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교과서의 고려 영토


솔직히 사료적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위 지도는 납득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일단 가장 기본이 되는 『고려사』의 기록을 검토해 보면, "서북은 그 이르는곳이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으나 동북은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라고 분명히 적혀있는데 그것부터 맞지가 않음. 이외에도 모순이 되는 기록이 한두가지가 아니며 각종 기록의 가부를 따지기 전에 일반 상식선에서 생각을 해 보아도 당시 거란/여진/몽골 등 세계 최강국들을 상대로 수십만 대군을 동원해가며 대전을 벌인 나라라고 보기엔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작은 영토임. 

결정적으로 위의 지도는 일제시대 악명 높은 식민사학자였던 "쓰다 소키치"가 한반도 내 각지의 지명을 짜맞춘 뒤 임의로 그려놓은 것을 국내 사학계가 별다른 수정/검토 없이 그대로 답습한 것에 불과할 뿐, 어떤 치밀한 고고학적 검증으로 만들어진 지도가 아님. 참고로 쓰다는 한사군 한반도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부정설, 임나일본부설 등 현재 사학계에서 폐기된 각종 괴설의 주창자일 뿐 아니라 고려초 명신이었던 "서희 장군이 고려의 영토를 사기쳤다"는 기괴한 괴설을 지어내 퍼뜨린 장본인임.

그렇다면 이런 악의적 의도의 프로파간다를 배제한, 전성기 고려 시대의 실제 강역은 과연 어느정도였을까? 
기존의 상식?을 크게 뒤엎는 주제이기 때문에 글의 신뢰도를 높이는 차원에서 공신력 있는 백과사전의 내용을 인용해 보고자함. 






- 고려가 북진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한반도 북부 지방에 여진족이 살고는 있었지만 이들은 정치적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또한 이곳은 아직 요나라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정치적 공백지대였기 때문이다. 

- 덕종 때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의주로부터 함흥의 도련포(都連浦)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는데.. 천리장성이 고려의 강역이 아니라 제2의 방어선이었고, 문종 때에는 장성을 넘어 동북쪽인 함경도 지방에 성과 진을 구축함으로써 강역을 확장해 갔다.

- 그리고 여진족의 귀화를 받아 그 추장들에게 관직을 하사하고 그 지방의 자치를 여진족에 허가하였다. 한편으로는 진과 성을 쌓아 군대를 주둔시킴으로써 이곳을 그들의 조공을 받는 기미주(羈糜州)를 삼아 강역을 꾸준히 넓혀갔다.

- 문종 때 여진족이 주군(州郡)의 설치를 요청해 와서 천리장성 너머 함경도지방에 설치된 기미주는 15주에 달하였다. 

- 1107년(예종 2)에 3년간 준비한 별무반 17만을 윤관이 인솔하고 공격하여 승승장구 승리를 거듭하고 이른바 9성(九城)을 쌓게 되었다. 그러나 9성은 단순한 성이 아니라 행정력을 가진 주와 진의 설치로서 현재까지 기미주로 확보되었던 지역을 직접 통치화하였음을 뜻한다. 9성 환부는 영토의 포기가 아니라 직접 통치에서 이 지역에 대한 자치를 허용한 것으로 기미주로의 환원이라 할 것이다. 이는 그 뒤 1111년에 9성 북쪽인 길주에 중성(中城)과 공험진산성 등은 직접 통치를 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요지는 고려에서 장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 그런데 9성의 현재 위치에 대한 학설은 공험진에 대하여 대립되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고려사』·『동국여지승람』 등이 편찬된 조선 초기에는 공험진의 경계가 두만강 북쪽 600여 리에 다다랐으며 선춘령(先春嶺)에 윤관의 경계비가 세워졌다는, 당시 거주민인 여진족이 전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조선 초기의 윤관이 경계비를 세웠다는 기록을 날조된 것으로 해석하고, 함흥 부근의 옛 성터에 자의적으로 비정함으로써 그 위치를 남쪽으로 축소시켰다. 특히, 공험진을 함흥 남쪽에 비정하였다.

- 김구진(金九鎭)은 조선 초기의 문헌 자료가 진실성을 전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출발하여 공험진이 두만강 600리 지점에까지 미쳤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고려 시대 윤관이 설치한 9성은 전혀 근거 없는 곳에 새로이 개척한 것이 아니라 이에 고려의 세력이 미치고 있었던 기미주였음을 주장하였다. 그의 설은 여진족에 대한 깊은 이해 위에서 썼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공험진의 현재 위치 문제와 두만강 북쪽 600리 지점에 공험진비와 선춘령비가 세워졌다는 문제는 앞으로 현지 답사를 통하여 좀더 신중하고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강역(彊域))]
링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1279




비록 남북이 분단된 상황 및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로 인한 현지 답사의 어려움과 고고학적 연구가 미진한 탓에 공험진의 위치를 확언하지 못하고 문종 대에 설치된 기미주 역시 함경도 일대로 비정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보이고 있으나, 최소한 고려의 강역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교과서의 축소된 지도를 부정하는 논거를 제시해 준다. 참고로 러시아의 고고학자들은 유적 발굴을 통해 고려의 영토가 연해주까지 뻗쳐있었음을 밝혔는데..(출처 기사: https://www.asiae.co.kr/article/2017111916013612156) 즉 모가 됐든 도가 됐든 간에 교과서의 고려 영토보다는 컸다는 뜻. 그럼 마지막으로 몇가지 기록들을 제시하며 모든 근거를 종합한 전성기 고려시대의 합리적인 영토를 알아보고 끝마치도록 하겠다.

★ 왕건이 신라와 백제(후백제)를 격파하니 이에 왜, 탐부, 환어라, 철륵 등 동쪽의 오랑캐 여러 나라가 모두 두려워하여 고려의 속국이 되었다. 『남당서 권18 고려조』

★ "만일 국경을 정하고 관방을 설치하면... 땅이 끝없고 번인 가구도 잇달아 거주하여 변방 끝까지 모두 요새를 설치할 수 없으니, 요청하건대 영외의 여러 번인이 모두 주현이 됨을 기다려서 그 뒤에 점차 멀리 있는 번인까지 미치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이륵 허락하였다. 『고려사 문종 27년』

★ "고려는 바닷가에 나라를 세워 그 영토가 북쪽으로는 용천(龍泉),12) 서쪽으로는 압록강까지 펼쳐져 있으며"
12)용천: 발해의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용천부는 지금의 중국 길림성(吉林省) 용안현 동경성(東京城)이다. 『고려사 숙종 2년』
 
★ “고려는 만리나 되는 큰 나라[萬里之國]이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정벌을 하러 갔어도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그 나라의 태자가 나를 찾아왔으니.." 『고려사절요 원종 원년』



전성기 고려의 영토 




전성기 고려의 영토2


한줄 요약: 교과서 고려 영토 개구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