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塔)이란 이것저것 쌓아 올린 구조물을 말하는데, 석가탑, 다보탑처럼 절에 세우는 탑부터 에펠탑처럼 높이 솟은 마천루도 탑이라 불린다.
탑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인 스투파(stupa)인데,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구조물인 스투파가 중국을 거쳐 넘어오며 '탑파'라 불리다가 줄여서 그냥 '탑'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위와 같이 탑의 기원인 인도의 스투파는 거대한 봉분과 같이 흙을 쌓은 뒤 겉을 돌로 감싼 형태가 대부분으로, 이것이 중국에 넘어오며 탑의 원시적 형태인 토탑(土塔)이 되었다.
국내에서 토탑은 경주 능지탑, 의성 석탑리, 안동 학가산, 충주 부흥사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위 사진은 각각 의성 석탑리의 토탑과 능지탑이다. 그러나 능지탑지를 제외한 나머지 사례들의 경우 원래 토탑이었는지, 적석총과 같은 고분이 개조된 것인지 불분명하여 추후 조사가 더 필요하다.
이후 중국에서는 흔히 구할 수 있는 소재인 나무로 탑을 지었다. 이것이 한반도에도 전래되어 정릉사, 미륵사, 황룡사 등 삼국에서도 나무로 만든 탑, 즉 목탑(木塔)을 지었다. 그러나 수많은 전란으로 인해 한반도에 남은 목탑은 법주사 팔상전이 유일하다. 쌍봉사 대웅전 또한 3층목탑의 형태로 6.25까지 버텨내었으나 1970년대 실화로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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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탑이 국내에 전래된 이후 한반도에서 더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소재인 돌을 이용하여 탑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석탑(石塔)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석탑의 시초로 평가받는데,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양식이 그대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미륵사지석탑은 각 부재를 목재를 가공하듯 잘라 이어 만들었는데, 이것이 석탑 복원에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린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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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석탑은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2기만이 남아 있다. 이들 석탑의 특징은 옥개석이 굉장히 얇아 낙수면이 매우 완만하다는 점과 기단부가 비교적 작다는 특징이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미륵사지석탑보다는 좀 더 발전된 형태로 구체적 표현양식은 간소화되었지만 그것이 이 탑을 더욱 세련되어 보이게 한다.
한편, 나무보다는 벽돌을 구하기 쉬웠던 중국이 일부 지역에서는 벽돌을 이용한 전탑(塼塔)을 제작하였다. 이 전탑은 목탑을 본따 층마다 기와를 올렸으며 문도 만들어 탑 내부에 법당을 짓기도 했다.
위 사진 속 법흥사지 칠층전탑은 현존하는 최대 높이의 탑으로 그 높이가 17m에 달한다. 2층과 3층에서 남아있는 기왓장을 확인할 수 있으며 전면에는 감실도 파여 있다.
한반도에는 전탑을 만들기에 적합한 환경이 적어 총 4기의 전탑만이 남아있으며, 그 중 3기는 안동에 모여 있다. 위 사진의 전탑은 칠곡 송림사에 위치한 유일한 안동 외 지역의 전탑으로, 내부에서 녹색 유리병이 포함된 화려한 사리구가 나온 것으로 유명하다.
위와 같이 벽돌을 만들기 어려운 환경으로 인하여 신라에서는 당시 당(唐)과의 교류를 통하여 전탑을 약간 변형하여 들여온다. 위의 분황사 석탑은 신라 최초의 석탑으로,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 내어 쌓아올린 형태인데, 이런 탑을 벽돌(塼)을 모방(模)한 석탑이라 하여 모전석탑(模塼石塔)이라 한다.
분황사 석탑의 최초 건립연대는 선덕여왕조로, 본래 7층 혹은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대략 40~50m의 높이였을 것이라 한다.
대표적인 모전석탑인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이다. 이외에도 영양 봉감모전석탑,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 정암사 수마노탑 등이 유명하다.
삼국통일 직후인 7세기 말에는 모전석탑을 비롯해 여러 석탑 양식이 출현하였다.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은 이러한 과도기를 대표하는 탑으로, 장중하면서도 경쾌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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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 또한 이러한 과도기에 나타난 탑으로, 내륙 분지에 위치한 고선사탑과는 달리 감포 바다가 보이는 너른 땅에 자리잡아 좀 더 경쾌하고 명확한 것이 특징이다.
이 감은사탑은 경주 내에 위치한 석탑 중 가장 거대한 규모이며, 쌍탑일금당 배치의 시원이라는 데에도 의미가 있다.
이러한 과도기를 깨고 나타난 것이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이다. 8세기 중반 제작된 석가탑은 치솟는 듯한 경쾌함과 이상적인 비례미를 지녔으며, 이는 후대의 탑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위의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의 예에서 보이듯 석가탑은 후대의 석탑 계보에 있어 표준모델과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한편, 통일신라 말기는 중앙정치의 붕괴로 호족들이 득세하고 있었는데, 이 즈음 들어온 선종사상과 맞물려 기존의 비례와는 동떨어지는 다소 독특한 형태의 탑이 생겨나는데, 이를 이형탑(異形塔)이라 부른다.
위 다보탑은 대표적인 이형탑으로, 호족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나 기존의 삼층석탑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양상이다.






충주 탑평리에 있는 탑평리 칠층석탑
유난히 높고 웅장하다
가장 흔히 보이는 이형탑으로는 몸체에 무언가를 새기는 경우가 있다. 주로 사천왕, 팔부중, 십이지신, 인왕 등을 새기는데, 그중에서도 상층기단에 팔부중상을 새기는 경우가 매우 많다.
위의 영양 화천리 삼층석탑은 사천왕, 팔부중, 십이지신을 각각 초층탑신, 상층기단, 하층기단에 조각한 경우다.
극단적인 예로는 위의 남원 백장암 삼층석탑이 있다. 기단부는 아예 생략했으며, 전 층에 보살, 신장, 천인을 비롯하여 수많은 조각을 새겼고, 심지어 옥개석 하단에도 층급받침을 대신하여 연화문과 삼존상이 새겨져 있다.
또 다른 경우로는 기단부의 변형이 있다. 철원 도피안사 삼층석탑의 경우 기단부가 팔각대좌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경주 석굴암 삼층석탑은 기단부가 원형(圓形)이다.
또 다른 이형석탑으로는 청석탑이 있다. 청석탑은 점판암으로 만들어진 탑인데, 작은 여러개의 층을 만들었으며, 합천 해인사 원당암의 청석탑이 그 시초로 여겨진다. 위의 김제 금산사 육각다층석탑 또한 청석탑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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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석탑 또한 대표적인 이형석탑이다.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左)은 상층기단에 4구의 사자상과 1구의 승려상을 배치했으며,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右) 또한 상층기단에 4구의 사자상을 배치했다. 화엄사의 사자석탑은 앞의 석등 또한 간주석 대신 승려상을 삽입하였는데, 일설에 의하면 사자석탑의 승려상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의 어머니이며, 앞의 석등을 지고 차를 공양하는 이가 바로 연기조사로 그의 효성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들 이외에도 주목할 만한 독특한 이형탑들이 있다.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의 경우 초층만 매우 거대하게 만들었다.
한편, 지방 호족의 득세로 지역색을 드러내는 탑 또한 여럿 생겼다. 대표적으로 옛 백제 지방의 탑들이 있는데,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 서천 비인오층석탑,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 등이 있다. 이들 석탑은 과거 그지역을 지배하던 백제 석탑을 계승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동해안 지역 탑들의 층급받침, 문경지역의 단층기단 양식 등도 이러한 지역색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호족 기반 세력으로 성장한 고려의 탑은 완벽한 균형미를 추구하던 신라의 탑들과는 달리 비례미는 떨어지지만 개성 있는 다양한 탑들이 양산되었다.
위 사진의 남계원지 칠층석탑은 신라의 비례미를 일부 계승하면서도 층수를 높여 웅장함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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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각다층석탑은 이러한 확장된 탑파 양식의 일환이다. 고려시대의 다각다층석탑으로는 향산 보현사의 팔각십삼층석탑, 평창 월정사의 팔각구층석탑, 남양주 수종사의 팔각오층석탑, 남양주 묘적사의 팔각칠층석탑이 있다.
강원도 지역에서는 팔각석탑과 함께 석탑에 무릎을꿇고 예를 갖추는듯한 석조보살좌상도 쌍으로 조성되기도 한다.
이런 이 석탑들은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발견되는데 지금은 현전하지않지만 고구려 석탑에서 계승된것으로 추측된다.
고려는 요, 금, 원 등의 잦은 공격으로 인하여 피해가 컸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문화가 교류되며 독특한 탑이 세워졌다.
위 사진은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의 상륜부로, 원으로부터 유입된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또한 라마교의 영향을 받았는데, 亞자형 평면은 당시 라마교에서 유행하던 것이다. 이 탑은 층마다 다양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4층까지의 조각은 부처의 불회 장면을 그렸다. 기단부에는 서유기의 장면을 새겼다.
조선 초기의 불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크게 융성하지 못했으나, 태조, 세조, 문정왕후 등은 숭불 정책을 펼치기도 하여 간혹 매우 뛰어난 작품들을 찾아볼 수 있다. 평창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은 세조가 온정리온천을 다녀오며 제작한 것으로 복장으로 세조의 옷이 나오기도 했다.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또한 세조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는데,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완전히 본따 만들었다.
조선시대에도 독특한 탑이 여럿 지어졌다.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 성종조 제작되었다.
그러나 대개의 조선 집권층은 불교와 적대적이었기에 탑의 발전 또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탑들은 대부분 이전 시대의 그것들을 모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위의 함양 벽송사 삼층석탑은 또한 전형적인 신라시대 탑을 모방한 것이다.
조선 후기 양란과 기근을 거치며 민중의 불교에 대한 믿음이 다시 커지며 불상과 불화, 사찰건축에 있어서는 상당한 발전이 있었으나 탑에 있어서는 별다른 진보를 보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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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부처의 진신사리는 그 수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부처의 사리를 직접 모시지 못한 경우에는 불경으로 대체하거나(법신사리), 구슬과 같이 사리와 생김새가 비슷한 보석으로 대체한(불신사리)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실제로 진신사리를 모신 경우에는 계단(戒壇)을 특별히 만들어 모시고 적멸보궁(寂滅寶宮)에서 참배토록 하였는데, 이 때에는 금강계단에 이미 부처를 모셨기 때문에 적멸보궁 내부에는 불상을 따로 두지 않고 금판이나 유리를 대었다.
국내에는 자장율사가 선덕여왕조에 모셔 온 진신사리를 5개 사찰에 나누어 안치했는데, 월정사, 흥녕사, 봉정암, 정암사, 통도사가 바로 그곳이다. 위 사진과 같이 통도사에는 금강계단을 설치하여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외에도 김제 금산사, 달성 용연사, 완주 안심사 등에 계단 구조물이 남아 있고 봉정암에는 특이하게 설악산이 내려다보이는 암반위에 기단없이 그대로 사리탑을 지어 봉안하였다.
승탑이란 불탑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것과 달리 승려의 사리를 안치하는 곳으로, 이 승탑의 탄생은 선종과 큰 관련이 있다.
선종이란 기존의 교종과 달리 불심이 깊은 이라면 누구나 참선을 통하여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교의 종파로, 그 창시자는 달마다. 선종을 처음 국내에 들여온 사람은 도의선사로, 선종 중에서도 6조 혜능을 따르던 남종선을 들여왔다.
선종에서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기에 부처의 사리만을 모시던 장치였던 기존의 탑과 달리 승려의 사리도 탑에 안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도 한반도 최초의 승탑의 주인은 도의선사가 되었다.
도의선사탑으로 추정되는 양양 진전사지 승탑은 기단부의 형태는 기존 불탑을 따르되 탑신은 팔각의 형태로 차별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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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선사탑의 이러한 출발은 이후 몇 세기간 승탑 양식의 방향점을 제시하였다. 도의선사의 제자인 염거화상의 탑은 이러한 승탑의 형식, 즉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승탑에 있어 그 규범이 된다.
원주 흥법사지에 있었다고 전하는 염거화상탑은 불탑과 같이 기단, 탑신, 상륜부로 나뉘나, 각각의 형태는 불탑과 크게 차이가 있다. 기단은 지대석과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이루어졌으며 상대석에는 앙련을 새겼고, 탑신석에는 사천왕을, 옥개석에는 기왓골을 새겼다. 상륜부는 불탑의 그것을 간략히 한 모습이다.
염거화상탑은 844년 세워졌는데, 탑 내에서 동판 염거화상 탑지가 발견되어 이러한 구체적 연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문화재에 있어 기록의 존재는 타 유물들의 제작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척도가 되기에 굉장히 중요하다.
이러한 승탑의 구성은 고려시대까지 주류가 되었다. 위 사진의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은 대표적인 통일신라의 승탑으로, 염거화상의 예를 따르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구체적 표현에 있어서는 더욱 발전된 양상을 보인다.
도의선사가 선종을 들여온 이래 구산선문이라 하여 선종은 9개 종파로 갈라졌다. 염거화상의 제자인 보조선사 체징이 개창한 가지산문을 비롯하여 동리산문, 실상산문, 봉림산문, 희양산문, 성주산문, 사굴산문, 사자산문, 수미산문이 바로 그것이다.
구산선문의 개창조 이래 그 제자들이 법맥을 잇는 형태로 각 종파를 이어나갔기에 승탑의 생김이 서로 유사하다. 위 사진에서 보이듯 곡성 태안사의 동리산문 개창조 적인선사 혜철의 탑(左)과 2대조 광자대사 윤다(右)의 형태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아래의 여러 사례를 통해 자세히 알아보자.
구례 연곡사의 동승탑(左)와 북승탑(右)은 사진으로는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았다. 북승탑이 동승탑에 비해 조각이 다소 깔끔하지 못하지만, 크게 영향을 받았음은 분명하다. 단, 이 두 탑은 그 주인을 알 수 없는데, 이 정도 수준의 승탑이라면 상당한 명망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지증대사는 희양산문을 개창하여 봉암사를 세운 승려로, 881년 왕사가 되었으며 882년 입적했다. 그의 탑비는 고운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 중 하나인데, 그 글씨는 83세의 분황사 승려 혜강이 쓰고 새겼다.
봉암사는 이후 견훤의 공격으로 폐해졌다가 지증의 제자 정진대사에 의해 재건되었다. 이 지증대사와 정진대사의 탑과 비가 모두 봉암사에 있다.
위 사진에서 지증대사탑(左)는 큰 옥개석과 중대석에 새긴 여러 조각이 특징이다. 정진대사탑(右)는 지증대사탑을 모방하였지만 비교적으로 둔중한 감이 없지 않으나, 능선 위에 자리잡고 있어 오히려 경쾌하다.
여주 고달선원은 8세기에 세워져 봉림산문의 승려들이 상주하여 고려시대에 번창하였다. 이곳에는 뛰어난 2기의 승탑이 있는데, 여주 고달사지 승탑(左)은 큼지막한 거북과 그 주변을 감싸도는 용이 특징이다. 이 탑의 주인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봉림산문의 개창조 원감대사 현욱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쪽 골짜기에 자리잡은 3대조 원종대사의 탑은 이 고달사지승탑을 모방했으나, 표현에 있어서는 다소 부족해 보인다.
이외에도 고려시대에는 여러 뛰어난 승탑들이 만들어졌는데,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은 그 정점에 있다. 이 탑은 기존 팔각원당형의 구조에서 벗어난 사각의 형태로, 넓은 지대석 위에 7단의 기단을 얹고 장막을 친 듯한 장식을 하였으며, 옥개에는 각종 불보살과 가릉빈가, 봉황 등을 조각했다.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은 독특하게도 탑신이 거대한 구를 가로세로로 묶은 모양을 하고 있다. 옥개는 마치 삿갓과 같은 형태이며, 지붕돌 아래에는 비천상을 새겼다. 지광국사탑과 달리 이 탑은 매우 정제되고 깔끔한 모습이다.
불국사 사리탑은 석등 형태의 승탑으로, 석등의 화창 대신 여래와 보살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12각이다.
이렇듯 고려시대에는 불탑과 같이 다양한 승탑이 시도되었다.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은 일반적인 불탑의 형태를 한 승탑이다. 석탑의 형식을 취한 승탑은 신라시대 원광법사탑이 있으나 확실치 않고, 이후 조선시대에 일부 등장한다. 나옹화상으로도 불리는 보제존자의 탑은 회암사, 신륵사 등지에 있는데, 그 중 신륵사의 보제존자탑은 승탑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위 사진의 신륵사 보제존자석종은 대표적인 석종형 승탑으로, 말 그대로 종 모양의 부도를 말한다. 보제존자석종은 굉장히 화려한 대리석제 석등과 이와 대비되는 간결한 석종은 석종형 부도의 본격적 출발을 선포한다.
사실 석종형부도의 시초는 울산 태화사지 석종이다. 통일신라 말기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태화사지 석종은 전면에 감실을 팠으며 십이지신을 조각했다. 이후 보제존자석종으로 그 형태가 굳혀진 이후 조선시대에는 석종형 승탑과 팔각원당형 승탑이 공존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승려들은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팔각원당형의 구도를 유지하면서도 이전보다 입체적인 형태를 하였으며 탑신이 구형에 가까워지는 양상이 나타나는데, 이 과도기의 대표적 승탑이 충주 청룡사지의 보각국사탑이다.
1394년 완성된 보각국사탑은 기본적으로 팔각원당형의 구도를 유지하고 있으나, 곳곳에 양감을 드러내는 조각이 나타난다. 탑신석의 모서리에는 기둥을 휘감아오르는 용을 조각했으며 면마다 신장상을 두드러지게 새겼고, 옥개의 모서리에는 용두를 표현했다.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다. 무학대사탑은 보각국사탑과 달리 탑신에서 각이 나타나지 않으며, 대신 운룡이 굽이치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탑을 둘러싼 돌난간은 이전에 없던 독특한 것이다.
같은 회암사지 경내 위치한 지공선사의 부도는 더욱 구형에 가까워진 모습을 보인다. 인도 출신 승려인 지공은 나옹 등 당대 승려들의 스승과도 같았는데, 이러한 명성에 비해 상당히 절제된 형태를 취하도 있다.
조선 초기에는 태종과 같이 불교에 매우 적대적인 임금도 있었으나, 태조, 세조, 예종, 성종, 문정왕후, 효령대군 등 불교에 있어 친화적인 왕실 인물도 다수 있어 왕실 주도의 불사도 여러 차례 있었다. 위 사진의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 또한 왕실에서 발원한 사리탑으로, 구형부도의 형태를 따르지만 실제로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였다. 이와 같이 승탑형 진신사리탑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으며, 앞서 언급한 금강계단 또한 석종형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광해군은 자신의 생모 공빈 김씨의 묘(당시에는 성릉으로 추숭되었다)와 인접한 봉인사 부도암에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진신사리탑을 세웠다. 이 탑은 위의 무학대사탑과 상당히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
조선 중기 양난을 거치며 승병들의 활약으로 승려의 입지가 약진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대표적인 승병장이었던 서산대사의 탑은 해남 대흥사에 위치하는데, 팔각원당형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다소 독특한 승탑이 세워졌다. 장성 백양사의 소요대사탑은 범종을 완벽히 본뜬 듯한 형태를 하고 있다. 유곽과 용통 등 한반도 범종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데, 고흥 능가사 등지에서 이러한 모습의 승탑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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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는 마애부도라 하여 자연암반을 깎아 감실을 파 사리를 안치하는 형태의 부도가 나타난다. 감실은 사리를 안치한 뒤 막았으나 훼손이 쉬워 원형이 남아있는 경우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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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탑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방방곡곡에 탑이 정말 많아서 그만큼 소개할 것도 많았음. 글이 좀 많이 길었지만 끝까지 읽어 주었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