자취,

그 모든 것을 부정하며 

지금 현재에도 여전히 

구한말 조선씹선비 짓을 하고있다. 

거대한 역사의 전환기에

"안전과 번영"은 도전을 통해 얻는다. 

그리고,

이 전환기는

안보와 번영이 같은 길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