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다가오자 우리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매일 같이 미국 비행기가 부산항을 공습하였는데 부산에 공습경보가 울리면 대구에도 연이어 공습경보가 울려 퍼졌다. 미군기는 부산항에 있는 선박만을 공격하고 돌아갈 뿐 대구까지는 오지 않았고 일본에서 폭격할 때와는 달리 조선에서는 민간 주택을 공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습경보가 내려지면 우리는 방의 불을 끄든가 두꺼운 커튼으로 창문을 가려야 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둘째 아들 대유가 태어났다. 산모가 있는 방이라 전등을 켜도 두꺼운 커튼을 치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 해의 여름은 지독하게 더워 온 가족이 땀띠로 온몸을 뒤집어 쓸 지경이었다.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이런 고통은 계속되었다.

대유는 나중에 7세가 되어 1.4후퇴로 부산으로 피난 가 있을 때 어이없이 풍토병에 걸려 속절없이 잃고 말았다. 그는 출산 때에도 이처럼 평탄하지가 않았다. 그 해의 대구의 더위는 필리핀을 다녀 온 일본의 종군작가 말을 빌리면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와 같았다고 하였다.

8월 중순이 되자 내무부장 구라시마가 정보위의 식당원들에게 일본의 항복을 미리 알려 주었다.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이 8월 15일 정오에 있으리라는 것까지 알려 주었다. 그런데 마침 8월 15일 아침에 나의 대학 1년 후배인 김대훈 군이 도청으로 나를 찾아왔다. 김대우 지사에게 부탁하여 직장을 구하러 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