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팬픽은 상상에 기반한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사건, 지명, 단체는 실제의 그것과 전혀 무관하고,
만약 일치하더라도 단순한 우연에 불과합니다.

"사나야... 우리 가족이 몇이야?"
기억도 흐릿한 어린 시절 아버지가 했던 질문.
"네 명!"
사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고,
아버지는 잠시 눈가를 꾹꾹 누르더니 사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 아파!"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한참을 발버둥 치던 사나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버지의 눈물이 사나의 어깨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우리 식구는 셋이야. 저 여자는...
저 여자는... 우리 식구가 아니야."
아버지는 한참을 사나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사나는 늘 아버지를 따라다니는 그 여자가 궁금했지만,
아버지가 슬퍼하시기에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그 후 사나가 성장할수록 그 여자에게 느껴지는 이질감도 강하게 느껴졌다.
그때의 사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시하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에 심취하거나,
바비인형에 빠져있을 때도 의식의 한 끄트머리에선 언제나 그 여자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깜짝 놀랄 때도 있었지만 그건 드문 경우였다.
친절하게도 그 여자는 예고와 함께 찾아왔다.
퇴근하신 아버지가 현관을 들어서면 그 여자가 따라 들어온다.
아버지가 늦은 저녁을 드시는 때에 그 여자는 그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안방으로 가면 그 여자도 안방으로,
베란다로 나가면 그 여자도 베란다로 나갔다.
그래서 학교에 있는 낮 동안은 그 여자를 보지 못하니 평온했다.
그 무렵 일기장에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쓴 적도 있었다.
선생님은 초등학교 저학년인 사나를 불러다 놓고,
아버지가 사나 널 괴롭히고 있느냐를 시작으로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물음의 대부분에 사나는 고개를 저었고, 일부러 거짓말을 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 여자에 대해 사실대로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그 후에도 사나는 선생님과 몇 번 독대를 가졌고,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 사이에선 귀신들린 아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아이들이 두려운 시선으로 사나와 거리를 두거나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도 괜찮았다.
잠결에 요의를 느껴 화장실을 갈 때
거실 중앙에 그 여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을 때에도 괜찮았다.
털썩, 주저앉아 오줌을 지렸지만 죽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차라리 빨리 죽어버렸으면... 바라게 된 시기는.
미나토자키
집안의 비밀을 알게 된 조금 더 후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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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그렇게 몇 해가 지나고 사나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사나와 늦은 저녁을 함께 하고 있던 아버지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보이지? 그 말에 사나는 크게 당황하고는 주위를 둘러보는 척 그 여자의 반응을 살폈다.
다행히도 그 여자는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첫 질문 이후 수년간,
그동안 아버지는 암묵적으로 그 여자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들 두 사람만의 비밀.
물론 그 여자는 아버지의 옆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는 중이었지만,
둘 다 무시했었다.
아니,
무시하는 척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아버지의 알 수 없는 물음에도, 사나는 무엇을 묻는지를 알아채고 말했다.
"...보여."
그 여자가 들을새라 작게 소곤대는 사나의 대답에,
아버지는 역시, 하며 한숨을 내쉰 후 말문을 열었다.
"옛날,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원폭으로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어."
전국 방방곡곡 구석에 떨어진 쌀 한 톨까지 쓸어 모았고,
쇠붙이란 쇠붙이는 긁어모아 전쟁을 위한 무기로 만든 전쟁이 패배로 끝났다.
일본은 그 반동으로 급격히 무너지고 피폐의 시대가 들어섰다.
그 당시 청년이었던 할아버지가 살던 마을까지 무서운 허기가 덮쳤다고 했다.
늙은 노인과 어린아이들부터 쓰러졌고,
한번 쓰러지면 누렇게 뜬 얼굴이 시커먼 색으로 변해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고 했다.
"그 때에 마을에 기괴한 소문이 나돌았다."
아버지는 세 시간가량 더 얘기를 이어나갔다.
처음엔 그저 옛이야기인 줄 알고 듣던 사나는,
그것이 은밀한 집안 이야기인걸 알고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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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 가는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서양식 저택에 사는 묘이 가 사람들에 대한 소문.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이유가 그 저택에 사는 악마가 피를 빨아서라고...
소문은 금세 부풀려지고 사람들의 입은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묘이 가 딸내미 말이야..."
"그 아름다운 아가씨?"
"아름답기는 개뿔, 그 계집애... 악마야."
"악마? 뭔 소리야?"
"예쁘기는 무진장 예쁜데,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도 있어."
"글쎄. 그 아가씨가 악마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미쳤다는 사실만은 확실해 보이네."
"아니. 들어봐...
다들 먹을 게 없어서 나무껍질도 씹어먹는 판에,
어떻게 묘이 가 사람들만 부를 누리며 사냔 말이야.
잘은 몰라도 뒤가 구린 거지... 거기다가 난 봤어."
"뜸 들이지 말고 말해봐."
"그년이 밤거리에 홀로 서있는 모습.
달빛을 올려다보던 그년의 시선이... 섬뜩한 핏 빛으로 번뜩이고 있었어."
할아버지는 마을의 건장한 청년들을 모아 지체 없이 저택으로 쳐들어갔다.
"그저 동네에 흉흉한 소문이 돌길래 잘 아는 의사한테 검진 좀 받아보자는데,
뭐가 두렵다고 거절하시죠? 정말... 악마라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악마? 그딴 개소리 집어치우고 썩 꺼져!"
저택의 주인 묘이 아키라는 고함을 질렀고,
할아버지는 두 손을 내밀고 물러났다.
"이보쇼, 잘 생각하십시오. 마을 주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어요.
그저 딸의 검진, 그게 다예요. 내일 저녁까지 생각할 시간을 주겠습니다."
할아버지는 저택을 나가며 묘이 아키라의 뒤에 숨어있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아름다운 그녀의 안광은 소문대로 붉은 핏빛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기다려라, 아이야. 내일 꼭 네 정체를 밝혀낼 테니."
그리고 다음 날 저녁, 모든 것이 사라졌다.
할아버지는 사람들과 다시 저택으로 쳐들어갔고,
완고한 묘이 아키라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자, 생각은 해보셨습니까?"
"원하는게 대체 뭐냐? 돈? 아니면 이 집이냐?
내 딸이 대체 무슨 짓을 했다고 행패를 부리는 거냐?!"
"행패? 하, 마을에 도는 소문을 알고나 있어?
당신 딸이 밤마다 마을사람을 습격한다는 소문 말이야!"
"헛소리 집어치워! 내 딸은 결코 사람을 헤치치 않아!
당장 나가, 죽여 버리기 전에!"
묘이 아키라는 식칼을 번뜩이며 위협했다.
그 옆의 묘이 가 사람들과 저택의 고용인들도 곡괭이며 방망이며 무기를 치켜세웠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읊조렸다.
"묘이 아키라씨. 그저 검진이었어요.
그 단순한 걸... 저는 당신한테 두 번이나 제안했잖아요?
두 번의 제안은... 정말로 무척이지 관대한 거예요.
거부해서는 안 될 제안이기도 했고..."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할아버지와 동료들은 저택을 누비며 물건을 닥치는 대로 부셨다.
묘이 아키라와 저택의 사람들은, 저항하다가 뭇매를 맞아 죽었고.
묘이 가의 안 주인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겁탈 당했다.
안 주인이 마실이라도 나오면,
마을 총각들은 뭇내 묘이 아키라가 부러워 한숨을 짓고는 했었다.
그러나 지금 안 주인은 남편을 죽인 살인자들에게 차례대로 몸을 빼앗기고 있었다.
모든 일을 마친 사람들은 딸을 찾기 위해 저택을 샅샅이 뒤졌다.
안 주인은 딸을 어제 미리 도망 시켰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안 주인의 배를 걷어차며 딸이 있는 곳을 말하라고 강요했고,
이미 견딜 수 없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노출된 안 주인은 할아버지의 거친 발길질에 숨을 거두었다.
"도망쳤다면 어떻게 찾지?"
"도망가긴 개뿔... 마을이 다 한통속인데 지가 어딜 도망가? 집 어딘가에 숨어있겠지."
마을 사람들이 묘이 가의 재물이란 재물은 모두 훔쳐 밖으로 나왔을 때,
할아버지는 저택에 기름을 끼얹고 그 위에 불을 던졌다.
불은 순식간에 저택을 집어삼켰다.
"아무리 악마라도 이 불길을 버티겠어?"
다음 날 화재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경찰들이 할아버지의 집을 찾아왔을 때
저택에서 훔쳐낸 재물들이 집안 곳곳에 보였어도 경찰은 어떤 과정을 통해 그것을 얻었는지 묻지 않았다.
마을 안 모든 사람들이 한통속이었다. 경찰까지도.
단순 화재로 인한 묘이 가의 비극,
모두 그렇게 입을 맞추고 화재의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악마라는 묘이 가의 딸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뇌리 속엔 단 한 가지 생각이 점진적으로 퍼져나갔다.
정말, 정말 헛 소문이었다면...
냉정을 되찾은 사람들은 다시 수군거렸다.
"뭐... 죽은 사람들 중 누구도 피가 빨린 흔적은 없긴 했지."
"쉿, 입 조심해 개새끼야. 너도 공범이야."
"아니. 사실이 그렇잖아?
마을 시끄럽게 짖어대던 고양이나 들개가 좀 사라지는 일은 있어도..."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데?"
"미나토자키 그 새끼 때문에, 괜히 죄 없는 사람들만..."
하지만 그런 사실은 이미 마을에 중요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영웅이 되어 있었다.
허기로 죽어가던 마을이, 탐닉한 재물로 기적적으로 숨통을 텄다.
그 후 할아버지는 가정을 가지고 아버지를 낳았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참회라도 하듯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거나 기부하는 선행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거의 모든 재산을 기부했을 때 할아버지는 앓아누웠다.
앓은지 첫날.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불러다 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죄 없는 묘이 가 사람들을 때려 죽이고,
불태워 은닉한 미나토자키의 죄.
그 후 할아버지는 제발 살려달라고 밤마다 소리를 질렀다.
며칠 사이에 멀쩡하던 생니가 빠지며 급격히 늙어갔다.
"죄,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발... 제발 용서해주세요..."
마침내 헛것이 보이는지 잠도 못 들고 병약한 몸으로 덜덜 떨 때
참지 못한 아버지는 영험하다는 영능력자를 찾아 헤맸다.
저택에 살던 묘이 가 사람들과, 고용인들까지 죽인 사람만 수십이라고 했다.
모르긴 몰라도 원념이 쌓였으리라,
그렇게 찾아 헤맬 때, 한 한국인 무녀가 찾아왔다.
"우리는 일본인인데, 한국인인 당신이 아버지를 위해 굿을 해줄 수 있어요?"
일제시대의 아픔으로 극도의 갈등이 지속되던 시기.
아버지의 물음에 무녀는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종이나 국가 간 갈등과 관계없이 증오와 원한을 없애는 일이 무녀의 의무인걸요.
원념이 깊고 깊어 저주는 미나토자키의 핏줄이 끊길 때까지 대물림될 텐데...
미나토자키 가의 후손들은 죄가 없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미나토자키 가를 지켜드릴게요!"
곧 굿판이 열렸다.
일주일이나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이어진 굿판이 끝나자,
무녀는 탈진해 쓰러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은 자들의 원념은 소름 끼치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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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잠깐만요. 아빠. 어떻게 그런 일이... 그런 말도 안 되는..."
가슴이 푹 꺼지는 듯한 집안의 비밀, 그리고 더한 설명들.
"지금... 그 말을 다 믿으라는 거예요?"
사나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흉측하게 구겨졌다.
아무리 힘을 줘도 바들바들 떨리는 몸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사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동자에 감출 수 없는 측은함이 가득 일렁였다.
"아직 얘기 다 끝나지 않았다. 지금부터가 중요한 얘기야..."
무녀가 죽은 그날 바로 사단이 일어났다고 했다.
바로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기억하기 싫은 끔찍한 밤.
그날 아버지는 밤중에 싸늘한 한기를 느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한 여름인데도 집안 공기가 겨울처럼 싸늘했다.
아버지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할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방문을 열어젖히자...

처음 보는 여자가 할아버지를 내려보며 서 있었다.
그 여자를 처음으로 목격한 아버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주저앉았다.
오줌을 지릴 정도로 무서웠다.
대체 무엇일까, 묘이 가의 망령일까?
호기심은 죽음과도 맞닿아 있다고 누가 그랬던가.
아버지는 끝내 눈을 뜨고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는 할아버지의 얼굴과 팔꿈치 하나의 거리를 둔 채 마주 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할아버지의 목에 뒤엉켜 길게 늘어 틀어져있었다.
스윽, 뼈만 남은 앙상한 여자의 손이 할아버지의 얼굴로 향했다.
그 손이 천천히 할아버지의 얼굴을 어루만질 때,
늘어트린 머리카락 사이로 그 여자의 얼굴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다.
"아아아악!!"
아버지는 비명을 질렀다.
뇌에선 끈임없이 위험하다는 경보음이 울렸다.
심장이 발작적으로 쿵쾅거리고 전신의 털이 거꾸로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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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얼굴을... 보셨나요?"
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잔 건지 기절한 건지 일어나 보니 아침이었어."
붉은 눈동자라는 묘이 가의 딸, 사나는 재차 물었다.
"눈빛도 기억 안 나세요?"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안 나."
"그럼 할아버지는요?"
"그때 돌아가셨다."
"실체가 없던 원념이 무녀의 굿으로 실체를 갖게 된 건가요?"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어..."
"일본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한국인 무녀의 짓일까요?"
"모르겠다고!"
아버지는 식탁을 내리치며 분노에 으르렁거렸다.
그 모습이 무서워 사나는 비명을 지를뻔했다.
"미안하다. 사나야... 얘기는 여기까지다."
그리고 아버지는 고개를 숙이셨다.
그래, 아버지도 억울하겠지...
숙여진 고개에서 떨구어진 눈물이 식탁에 넓게 퍼졌다.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그때,
아버지는 모두 모르겠다고 했지만 단 한가지 사실만은 얘기하지 않으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는 그 여자.
사나는 가만 상상을 해본다.
할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 곁을 머무는 것처럼...
아버지를 죽이면 나한테 오겠지, 라고.
미나토자키의 핏줄이 끊길 때까지 대물림되는 원념.
"하하..."
뇌의 기능이 마비돼 미쳐버린 사람처럼 사나는 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미나토자키의 비밀이었던가.
사람다운 일상을 누리며 사는 것조차 탐닉한 묘이 가의 재물 때문이었나,
그간 두려움에 떨며 욕하고 원망하던 그 여자는,
악마 같은 할아버지로 인해 가족들이 몰살당한 묘이 가의 원념이었던가.
이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겨운 눈물이 사나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이후 미나토자키 사나는,
인간관계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언젠가 다가올 끝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건 사나 스스로에게 내리는 형벌이자 다짐이기도 했다.
미나토자키 사나의 삶은.
그저 숨이 붙어있는 상태를 제외한 삶은.
거기에서 끝나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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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어느새 새벽이 오고 있었다.
하루의 종말.
실낱같은 행복조차 이제 완전히 끝나버렸음을 알리는 그 절망스런 선고가.
"어때, 이 얘기를 듣고도 아직 날 지켜줄 생각이 들어?
번지수를 잘못 짚은 거 아닐까, 동화 속 왕자님이 지켜줄 공주님은...
죄인인 미나토자키의 딸이 아니라, 피해자인 묘이 가의 원념일 텐데 말이야."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진실을 모르고, 아버지에게 무엇도 듣지 못한 채로.
미나토자키와 묘이의 비밀을 외면할 수 있도록 기억을 삭제하고 싶다.
아는 것은 힘이 되지 않고 크나큰 절망이 된다.
몸은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고,
이성은 묘이 가의 원념에 살해당하는 것이 합당한 미나토자키의 운명이라 말해준다.
벗어나고 싶지만,
이 저주받은 운명에 벗어나 평범하게 살고 싶지만...
"왜 말이 없니? 경멸해도 좋아.
잔인한 살인자의 핏줄이라고 욕을 해도 좋아. 뭐라고 좀 해봐!"
사나도 결국 '미나토자키' 사나일 뿐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달라질 수 없는 것이 그렇게 이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다.
잔인하고 슬프게도...
"미나토자키."
무너져가는 사나를 지켜보던 모모의 입이 열렸다.
"울지 마."
사나의 눈물은 이미 멈춰있었고,
울음소리도 내지 않았는데도 모모는 그렇게 속삭이며 다시금 사나를 껴안았다.
새벽 공기에 몸을 떨고 있었던 것뿐이지만 모모는 사나의 절망이 어느 정도인지 느끼는듯했다.
죄.
미나토자키의 죄.
살아있는 마지막 날까지 죄악에 몸부림 칠,
사나에게 내려진 잠깐의 휴식은 모모의 따뜻한 포옹이었다.
죄악에 퇴색된 마음에 선명한 색을 입히고 삶을 향한 이기심을 일깨운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사나는 가만히 모모의 품에 안겨 지독하리만치 깊은 모모의 순수를 느꼈다.
다른 어떤 것이 섞이지 않은 순백 그 자체의 순수함.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로 모모의 마음은 묵직하고 순수했다.
자신 같은 사람은 결코 품을 수 없었던 고결한 감정이 전해져왔다.
사나의 볼을 타고, 참아내던 눈물이 다시금 흘러내렸다.
그녀들은 새벽의 한적한 공원에서 한참을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그 후 모모와 헤어져 등교한 사나는,
태어나 처음 겪는 감정에 고개를 들기 힘들어 책상에 엎드렸다.
두려웠다.
그 여자에게서 느끼는 공포심과는 다른.
난생처음 겪는 생소한 두려움 때문에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비밀을 털어놓지 말 것을.
이제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그 환한 미소가 자신을 향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모모가 자신을 피할까 무서워진 것이다.
그 순간, 생각에 잠겨있던 사나를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톡. 톡.
사나는 책상을 두드리는 그 손을 바라보았다.
손, 자신이 아는 가장 따뜻한 손.
그리고 그 손등에 남아있는 흉측한 흉터.
사나는 고개를 들어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후 사나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사람.
사나의 죄를 깊게 한 사람.
비참함을 보듬어 주었던 사람.
잔인한 사나에게 찾아왔던 찰나의 위안.
미나토자키에게 허락된 짧은 삶을 저주하도록 만든 사람.
단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너의 곁.
고작 그뿐이라는 고백을 속으로만 하게 만든 사람.
"미나토자키."
어쩌면 지금까지의 삶은, 미나토자키.
그 이름을 불리기 위한 여행이 아니었을까, 하는 환상에 젖게 만든 사람.
차마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진심을 이야기해 줄 수 없던 사람.
어둠뿐인 사나에게 내린 한줄기 햇살.
"조금은 잤니?"
그런 모든 것이 되어줄 사람이 사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대체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사나는 그 미소를 바라보며 모모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모모에게 잔인함 외에 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사나는 끝이 날카롭게 다듬어진 연필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번에는 주변의 아이들이 아닌,
모모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