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위. 에디트 피아프
(1915~1963)



"아뇨 전혀요, 아뇨,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나의 삶, 나의 기쁨은 바로 오늘 당신과 함께 시작될테니"


선정 이유 : 위대한 음악인

프랑스의 대중음악 장르인 샹송의 여왕이자 프랑스의 국민가수

그리고 프랑스의 대중가요 역사상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심지어 2차 대전이후 가장 최고의 가수로 온 국민에게 평가 받는 가수이기도 하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진 가수인데




rtg.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프랑스의 국민배우 마리옹 꼬띠아르

마리옹 꼬띠아르가 그녀의 생애를 연기하며 꽤 알려졌고

전세계에 그녀의 음악을 각인 시킨 계기가 또 한차례 찾아오는데...






그야 말로 전세계인이 가장 잘 아는 프랑스 노래


뭐 이전부터 유명했고. 프랑스의 국민 애창곡인 

'Non, Je ne Regrette Rien'(아뇨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명작 인셉션에 수록되며 그야말로 전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다만 일생은 불행했다고 할 수 있는데, 어머니는 그녀를 낳자마자 떠나고, 아버지는 방랑 서커스단원이었다

다만 아버지는 그녀를 포주 였던 그의 어머니, 즉 에디트의 할머니에게 맡기고

너무나 열악한 환경이었기에 키가 142cm에 불과했다고 한다

심지어 돈이 떨어지면 매춘으로 돈을 벌 수 밖에 없었지만, 그녀는 그럴 떄마다 서커스에서 노래를 불렀고

가창력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고

클럽 드 제르니의 대표 루이 루플레에게 스카우트 당한다






그녀의 또 다른 명곡이자 한국에도 잘 알려진 La vie en rose(장미빛 인생)


그러나 루이가 살해당하며 관련인이었던 에디트는 유치창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다행히 진범이 잡혀 그녀는 풀려났지만 첫 아이인 딸 마르셸이 뇌수막염으로 2살의 나이로 죽는다

다만 클럽 드 제르니에서 부른 노래 덕분에 꽤 많은 명성을 얻은 그녀는 노래로 자립할 수 있게되었다

하지만 네번의 교통사고, 일생의 사랑이었던 전설적인 복싱선수 마르셸 제르당을 비행기 사고로 떠나보냈는데

그때 마르셸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가 포르투갈의 아조레스 제도에서 변을 당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관절염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다량의 알콜과 약물을 남용했고 건강이 급속도로 안좋아졌고

1963년에는 무려 30kg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말년에는 그녀보다 13살 연하인 그리스 가수 테오 샤라포와 연인관계가 되었는데

그녀가 700만 루블의 빛이 있었음에도 테오는 그녀를 사랑했고 1962년 에디트는 처음으로 결혼한다

그러나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1년 뒤인 1963년 그녀는 프랑스 남동부인 그라스에서

남편과 시간을 보내다 급성 간부전으로 인한 동맥류로 47세의 젊은 나이, 드디어 행복해 질 수 있는 찰나에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그녀의 노래는 자신의 비극적인 삶의 반영이었고, 그녀의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는

당대 수많은 프랑스인들과 유튜브를 통해 현재의 세계인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인 가수들은 무조건 에디트의 노래를 한 번쯤은 무대에서 부른다고 한다




9위. 자크이브 쿠스토
(1910~1997)


Cousteau-1200x900.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한번 주문을 걸면 바다는 영원한 경이로움의 그물에 사람을 가두게 된다"


선정 이유 : 위대한 해양 탐험가, 환경운동가

만약 스킨스쿠버를 전문적으로 배우거나 배워본다면 무조건 그 이름을 듣게 되는 인물로

스쿠버 다이빙 장비의 창시자이자 스쿠버 다이빙 기술을 창시한 해양 탐험계의 대부이다

의외로 태어난 것은 보르도지만 자란 곳은 미국 뉴욕이라 영어에 매우 능숙하며 발음마저 거의 미국인에 그것일 정도다

영화를 좋아했지만 탐험도 좋아했기에 그는 20살에 프랑스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세계 일주를 떠난다

이떄 중화민국, 소련, 일본, 그리고 일본령 조선까지 방문했다고 한다(아마 진해 기지 일듯)

또한 이 시기에 잠수에 관심을 가져 오래 잠수할 수 있는 잠수 장비를 연구했는데

프랑스 가스공사에서 일했던 그의 장인의 도움으로 가스 기술자 에밀 가냥을 만나

최초의 스쿠버 장비인 아쿠아렁을 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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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 탐사의 큰 획을 그은 그의 배, 칼립소 호

다만 아쿠아렁이 개발되었을 쯤에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상태인데

원래 장교였던 쿠스토는 당연히 실업자가 되었고, 그 남는 시간에 얼싸좋구나 하며 아쿠아렁을 개발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내부에 있었기에 전후 나치 부역자 혐의를 받는데, 무죄로 판정난다

근데 형인 피에르 쿠스토는 진짜 부역 혐의가 밝혀져 사형당한다(...)

쿠스토는 다시 해군에 복귀했지만 3년만에 때려치고 탐험가의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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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호가 탐사한 지역들

그는 1950년 퇴직금으로 칼립소 호를 구매하여 해양탐사를 시작했는데 이때 자기가 개발한 아쿠아렁을 이용해

장비를 시험하고 취미였던 영화를 접목시켜 최초의 해양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한다

그리고 지중해나 카리브해에서 보물선을 인양하고, 정부의 의뢰로 송유관이나 해저 유전을 찾기도 했다

뭐 암튼 그가 찍은 해저촬영 다큐멘터리 영화 침묵의 세계는 굉장한 호평을 받아

9회 칸 영화제에서 무려 황금 종려상(!!!)을, 1957년에는 29회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 상을 수상한다

이러한 명성으로 그는 1960년 타임지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고

후원금으로 받은 돈으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곳인 마리아나 해구를 탐사할 잠수정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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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에서 미래형 해저주택을 시험 중인 쿠스토와 대원들, 참고로 냉방장치가 없어서 정말 더웠다고...

심지어 그는 인구 증가와 환경 파괴로 인류는 해저에서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굉장히 선구적인 실험인 해저 주택 실험인 프레콩티앙 실험에 도전한다

1차에서는 수심 120m에서 2명이 일주일간 생활했고, 2차실험과 위짤의 3차 실험까지 성공하게 된다

뭐 당연히 시간도 널널하겠다 또 이를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찍은 쿠스토는

1964년 해저주택 다큐멘터리인 태양이 비치지 않는 세계로 3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두번째 상을 받는다

뭐 당연히 해양에 있어서 거는 최고의 권위자가 되었고 해양 환경 문제로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거나

핵폐기물을 지중해에 갖다버리는 프랑스 정부를 강력하게 비난하며 시위를 하기도 했다

뭐 프랑스 정부는 이러한 움직임을 꼴보기 싫어했고, 무형의 압력에 시달린 쿠스토는

제 2의 고향인 미국에서 활동하는데, 뭐 이양반은 그냥 영어를 프랑스어만큼 잘했다고 하니...

여기서도 많은 활동으로 많은 미국인들에게 해양 탐험과 해양 환경에 대해 알린다

심지어 80년대에는 다시 프랑스에서도 복권되어 프랑스 대통령 출마 권유까지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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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에 남극 탐험을 하는 쿠스토


그러나 아들과 아내를 떠나보내며 그는 더 극한지인 남극 탐험을 시작했고

거기서 36살 연하(!!!!)의 프랑신 프리들레와 재혼한다. 참고로 프랑신은 아들보다도 나이가 더 어렸다

그는 실시간으로 남극의 빙하가 줄어드는 것을 목격하고 제기한 첫번째 인물 중 하나이며

남극 보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발 반대를 외쳤다

그러나 1996년 그의 분신과도 같은 칼립소호가 침몰하고, 이듬해인 1997년 87세의 나이로 쿠스토는 사망했다

그 때 그의 손에는 그가 평생 쓰고 다닌 빨간색 비니(위짤의 그거 맞다)가 쥐어져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굉장히 윾쾌한 인물이었던지 최초의 스쿠버 다이빙 책자인 침묵의 세계에서

다이빙 해볼때 겪을 수 있는 모든 문제들과 자신이 한 뻘짓들을 다 기록해놓았다

만약 신혼여행이나 제주도에서 다이빙할 일 있으면 쿠스토에게 감사를 표하고 물 속에 들어가자




8위. 몰리에르
(1622~1673)


Molière_-_Nicolas_Mignard_(1658).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저의 희망, 저의 행복, 저의 마음의 평화, 이 모든게 당신 속에 있으며 또한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선정 이유 : 위대한 극작가

서양 문학사를 공부해 보았다면 희국 타르튀프를 본 기억이 날 수도 있다

그 타르튀프의 작가이며 프랑스가 가장 사랑하고 프랑스 희극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희극 작가이다

거기에 연극에도 매우 능통해 그의 희극은 당대의 코빅 같이 사람들이 항상 기대하고 보고 싶은 무대였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글쓰는 솜씨가 남달랐지만 아버지는 먹고 살려면 법률이나 배워라라고 해서

오를레앙 대학에서 법학 학위를 따지만 연상의 여배우 마들렌 베자르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해서

연극계에 투신한다. 다만 12년간은 여러 순회공연에서 실패하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지만

이 고난에서 그는 비극보다는 오히려 희극에서 그 특성을 발휘했다

그는 고대 로마 희극을 보며 배웠고, 직접 배우로도 활동했으며

나중에는 사랑의 유한이라는 희극으로 작가 겸 극단장 겸 배우로서 명성을 얻는다

심지어 얼마나 명성이 컸는지 프랑스의 왕인 루이 14세 앞에서까지 공연함으로써 파리 극단계에 데뷔했고

루이 14는 가발이 떨어질 정도로 ㅈㄴ 웃었다고 한다




124263464E7ABBC60B.pn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참고로 불륜, 삼각관계, 기억상실 등 온갖 막장 드라마 요소가 몰리에르의 희극에서 나왔다


이 성공으로 그는 왕립 극단 소속이 되는 영광을 얻고

팔레 루이얄 극장에 정착하지만 다른 왕립극단들인 그를 너무 서민적이고 리얼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당대 막장이던 귀족계를 신랄하게 풍자하던 몰리에르는 응 ㅈ까쇼를 외치며

아내들의 학교, 타르튀프등 종교계와 사교계를 동시에 까버리며 풍자하는 용자짓을 했고

심지어 당대의 외설 중의 외설이자 어떻게 이런 작품이 왕립 극단에서 상영 하냐고 할 정도의 작품인 돈 주앙을

만들면서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성공가도를 달리던 도중인 1673년, 상상병 환자라는 극을 상영하던 도중

몰리에르는 무대 위에 각혈을 하며 쓰러졌고, 결국 그날 밤에 사망한다

참고로 그가 신랄하게 종교계을 비판했기에 파리의 가톨릭 성직자들은 그의 조병성사도 해주지 않고

새꺄 그리스도의 천벌이닼ㅋㅋ라는 반응이었지만, 무대위에서의 마지막 모습은

그를 전설로 만들었고, 그동안 형식적이었던 연극을 리얼하게 바꾸었으며

인간을 믿고 관용을 역설하며 위선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던 그의 작품들은 현재까지도 많은 프랑스인들에게 읽혀지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7위. 앙드레 부르빌
(1917~1970)


Bourvil-Andre-Raimbourg-de-son-vrai-nom-s-est-eteint-il-y-a-tout-juste-50-ans.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지"


선정 이유 : 위대한 배우

한국인들은 이 아재가 뉘쇼? 라고 물을 수 있지만

부르빌은 프랑스가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 였던 20세기 중반에

특유의 개그 센스와 노래로 암울했던 프랑스인들에게 웃을 수 있는 희망을 준 전설적인 코미디 배우다

약간 연배가 있는 펨코 아재들은 파리 대탈출이라는 영화를 본 기억이 있을 수도 있는데



Screenshot_2021-02-07_at_10.40.51.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포스터만 봐도 범상치 않다...

거기서 부르빌은 또다른 전설적인 배우인 루이 드 푸네스와 함께

슬랩스틱부터 만담까지 코미디로 보여줄 수 있는 건 모조리 보여주었고

마지막 감동까지도 주는 코미디 영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4.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참고로 1966년작이다. ㄹㅇ 마약빨고 만든듯


뭐 암튼 그가 타계한지 35년이 지난 2005년에도 이 투표에서 7위나 오른 것을 보면

아직도 많은 프랑스인들은 그를 추억하며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 그리고 프랑스 영화학교에서 코미디 장르를 만들려면 무조건 부르빌의 영화를 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6위. 빅토르 위고
(1802~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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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무서운 건 진정으로 살지 못한 것이지"
-레미제라블-

선정 이유 : 위대한 작가

프랑스 역사상 최고의 작가 중 하나이자 대문호으로 불리는 몇 없는 작가

또한 서양 문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샤토브리앙 이후로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불린다

그의 작품세계는 그의 집안에서부터 영향을 주기 시작했는데

아버지는 나폴레옹을 숭배하던 군인이었고, 어머니는 왕당파 집안의 여인이었다. 

그러기에 빅토르 위고는 혁명과 봉건이라는 두 체제에 대한 고민을 어렸을 때부터 시작했고

이는 훗날 그의 걸작 레미제라블의 마리우스를 통해 이를 투영한다

의외로 젊은 시절에는 왕당파적, 가톨릭 색체가 농후한 작품들을 주로 발표했고

이후에는 낭만주의 문학의 초석을 닦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며 낭만주의 문학계의 수령으로 등극한다

또한 몰리에르의 작품을 보고 나서부터 희곡도 가끔 썻는데, 그야말로 대호평이 났고

그의 희곡들은 삼일치의 법칙(행위, 시간, 장소의 통일)을 과감히 깨뜨리는 파격적인 형식을 사용했고

대호평과 야유가 공존했지만, 역시 노이즈마케팅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명성은 더욱이 올라간다


여기서 낭만주의와 소설가로서 가장 큰 명성을 얻게 해준 파리의 노트르담이 발표되고

젊은 나이에도 그는 대문호급의 평가를 받았다

또한 얼굴도 꽤 잘생긴 문학청년이었기에 그의 일생 내내 여자가 끊이지 않았고

1841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정식 회원으로 선출되는 영광까지 누린다

그러나 1843년 제일 사랑했던 딸인 레오폴딘이 익사하고, 여배우 레오니당트와의

간통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는 비극을 겪는다

이후 그는 모든 대외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한 채 단 하나의 작품에 몰두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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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필생의 대작이자 프랑스 문학의 걸작으로 불리는 레미제라블이다
(다만 이 시기에 집필을 시작한 거지 출판은 후술하겠지만 조금 나중이다)

아마 이 시기부터 빅토르 위고는 이전의 가톨릭, 왕당파적 색채가 아닌

인간 본질에 대해 고뇌했으며, 위보다는 밑의 빈민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심지어 정치성향 또한 철저히 권위를 부정하고 민중에 의한 정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1948년 2월 혁명 때 반동 정치를 펼치던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의 조카)을 비판하다가 나폴레옹이

쿠테타로 제정을 선포하자 반정부 인사로 찍혀 벨기에로 망명한다

그러나 벨기에에서도 프랑스 전제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쓰던 위고는 벨기에서 조차도 추방되어

프랑스와 가까운 영국령 채널 제도로 향하는데, 여기에 부인과 자녀 그리고 애인 쥘리에트(?????)도 따라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대문호의 위치를 가진 위고였기에 나폴레옹 3세(루이 나폴레옹)은 사면령을 내리지만

위고는 거부하고 망명지에 남아 고독한 심정을 창작으로 승화시킨다

그리고 망명지에서 위고의 시집 중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징벌, 명상시집, 세기의 전설

그리고 17년 째 집필하던 세기의 걸작 레미제라블의 출판이 이 때 이뤄진다




IE002401231_STD.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그의 관이 들어오는 파리의 개선문, 개선문 밑에 관이 지난 단 두명의 사람 중 하나다

그러던 와중 1870년 보불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의 2 제정이 실각하자

바로 기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했는데, 역에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얼마나 인기가 있었던지 국회의원까지 당선되는데 개판인 현실에 실망해서 의원직을 포기한다

게다가 얼마 뒤 터진 사회주의 계열 파리 코뮌이 파리를 장악하고 분쇄되는 과정에서

위고는 동조는 안했지만 가담자의 가혹한 처벌만은 하지 말자고 했지만 이 때문에 동조자로 오해받아

다시 망명을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다시 말년의 대표작인 93년을 저술했고

또 다시 복권되어 프랑스로 돌아온다

 1881년 2월 26일, 그의 80세 생일이 찾아오고 프랑스 정부는 그의 생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며 경의를 표했고

수많은 군중들이 그의 집으로 찾아와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이미 한번 뇌출혈로 쓰러진 경험이 있기에

위고는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8월 31에 유언장을 쓴다


"“신과 영혼, 책임감. 이 세 가지 사상만 있으면 충분하다. 적어도 내겐 충분했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그의 유언-

그는 유언장에 교회의 추도사를 거부하고 자신의 재산을 모두 빈민에게 기부한다는 내용을 썻고

5년뒤 폐렴으로 사망한다. 그날 밤에는 우연히도 천둥과 우박을 동반한 비바람이 몰아쳤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뤄졌고, 200만명의 인파가 뒤를 따르는 가운데 그의 유해는

가장 위대한 위인만 묻힌다는 팡테온에 안장된다


그는 영광과 고통이라는 굴곡 많은 생애를 살아왔지만

오히려 이러한 고통 속에서 탄생한 작품들은 모두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
쾌활하고 호탕한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더불어 색정광이었다고.. 심지어 춤도 잘춰 여자를 그렇게 잘 꼬셨다고 한다

당시 굉장히 장수(83세)했는데 그 때문에 막내를 제외하고 모든 가족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참고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는데, 등재 이유는 가장 짧은 편지의 소유자

출판사에 자신의 책에 대한 반응을 묻기위해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 한 자가 끝이었다고 

그리고 그가 물어본 그 책은 바로 레미제라블이다




5위. 콜뤼슈
(1944~1986)


coluche-41447932-4912-440a-b33a-d4fefd3a4ce-resize-750.jpe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웃으시오, 어차피 웃는데는 돈이 들지 않으니깐"


선정 이유 : 위대한 배우, 위대한 사회 운동가

콜뤼슈는 프랑스의 전설적인 배우이자 희극인인 동시에

마음의 식당을 창설해 여러 자선 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이 자선 사업을 누구의 스폰을 받지 않고 자신의 힘만으로 했고

많은 프랑스 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여러 사업들을 함께 진행했다

그러나 1986년 오토바이를 타고 느린 속도로 운행하던 도중

교통사고를 당하는데 안전모를 착용하지 않았기에 결국 전설적인 희극인은 허망하게 가는데

그러나 그의 비극적인 죽음 때문에 프랑스에서 안전모 착용 비율이 늘은 것을 보면

역시 갈 때도 본업에 맞게 예술로 가신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4위. 마리 퀴리
(1867~1934)


다운로드 (1).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만만치 않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단 한가지다. 자신에 대한 확신"


선정 이유 : 위대한 과학자

먼저 짚고 넘어가자면, 마리 퀴리는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폴란드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잃지 않았고

조국을 위해 활발히 활동해, 그녀가 최초로 발견한 원소에 폴로늄이라는 이름을 붙일정도였다

다만 남편인 피에르 퀴리가 프랑스인이었기에 그녀 역시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고, 연구도 프랑스에서 했으며

프랑스를 제 2의 고향으로 여겼고, 사망도 프랑스에서 하고, 유해도 프랑스에 있기에 프랑스의 위인으로 보기도 한다




a096eec7ca328616ed6fc718b69a099baff1ee85.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마리 퀴리

폴란드 출신의 프랑스 과학자이며 방사능 연구의 선구자이자 라듐과 폴로늄 발견을 통해 여성으로는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탔다. 또한 금속 라듐을 분리하여 노벨 화학상까지 탔으며 심지어

아무도 모르던 방사능의 위험성을 모두에게 알리고 죽은 위대한 과학자이자

당대 만연했던 성차별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의 노벨상 수상과 최초의 여성교수, 여성 최초의 의학 아카데미 회원등

인류 역사에 기록된 위대한 여성 중 하나이다
그녀는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는데, 불행히도 당시 폴란드는 독립국이 아닌 러시아제국 치하였다

다만 부모 모두 교사였고, 특히 물리학을 가르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마리는 과학자의 길을 걷게된다

그러나 애국심이 투철했던 아버지는 폴란드어로 답을 쓴 학생의 답안지를 정답으로 처리한 일로

압박을 받아 가정 생활이 불행해지고 맏언니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마리 퀴리는 대단히 공부를 잘하던 천재였지만 당시 바르샤바 대학교는 여성의 입학을 불허했기에

여학생의 입학을 허용하는 프랑스로 유학을 갈 수 밖에 없었는데, 집안이 어려워서 과외를 하면서 돈을 모아

23세가 되어서야 프랑스로 떠났다

뭐 아무튼 애국심이 넘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마리 퀴리는 평생 폴란드의 독립을 원했고

원소 이름에 폴로늄이라고 폴란드의 이름을 붙일정도로 애국심이 투철했으

폴란드를 러시아령으로 만든 장본인인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하자 파티까지 열었다고...




Okt1Bul.pn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대학생 마리 퀴리


뭐 프랑스에 오기전에 과외하던 학생과 사랑에 빠졌지만 결국 그 사랑을 포기하고

마리 퀴리는 프랑스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한다. 

당연히 돈이 없던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마리퀴리에게 다행히도 먼저 프랑스에 있던

둘째 언니인 브로니스와바가 도와주는데, 정말로 아름다웠던 언니는 프랑스의 부자와 결혼했고

형부와 언니는 극진히 마리 퀴리를 대접한다.

다만 마리 퀴리는 부담스럽게 여겨서 하숙을 얻어 독립했는데, 난방도 안되서 추위에 시달리고

돈이 없어서 음식조차 제대로 못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학구열만은 대단해서 물리를 공부하다 너무 힘들면 대수학을 공부했다고...

다만 당연히 이정도로 몸을 혹사시켰기에 결국 영양실조로 실려갔고

언니와 형부는 경악해서 바로 마리 퀴리를 형부의 집으로 끌고가 강제로 스테이크를 먹이면서 울었다고 한다

암튼 독립은 하되 형부가 꽂아준 돈으로 전보다 여유롭게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는 한다

아무튼 소르본 대학에서 물리학과 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해에 35세의 노총각인

피에르 퀴리와 눈이 맞아 소박한 결혼식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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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퀴리는 꽤 잘생긴 외모에도 노총각이었는데, 이유가 여자한테 말을 잘 못거는 펨붕쿤 성격이라...


피에르와 결혼한 이후 본격적으로 방사능 연구를 시작했는데

피에르는 부인의 연구를 성실히 도왔고, 결국 1898년 방사능 물질인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한다

이 업적으로 1903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는데

(여기서 공동수상한 남편 피에르는 처음으로 방사능의 위험을 경고했다)


원래 마리 퀴리는 수상자 내역에서 빠져있었다. 이유는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아니라는 이유

근데 당시 풍조로는 여성의 정신구조로는 과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논리로 여성의 아카데미 가입이 불허되었고

더불어 라듐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육체적 노동이 필요한데 그 작업은 피에르가 대신 해줬고

이 때문에 이게 니 업적임??이라고 비판 받았지만, 남편 피에르는 핵심 연구는 마리 퀴리가 한 것이고

자신은 그저 육체적 도움만 줬다고 하며 미친듯이 탄원서로 올렸고, 겨우겨우 부부 공동수상이 가능했다

이는 여성으로서 첫번째 노벨상 수상이었고, 마리와 피에르는 단숨에 세계적인 천재로 부상했지만....



마리퀴리2-1.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마리 퀴리와 그녀의 두 딸인 이렌 퀴리와 에브 퀴리

그러나 행복도 잠시였고, 비가 내리던 1906년에 피에르가 출근 중에 마차 바뀌에 깔리는 참사로

46세의 나이로 즉사하는 사고가 벌어진다

근데 가해자인 마부가 술이 덜 깬 상태였고, 변명으로 어떤 미친놈이 자살하려고 뛰어들었다고 횡설수설했는데

경찰이 피해자를 보자 신문에서 본 피에르 퀴리와 닮았다고 생각해 소지품을 보고 피에르 임을 확인했고

순식간에 국가적 영웅을 죽인 살인자가 된 마부에게 군중들이 몰려와 죽기 직전까지 패버렸고

경찰이 막지 않았으면 진짜로 죽었을 것이라고... 마부는 위대한 과학자를 죽인 살인죄로 무기징역에 처하게 된다

다만 그의 죽음을 마리 퀴리에게 알려야 했기에 동료 교수들은 난감해다가 결국 직접 집으로 가 마리에게 알려주었고

마리는 그 자리에서 졸도했다고 한다

참고로 지금은 단종된 500프랑에는 마리 퀴리와 함께 피에르 퀴리도 같이 있어 그의 공적을 현재도 인정하고 있다

소르본 대학에서는 방사능 연구를 진행하던 피에르의 공석의 후임자로 마리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었고

마리 퀴리는 최초의 여성 대학 교수가 된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존중으로 자신의 커리큘럼이 아닌 남편의 마지막 강의를 그대로 이어서 수업을 진행했다고..




271A0D3F55506EAC2C.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불륜 의혹 상대인 폴 랑주뱅


아 참고로 마리는 피에르 사후 불륜 의혹에 휩싸인 적이 있었는데

그 대상은 동료 과학자인 랑주뱅으로 고약한 성질을 가진 아내 떄문에 괴로워 했는데

퀴리 부부가 그런 그를 위로해주었고, 마리가 남편을 잃고 괴로워하자 서로 위로해 주자

서로 그렇고 그런 관계로 발전했다고.... 이는 마리가 랑주뱅에게 보낸 편지로 어느정도 사실로 밝혀졌다

그러나 당연히 랑주뱅의 아내는 마리를 죽여버리겠다고 날뛰었고

결국 둘은 헤어질 수 밖에 없었고, 이 사건은 유럽 전체에 전해져 노벨 화학상 까지 못받을 지경에 이르었지만

마리는 어차피 상은 과학자의 업적을 보고 주는거지 사생활은 아니지 않음? 이라는 쿨한 태도로

시상식에 참석했고 노벨상을 다시 수상한다. 그러나 랑주뱅은 평생 그녀를 잊지 못했다고..

동료들도 마리 퀴리의 처지를 잘 알아 옹호는 하짐 못하는 대신에 몰래 숨겨주는 역할을 했는데

참고로 친분이 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ㅇㅇ 그 아인슈타인 맞다)은 애초에 마리 퀴리가 결백하다고 여겨

적극적인 옹호를 했는데, 무려 그 근거가...



141264682928_20141007.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아따 그 누님 성격에 불타는 연애를 한다고?? 그게 말이 됨??ㅋㅋㅋㅋ 웃기는 소리하지 마셈ㅋㅋㅋ"


무려 실제 언론 인터뷰 내용이다... 암튼 마리 퀴리는 언론의 공세에 지쳐 두 딸을 데리고

알프스로 떠나는데 거기서 저명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을 만나서 여러 교류를 했다고

이 옹호 발언도 같이 살아보면서 나온 아인슈타인의 체험에서 나온 거 일 수돜ㅋㅋㅋㅋ

뭐 암튼 여기서 마리 퀴리와 함께 산책하던 아인슈타인은 문득 한마디를 던졌는데


"누나!! 엘리베이터가 허공으로 떨어지면 거기 탄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마리 퀴리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인슈타인의 회고록에 따르면

자신의 생각과 마리의 답을 토대로 이를 통해 일반 상대성 이론의 단초가 되었다고...

아무튼 폴과의 불륜은 이렇게 끝나지만 두 집안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이어지는데

무려 마리의 손녀의 사위, 즉 손녀 사위의 이름이 미셸 랑주뱅인데

성 들었으면 눈치 챘듯이 폴 랑주뱅의 손자이다.

뭐 폴 랑주뱅은 이후에도 마리의 장녀인 이렌 퀴리의 지도교수를 맡았고 퀴리 가문과 교류가 계속 있었기에....


아무튼 금속라듐을 분리한 성과로 마리퀴리는 노벨 화학상을 받았고

이는 서로 다른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유이한 인물로 기록되었다(근데 다른 한명의 수상은 평화상이라...)

다만 프랑스 아카데미는 굉장히 보수적이고 성차별적이라 1911년 아카데미의 후보가 된 마리퀴리를

그야말로 개무시하며 이와 더불어 여성은 영원히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될 수 없다

미친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그러나 마리 퀴리는 이미 과학계에서 거의 정상에 있는 수준이었고

그녀도 뭐래 병신들이ㅋ 라는 반응이었으며, 1962년 이러한 결의안이 폐지되고

처음으로 들어온 여성 회원이 바로 그녀의 제자인 마르게리테 프레이다.




img_20170306171728.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그녀의 사회적 공헌 중 최고의 업적인 이동식 x레이 버스

1차 대전에서 마리는 스스로 개발한 이동식 x레이 버스인 리틀 퀴리를 이끌고

전선에 가서 부상병들에게 도움을 줬는데, 이 때 이것으로 도움을 받은 부상병만 200만명이다

폴란드 정체성이지만 또한 프랑스를 정말 사랑했기에 그녀는 자신의 노벨상 메달까지 팔고 전쟁 수행에 기부하려고 할 정도였고

모전여전, 마리의 딸 이렌도 훌륭한 과학자가 되어 리틀 퀴리의 개발에 동참했다

다만 전재산을 바쳤기에 집안은 그야말로 땡전 한 푼도 없는 신세가 된다



심지어 당시 정말 신의 원소로 여러군데에서 쓰이던 라듐의 특허권을 

라듐은 그저 하나의 원소이며 모든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하며 모든 인류를 위해 특허권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 소식을 들은 프랑스 정부는 위대한 과학자를 너무 막 굴렸다는 자성의 목소리와

그녀에게 접근하는 미국을 보며 뒤늦게나마 연금과 최고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려고 하지만

그마저도 마리는 거부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간 마리 퀴리는 그야말로 국가원수급 예우와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으니

드디어 그녀의 업적에 맞는 대우를 받게된다. 마리는 라듐을 대통령으로 부터 직접 받게되고

귀국한 마리에게 프랑스 정부는 거부권을 박탈하면서 까지 국가 상을 수여한다

심지어 과학 아카데미가 아닌 의학 아카데미에서 이러한 인재가 회원이 될 수 없다는 것에 공분하여

후보 신청도 안한 마리를 자발적으로 추천하고, 후보자들도 자발적으로 사퇴하여 프랑스 과학이 아닌 의학 아카데미 회원이 된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의 숙원이었던 폴란드의 독립을 보고 모국 폴란드에 방문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istockphoto-1149608865-170667a.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프랑스의 위인만 묻힐 수 있는 팡테옹에 피에르와 마리 모두 안장된다

그러나 라듐을 대충 주머니에 넣고 다닐 정도로 계속된 방사능 연구 때문에 방사능에 피폭된 마리는

여러 생리 기능이 망가져 고생을 했고 심지어 인체의 발열 기능까지 정지될 정도였다

그 때문에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평균수명을 생각하면 피폭자 치고는 굉장히 장수한 편이었다

아무튼 그녀의 죽음으로 방사능의 위험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고, 후속 방사능 연구자들은

철저한 방호 장비를 입고 진행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후손 역시 범상치 않은 삶을 살았는데, 장녀 이렌 퀴리는 뛰어난 과학자가 되어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고

차녀 당대의 미녀이자 피아니스트 겸 저널리스트 겸 작가로 활동했고

그녀의 남편(마리의 사위)은 유니세프 활동에 투신하여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피폭당한 언니와 어머니와 달리 100세가 넘게 장수했다고 한다

그리고 손녀인 엘렌 졸리오는 더 나아가 아직도 생존 중이며

프랑스 역대 최고의 핵 물리학자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손자인 피에르 졸리오 또한 프랑스의 생물학의 거장이며 수많은 교수들을 제자로 둔 석학이다

심지어 그의 증손자인 마크, 피에르, 이븐 마저 과학계에 투신했다고 하니 정말 공부는 유전자가 결정하는 게 맞는거 같다

즉 퀴리 가문에서만 5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한 것이다...

그녀의 업적은 시간이 지날수록 재평가되고 또 재평가되어

현재 마리 퀴리는 프랑스와 폴란드의 자랑스러운 위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3위. 아베 피에르
(1912~2007)

아베피에르.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세상에 있는 돈을 가지고 사람을 만들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선정 이유 : 위대한 종교인, 위대한 사회 운동가

프랑스의 가톨릭 신부이자 2차대전 나치에 대항한 레지스탕스이며 

잠시 하원의원을 지낸 정치인이고

평생을 빈민구제운동에 헌신했던 사회운동가로

프랑스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불린다

참고로 본명 앞에 붙은 아베는 프랑스에서 위대한 신부에게 붙히는 칭호이며 뜻은 아버지이다



644540-jpg_443866_1000x667.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자유프랑스군 복무 시절의 피에르



그는 리옹에서 부유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고 16세 때 빈민을 구제하는 수도회를 방문한 후

자신의 진로를 정했고 이후 카푸친 작은형제회의 수사가 되었다

그러나 1939년 2차 대전이 터지자 피에르는 철도수송대의 부사관으로 복무하는데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전하자 바로 레지스탕스로 전환하여 나치와의 투쟁을 실시한다

1942년 나치가 실시한 유대인 대검거 기간 동안 비점령 지역의 유대인들을 몰래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왔고, 심지어 샤를 드 골의 형인 자크 드 골의 탈출도 도왔다고 한다

암튼 그는 프랑스 남동부 산악지대 레지스탕스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그는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주로 사람들의 도피와 국내 레지스탕스들의 지원 역할을 했다

1944년 비시 프랑스 정부가 나치에 협조하여 시민들을 강제로 노역시키자

피에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나서 많은 사람들을 안전한 스위스나 이탈리아로 도피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1944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처형될 뻔하지만 극적으로 탈출하여

스페인으로 건너가 알제리에 있는 자유프랑스군에 합류하여 프랑스 해군의 군종이 되고

카사블랑카를 거점으로 한 해군 함정 장 바트호에서 근무한다

아무튼 그의 활동은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상징이 되었고, 이러한 전공으로 십자무공훈장과 레지스탕스 메달을 수여받는다



220px-Abbé_Pierre_(1955).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정치인 시절의 아베 피에르


전후 파리 대주교의 승인을 얻어 프랑스 국민의회 총선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월급 전액을 빈민에게 기부하는 등의 행보를 보인다

의원으로서 피에르는 반네셔널리즘, 반핵 주의로 프랑스의 식민지 개입에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과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가톨릭에서 부정적으로 보는 해방 신학 계열의 사제와 만나거나 실존주의 계열 철학자나

반핵 운동을 위해 아인슈타인을 만나는 등 여러 활동을 전개한다

뭐 지금 보면 그가 반대한 일들이 다 ㅈ된 것처럼 나름의 혜안과 정세를 보는 눈이 있었다고 평가된다

다만 중도좌파적 성향과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껄끄럽게 여긴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높으신 분들은

깝치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지만, 아베 피에르는 언제부터 교회가 약자들을 무시했냐고 비판하며 행보를 계속한다



2539CD46594845073C.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끝까지 그는 프랑스 내 소수인종에 대해서도 온정적이었고, 그 위험하다는 파리의 할렘가에서도 그 만큼은 안전했다고


그러던 중 1954년 겨울 한파로 파리에서 노숙자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자

그는 엠마우스 운동을 전개하면서 여러 라디오 연설을 진행했고

이에 찰리 채플린이 2백만 프랑을 기부했으며, 운동 본부에 격려 전화와 편지가 쇄도했으며

프랑스 전역에서 자원봉사자 신청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으로 빈민들과 이민자들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는데

엠마우스 지원센터는 항상 문이 열려있었고 침대와 담요, 수프를 무료로 제공하며

오늘 밤에 아스팔트 위나 처마 위에서 밤을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야 합니다라는 캐치프레이스로

프랑스 인들의 존경을 받기 시작한다

거기에 그는 1981년 프랑수와 미테랑이 진행한 기초수입 보장제도의 자문위원회에 참여하여

결국 통과되게 하였고, 프랑스 석간 신문과 함께 6백만 프랑의 모금액과 200톤의 지원 물품을 확보한다

그리고 말년에는 프랑스의 걸프전 참전을 비판하거나, 직접 유엔난민기구 소속으로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 구축을 촉구했다

그리고 2007년 폐렴이 악화되어 아베 피에르는 발드그라스 군사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향년 94세 였다



funeraillesAP.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그의 장례식에는 정말로 수많은 군중들이 참석했고

프랑스 내 갱들은 그날 만큼은 휴전하자고 합의 했으며

심지어 지방에서 파리로 올라오는 기차표가 전좌석 매진되는 등 

모든 프랑스인들은 이 거룩한 성자의 죽음에 슬퍼하였다

그리고 2021년 아베 피에르의 복자 지위 선정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2위. 루이 파스퇴르
(1822~1895)


270px-Louis_Pasteur.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아무도 모르는 내 비밀을 말해줄게, 난 천재가 아니야, 그저 끈기만 있을 뿐이지"


선정 이유 : 위대한 과학자

프랑스 출신의 화학자이자 생물학자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를 뽑을 때 항상 언급되는 인물로

프랑스 국민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과학자이다.

사실상 그의 손에서 이전의 반쯤 신비주의적이었던 생물학이 진정으로 현대적인 과학으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또한 동시대의 로베르트 코흐와 함께 세균학의 아버지이자 백신의 창조자라는 칭호로 불리기도 한다

즉 우리가 현재 맞는 코로나 백신도 기원을 올라가면 파스퇴르의 성과이기에

우리는 파스퇴르에게 수많은 은혜를 지고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images.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노예..아니 대학원생 시절의 파스퇴르


무두장인 아버지와 평범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파스퇴르는

당시로선 희귀하게 교육열이 엄청난 부모님의 지원과 학교 선생의 추천으로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다. 그렇게 물리학 교수 시험에 합격하여

중학교 물리 선생으로 발령 받지만 교수들이 노예...아니 뛰어난 인재를 이렇게 보낼 수 없다며

만류했고 결국 대학에 남아 연구를 계속한다. 이때 선생이 됬더라면 세계의 역사는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아무튼 27살에 조교수가 되었고 화학 결정의 모양, 분자구조, 편광 효과가 서로 관련됨을 증명함으로써

명성을 얻었고, 생물만이 화합물을 생산할 수 있다는 분자비대칭연구의 견해를 내세워

나중에 밝혀지는 생명의 기원에 대한 열쇠를 제공한다



Louis-Pasteur-microbiologist-French-experiment-studies-biogenesis.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저온 살균을 연구하는 파스퇴르

그러던 중 대학 근처의 양조업자가 찾아오며 그의 삶이 달라지는데

효모가 당을 알코올로 바꾸는 촉매를 화학반응으로 안 양조업자는

파스퇴르에게 자기가 만든 술이 왜 시큼하게 변하는 원인을 찾아달라고 부탁했고

딱히 할 거도 없던 파스퇴르는 연구를 하던 도중, 술통에서 채취한 표본을 현미경으로 보자

뭔가 다른 모양의 것을 보게되는데, 그것이 바로 세균이다

즉 세균을 처음으로 발견하였고, 그것이 생물이라는 것까지 알아낸 파스퇴르는

백조목 플라스크 실험(안에 멸균된 액체를 넣고 공기가 못들어갈 주둥이를 만들어 놓음)을 통해

그동안 정설이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은 자연발생한다는 이론을 정면으로 반박해버린다

그리고 연구 끝에 저온 살균법이라는 것을 개발했는데, 이는 현재 술과 우유의 유통에도 사용중이며

우리가 우유를 신선하게 먹을 수 있게 한 분이 바로 파스퇴르라는 것이다

그 담에는 맥주의 발효과정에서 효모가 큰 역할을 한 다는 것을 처음으로 입증해

프랑스 맥주 산업의 진흥을 이끌었는데, 정작 본인은 맥주를 잘 마시지 않았다고...





7950b74783.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움직이지 마라 바늘 잘못들어간다

다만 이후 뇌출혈로 쓰러져 몸의 왼쪽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불구가 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는데

독일의 코흐가 탄저균 배양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럼 그 원인 균을 배양했다면

그 균을 없앨 수 있는 약도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는데

참고로 당시엔 세균이 질병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대다수의 사람이 믿던 시기였다;;;

뭐 아무튼 1880년 닭 콜레라 실험 도중 조수가 실험체 닭한테 콜레라 균을 주입하는 걸 잊어버리고

휴가를 갖다와서야 콜레라균을 접종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놀랍게도 닭들은 걸리기는 커녕 건강해졌다

파스퇴를 여러 단계의 실험을 통해 휴가 도중 방치된 콜레라균이 약해진채 닭에게 접종되어 내성이 생겼다는 걸 알아내고

1881년 5월 5일 공개적으로 양들에게 탄저균 백신 접종이 실시되었고 정말로 크게 성공한다

또한 그의 대표적인 업적인 광견병 백신도 이 때 나왔는데, 사실상 걸리면 죽는 병이었던 광견병 백신을 연구중 일때

광견병 걸린 개에게 물린 9세 소년 조제프 메스테르와 그의 아버지가 찾아왔는데

일단 동물실험은 성공했지만 인체실험은 아직 해보지 않아 불안정한 단계였다

그러나 치사율이 100프로 였던 광견병이었기에 위험을 감수하고 소년에게 접종했고

조셉은 병을 이겨내고 면역을 갖게된다. 즉 걸리면 그냥 병풍 뒤에서 향이나 맡아야 할 정도로 100프로 치사율을 가졌던 광견병은

파스퇴르 덕분에 빠른 시간내에 백신을 접종하면 완치 되는 질병이 되었다

파스퇴르는 1895년 사망했고 그의 묘는 그가 세운 파스퇴르 연구소 지하에 있다고 한다


+
그에게 목숨을 빛진 조셉은 평생 파스퇴르 연구소의 관리인으로 일한다

이러한 업적에도 인간적인 부문에서는 꽤 밥맛이었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적으로 만들었고 

죽을 때까지 모난 성격을 고치지 못하고 우울증에 걸렸다고 한다

그렇게 위생과 세균에 집착했지만 그의 딸 대부분이 세균성 질병으로 사망한다

그의 적들 중에는 곤충박사님 파브르도 있는데, 가난한 파브르에게 대놓고 꼽을 줬다고 한다...





1위. 샤를 드 골
(1890~1970)


5wjftegkcbn01.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프랑스는 전투에서 졌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전쟁에서 지진 않았습니다."


La France a perdu une bataille, mais la France n'a pas perdu la guerre.


선정 이유 : 위대한 군인, 위대한 정치인

프랑스의 군인이자 2차 대전 시기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서 대독 저항 운동을 지휘했으며

나치의 압제에서 프랑스를 해방시킨 영웅이자 전후 프랑스의 재건을 주도한 인물

사실상 현대 프랑스의 국부이며, 20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거인이라는 이의가 없을 정도이다

심지어 최신예 항공모함과 수도 파리에 위치한 최대의 공항에 그의 이름이 붙을 정도이다.



0fec5e7c49d0028f522d20cd9a68d5a8.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사관생도 시절의 드골

드골은 프랑스 북부 공업도시인 릴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은 벨기와의 접경지역으로

다른 프랑스 지역과 달리 프로방스 특유의 엄숙한 개신교 문화의 영향이 강해

드골은 금욕적이고 노동중심적인 문화에서 자랐으며 이 탓에 드골은 다수 프랑스인들과 문화적 거리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70년 보불전쟁의 치욕만은 항상 그의 마음 속에 있었고, 패배의 굴욕을 갚기위해

군인의 길을 선택하는 등 이때부터 강경 프랑스 민족주의자로 성장한다

사관학교에 진학했지만 에고가 강한 성격과 큰 키로 동기들에게 아스파라거스라고 놀림도 받았지만

1차 대전이 발발하며 보병 소위로 임관한 드골은 프랑스군의 영웅인 필리프 페텡 대령 휘하로 들어간다

거기서 그는 최악의 살육전인 베르됭 전투에 참가하지만 부상을 입고 32개월간 독일군의 포로가 된다

그는 5번이나 탈출을 시도하지만 키가 196CM에 달했기에 너무나도 눈에 띄었고, 맞는 옷도 없어서

번번히 실패했는데, 당시에는 그래도 장교 출신 포로 대우가 좋아서 걍 독방행으로 끝났다고..

종전 이후 육군 원수가 된 페텡의 부관으로 복무했지만 너무나도 에고가 강해 오만하다고 까지 평가받는 성격떄문에

10년 이상을 대위로 머물지만 페텡의 천거로 소령으로 진급한다

이 때의 기억으로 드골은 2차대전 종전후 나치의 괴뢰 정부 비스 프랑스의 주동자로서 재판을 앞둔 페텡에게

"한 때 저의 모범이고 상관이었던 각하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지셨습니까"
라고 한탄하고, 구명운동을 벌여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형기를 낮춰 그의 목숨을 구해준다



뭐 아무튼 모난 돌에 정 박는다고, 프랑스 육군의 견제를 정면으로 받았고

뛰어난 실적에도 부대가 해체되기도 한다

그러나 히틀러 집권 이후 전쟁 가능성을 가장 높게 보던 드골은 

전차 집단 운용 사단 4개와 기계화부대, 지원 포병과 근접항공지원 원활화를 위한 통신/보급 능력을 갖춘

10만명 이상의 기동군을 전략 예비대로 활용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는데

이는 기갑전의 달인인 독일군도 시도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얼마나 그의 전략적 식견이 높았는지 알 수 있다



180820_r32597.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그러나 마지노선을 맹신하던 보수파와 기동전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수뇌부는 이를 무시했고

그나마 드골을 위시로 한 소수의 소장파 장교가 개 ㅈㄹ발광을 해서 프랑스 침공 직전 극적으로 기갑사단 창설 정도로 쇼부를 본다

그러나 결국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했고, 프랑스의 전부대가 밀렸지만 드골이 지휘하는 이제 편성된 4기갑사단은

프랑스군 중 제일 분투했고, 실제로 기가막힌 기동전으로 사령관인 구데리안의 사령부 2km까지 파고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똥꼬쇼에도 무능한 프랑스 정부는 항복을 선언하고, 드골은 씨발 좆이나 까드쇼를 외치며

동지들과 영국으로 망명했고, 이후 에밀 뒤즐리에 제독이 합류하며 망명 정부인 자유 프랑스를 조직한다

그러나 1940년 당시 프랑스의 주력은 페텡이 이끄는 괴뢰정부인 비시 프랑스에 장악되어있었고

식민지도 비시 프랑스를 지지해서 드골의 자유 프랑스는 실질적인 영향력은 전무했다

다만 영국 총리인 윈스턴 처칠은 드골의 잠재력을 보고 유일하게 지원했지만

또 그놈의 성격 때문에 같은 연합국 지도자인 루스벨트와 지원자 처칠과 심각한 갈등을 겪는데

이는 드골이 일부러 그랬던 것으로 그는 프랑스가 독일의 부역자로 낙인 찍히는 것을 두려워했다

또한 루스벨트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가 독재자가 될 것을 우려하여 정식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점차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프랑스 망명인들을 휘어잡는 것을 보고 1945년이 되서야 인정하게 된다

또한 자유 프랑스 해군 원수인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이 암살되며 사실상 자유 프랑스에서 드골을 대체할 인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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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상처 받았습니다. 파리는 파괴되었습니다. 파리는 고문받았습니다. 그러나 파리는 해방되었습니다."

-파리 해방 연설-
(해방된 파리에 입성하는 드골, 다른 요인보다 머리하나는 더 큰 위용을 자랑한다)


또한 특유의 카리스마와 비전으로 북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을 자유 프랑스의 편으로 끌여들였고

이를 통해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프랑스 국가자유위원회를 출범시켜 자유 프랑스를 연합군에 일원으로 공식 편입시킨다

즉 프랑스는 이제 더이상 부역자가 아닌 독일과 전쟁하는 국가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파리 해방이 목전에 다가오자 전후 프랑스 주도권을 위해

미군, 비 드골계 우익 레지스탕스, 공산당과 함께 파리 함락 레이스를 펼쳤고

결국 드골의 자유 프랑스의 2개 사단이 레지스탕스와 파리 시민의 도움으로 파리를 점령하고

드골과 자유 프랑스군은 수십만 파리 시민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개선 행진을 했고, 여기서 해방자 드골의 신화가 만들어진다

이때 비로소 전 연합국 지도자들에게 드골은 프랑스의 정식 지도자로 인정받고 평생 정치적 자산이 된다

뭐 얍삽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는 드골의 나름의 정치적, 전략적 계산이었는데

물주인 미국은 원래부터 자유 프랑스를 연합국의 일원으로 보지 않아서 얄타 회담 같은

전후 세계질서 개편을 위한 중요 회담에서 프랑스를 제외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결국 프랑스 정국을 휘어잡은

드골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즉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드골이 파리를 먹은게 득이 된것이다


그러나 전후 치러진 내각 선정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70프로를 차지하던 프랑스 공산당을 제외하는

악수를 뒀고, 국민 다수의 지지는 중도파나 좌파에 몰려있었으므로 결국 총선에서 공산당이 제 1당으로 올라서며

드골은 그해 말에 깔끔하게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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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70이 넘은 나이에도 풍채가 저 정도였다ㄷㄷㄷ

50년대 중반 까지 회고록 집필들 취미 생활을 즐기던 드골에게 다시 한번 프랑스의 국운이 맡껴지는데...
 

당시 1956년 수에즈 전쟁에서의 패퇴, 58년 지옥같은 알제리 전쟁과 군부 쿠테타 위험으로 사회당 정권이

전복될 위험에 처하자 그는 알제리는 프랑스의 것이다!!를 외치며 우파와 중도파의 압도적인 지지속에

4공화정을 무너뜨리고 5공화국을 수립해 프랑스의 대통령이 된다

참고로 4공화국 병신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2차대전의 모욕을 잊기위해 식민지에 집착했고

베트남에서 그 전비를 다 쓰고도 디엔비엔푸 전투로 강제로 쫓겨났고

이에 아프리카의 4분의 1인 프랑스 식민지 전역에서 독립요구가 빈발했으며, 특히 프랑스의 본토로 인식한 알제리에서는

아예 무장 독립 운동이 벌어졌는데, 프랑스군은 이를 나치독일 뺨치게 잔혹하게 진압하는 등 상황이 개판인 상태였다

여기에 중도파 사회당 내각은 알제리와의 타협을 주장했지만, 당연히 야당인 극우파와 군부는 쿠테타 위협까지 할 정도였고

이에 4공은 저 미친개들을 제어할 유일한 인물인 드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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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어러분 파리는 안전합니다!! 생업에 종사해주십쇼

그러던 와중 쿠테타군이 코르시카를 점령하고 남프랑스에 상륙해버리고, 이미 2차대전과 베트남, 알제리 전쟁에

따른 군사비로 경제는 엉망이었고, 외환보유고는 이미 바닥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드골은 정복을 차려입고 TV 연설을 하며 국민들에게 호소했는데

이거하나로 그는 정권 자체를 무너뜨리고 의회 해산과 헌법 개정, 임시 정부 수반 자리를 쟁취한다

당연히 좌파들은 총궐기해서 제 2의 나폴레옹이다하며 시위에 나섰지만, 생각해보면 결국 드골이 없으면

공산당이 다시 집권하기에 사회당과 제도권 좌파, 중도세력들은 드골의 집권은 작은 불행이나, 공산당 집권은 악몽이다

라는 결론을 내려 드골의 집권을 인정한다

당연히 군부와 우파, 중도파는 으역시 드골 행님이제를 외치며 당연히 알제리 독립 요구를 묵살할 줄 알았다

그러나 드골은 희대의 명연설인 "나는 여러분을 이해했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알제리를 독립시켜버린다

사실 드골은 누구보다도 알제리 독립에 부정적이고, 최소한 속령이라도 만들고 싶어했짐나

그는 현실을 냉정히 직시했고, 이 모든 막장 상황의 해답은 식민지 독립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드골은 아프리카 식민지들의 독립을 용인했고, 이미 전 국민적 지지를 받는 드골마저 군부는 재낄 수 없었다

다만 식민지에서 나올 때 영연방 같은 프랑스 연합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기구를 창설했는데

이 때를 시작으로 프랑스는 아프리카에 전방위적인 영향력을 가지는데, 사실상 신 제국주의라고 불릴 정도로 강한 것을 생각하면

드골의 선택은 식민지 독립이라는 명분과 영향력 투사와 관리비 절감이라는 실을 제대로 챙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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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유럽연합의 시초라고 평가되는 서독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와 드골의 만남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독일인이 선정한 위대한 독일인 1위에 등극한 현대 독일의 국부다)

드골은 또한 유럽주의자이기도 해서 사실상 유럽을 제치고 최강대국이 된 미국을 견제하려고 했고

이를 위해 유럽 경제 공동체을 발족하거나 독자적인 핵무장, 미국의 시다바리인 나토 탈퇴등

위대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민족주의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는데, 이 과정에서 불구대천의 원수이지만

실익을 위해 독일과 협력했다. 이는 드골도 프랑스 혼자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적합한 파트너를 서독으로 정했는데, 이는 패전국의 오명과 프로이센식 독자 노선이 아닌

서유럽 세계로의 완전 편입을 목표로 한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와의 이해관계가 맞아들어간 것이다

서독의 본으로 날아간 드골은 아데나워 총리와 오랜 갈등 관계를 종식하고, 경제와 외교 분야에서 협력하자고 합의한

독일-프랑스 화해협력조약을 맺는다

그래서 이 때를 시발로 해서 불구대천의 원수인 독일과 프랑스는 최고의 협력국으로 바뀌게 된다

아 참고로 동맹인 영국을 ㅈㄴ 싫어했는데, 영국은 미국이 유럽으로 침투하는 교두보로 생각했고

결국 영국이 택할 길은 유럽보다는 미국임을 알고 있었기에, 영국이 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하려고 할 때마다 거부했다

뭐 브랙시트를 생각하면 드골의 예측이 옳기는 했다



Charles-de-Gaulle-1967.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그렇게 되어 드골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좌파는 반포기 상태였지만 혜성같이 등장한 한 인물이 45프로정도나 득표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프랑스 사회당이 배출한 첫 대통령이자 위대한 프랑스인 순위에 있는 프랑수아 미테랑이다

뭐 암튼 집권 2기에 들어선 드골 내각이지만 프랑스 퀘벡에서 아따 퀘벡 느그들은 프랑스어 쓰는데

왜 캐나다 연방에 있음? 아 자유 퀘백 만세!!!ㅋㅋㅋㅋ 라는 연설을 공식석상에 지껄이며 외교적 결례를 범했고

이때는 꽤 권위적인 통치를 보여주었지만 다른 유럽의 대통령제 국가들보다는 유연한 면이 많았다

그는 자유에 대해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 신문, 잡지 같은 활자 언론에는 관대했고, 르몽드의 설립에도 참여한다

그러나 방송만은 친정부 논조로 철저하게 통제했고, 68운동 때는 보다못한 방송사 직원들이 편집의 독립성을 요구하며

파업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연히 이는 19세기 인물이었던 드골이 방송은 정부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한다는 구태의연한 인식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의 달러 정책에 반대하고 금본위제를 주장하던 드골은 미국과 그 친구들에게 강한 견제를 받았고

닉슨이 달러의 금태환을 중지하며 드골의 인기는 하락했고, 신세대는 권위주의적이고 구시대적인 드골을

혐오했고, 이는 거대한 시대적 물결인 68운동으로 폭발한다

정부는 몇몇 주요 도시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정도였고, 파리 마저도 몇몇 지역이 시위대에게 점거될 지경이었다

근데 당시에 드골은 파리에 없었는데, 그건 도망친게 아닌 서독에 있던 프랑스군 정예부대의 지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시위대는 당연히 드골이 도망갔다고 받아들이고 승리감에 젖었다


838_manig.jpg 프랑스 2채널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아니 이걸 어떻게 막냐고ㅋㅋㅋ



드골은 이미 최고지도자로서 군대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군대에 대한 통제력 확보를 우선시해야 할 정도로

매우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고, 프랑스군 헌병대 전원이 폭동 진압에 투입되었으며

프랑스 기갑부대들은 국방부의 명령에 따라 대도시들을 포위하며 계엄령 확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드골은 끝까지 군대에 대한 통제권을 쥐면서 상황을 진정시켰고

총선에서 드골파가 압승, 그것도 개헌이 가능할 정도로의 초압승이었다.

뭐 당연한 결과인게 드골 정권을 붕괴직전 까지 몰아넣은 68운동의 주역은 학생이었고

걔네는 투표권이 없었다. 또한 반드골로 뭉친 정치세력들에게는 드골급의 카리스마를 가진

구심점이 없었고, 결국 통일된 리더를 가진 드골파에게 썰리게 된것이다

다만 드골 역시 리더쉽에 큰 타격을 입었고, 여러번 사임을 건 국민투표로 무마했지만

1969년 국민 투표가 부결되자 더이상 국민 여러분이 신임하지 않는 다는 다고 판단해 깔끔하게 사임한다

그의 사임이 얼마나 깔끔했는지 그를 아직까지 욕하는 반대파조차 그의 사임만은 정말 민주적이고

영웅적이었다고 인정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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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대영웅이 묻힌 무덤에는 그저 그의 이름만 적혀있다
이후 사저에서 회고록을 출판한 이후인 1970년 드골은 타계한다

대영웅 드골은 당연히 팡테옹에 묻혀야 했지만, 드골은 스스로 내 고향인 콜룽베에 묘를 마련하고

가족과 주민들만 참석하며 묘비도 내이름과 연도만 쓰라고 한다

그러기에 그의 무덤에는 그의 이름과 연도만 쓰여있다

드골은 정치적 야심가이고 독선적인 기질의 소유자였다

또한 좌파에 대해서도 경계하여 많은 것을 놓치거나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최선을 다해 거대악 나치에 항전한 애국자였으며

1세계의 이익을 가지면서도 비동맹 노선을 확립한 외교는 프랑스의 국익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무리하고 시대착오적인 식민주의에서 탈식민화로 전환 한 것 역시 드골이다

그가 권위주의적 독재자의 면모를 보인 것만은 사실이나 그는 국민의 인권을 탄압할 정도로 막 나가지도 않았고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반대세력을 그대로 나두었다.

또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투표권을 확대했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해 대체복부를 신설했으며

자신의 독점적 권력을 분점하는 이원집정부제를 채택하여 국회의 역할을 늘렸고

결선투표제를 신설해 양당제의 한계를 극복하는 등 민주주의로서의 면모도 많이 보인다

이는 그의 라이벌인 처칠이 전시수상의 성격에 강하다는 것과 대비되는 것으로

프랑스 사상 최악의 혼란기에 걸맞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진짜 명과 암이 갈릴 지언정 드골은 하늘이 프랑스를 위해 내려준 인물인 것만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
참고로 이사람의 아들인 필리프 드골 제독(1921년 생)은 아직 생존해 있다

참고로 가족들도 상대하기 힘든 완고한 인물이었지만, 애정을 표정하는 편지만은 굉장히 많이 보냈고 문장도 이미지와 달리 부드러웠다고..

그리고 둘째 딸 잔느가 다운 증후군이었는데, 당시 애를 버릴 정도로 취급받던 다운증후군 딸을

평생 아끼고 사랑했으며, 딸이 스스로 비정상이라고 여기지 않도록 주변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고

다만 다운증후군 떄문에 딸은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그리고 드골은 자신의 무덤을 딸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정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