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다는 말을 많이 쓴다. 마치 그것이 객관적 진실이거나 진리인 것처럼 우린 사용한다. 옳다는 것이 전제된 용어이기에 '당연'한 것과 다른 그 무엇은 '틀린'  것이된다. 일본과의 현 상황이라든지 근대 역사 등에 있어서 일게이들의 분노는 너무나 '당연'한 것을 왜곡하거나 선동하는, 그리고 선동당하는 깨시민들에게로 향한다. 그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시국에 일본에 대항하여 일치단결하는 것은 너무나'당연'한 한국민으로서의 의무다. 그것을 반대하는 일게이들은 토착왜구가 되고 공격의 대상일 뿐이다. '당연'한 것이 위치에따라 너무나 '부당'한 것으로 바뀐다.

 

예전 국정원여직원 댓글 사건 청문회에서 어떤 홍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여직원 신상을 물어본 내가 뭔 죄당가요, 고것을 가르쳐줘부린 그 직원이 잘못한것이지라' 라고. 그렇다. 그는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국정원 직원이 잘못이라고 '당연'하게 여기고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합리화나 변명이 아니라 '당연'하다 여기는데 있다. 일게이들은  그걸 보며 '저저저...'했을 것이다. 그렇다. 내입장에선 '부당'이 그놈 입장에선 '당연'이된다. '당연'은 당연히 무죄고 당당한 것이 된다. 신안 섬노예 사건이나 여교사 집단 성폭행 사건에대한 지역주민 반응에서도 그 '당연' 이 잘 드러난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에서  인간의 사고란 것이 얼마나 신뢰할 수없는 것인 지를 잘 볼 수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업식인데 그걸 아주 잘드러내준다. 업식은  사고의 방식이다. 난 자유의지를 믿지않는데 그건 내가 자유롭게 사고한다는 착각일 뿐이기때문이다. 대상과 접촉하는 순간 이미 난 업식의 포로가된다. 괴롭거나 즐거운 마음은 접촉 순간에 동시적으로 이미 일어나있다. 마음은 화나거나 즐거웁기에 그냥두면 그 방향으로 사고는 진행되고 강화되며 더 강력한 업식을 만든다.

 

다만, 우리는 지식, 정보 등으로 그것을 재판단해보려는 사유를 할 뿐이다. 마음은 즐거운데도 사유에서 아니라고 걸러지면 즐거움으로 치달으려는 마음과 행동을 억제할  뿐이다. 이른바 참는 것, 인내, 인욕  되겠다. 여기까기자 자유의지의 한계다. 그런데, 그런 사유들이 '당연'으로 긍정되면 억제는 없다. 그래서 무섭다. 달창,좌파들의 사고는 그런 식으로 긍정되는 업식으로 존재한다. 그건 다음에도 재앙과 관련된 어떤 일에도 똑같이 반응할 것이란 것을 의미한다. 그럼, 일게이는 뭐 다르냐고?

 

존재의 한계가 명확하니 일게이도 '당연'의 범주에서 벗어날순 없다. 다만 일게이들이 칭찬받아 마땅한 것은 정보와 팩트에대해 열린 사유를 조금이라도 더 한다는거다. 즉, 내 개념에대한 반대 명제, 즉 안티테제에대해 열린 자세로 사유를 한다는 말이다. 말은 쉽지만 그게 꽤나 고통스런 일이다. 심하면 이불킥을 하거나 혼자서 빼액 소리를 지르게도된다. 그래도 그렇게 변증법적 합일을 이룬 놈들이 광우뻥 당시에 촛불을 들었다가 지금 일베에서 노는 놈이되는거다. 많이 힘들었을게다.

 

좌파는? 아주 대가리 트인놈, 소위 우두머리 지식층 놈들만 그런 합일을 이루어낸다. 언제? 구소련 멸망처럼 뿌리가 흔들릴 때, 간혹. 나머지는? 그런거 없다. 감성이 업식의 근간이기에 사유는 사치다. 그러다가 지가 사는 집 전세값이 오르거나, 직장을 짤리거나 등등 지 주머니에서 직접 돈이 새나가면 그때서야 변증법적 합일이 아니라 저차원의 '변절'을 한다. 그런데 웃긴건 왜 '변절'했냐고 물으면 '당연'한거 아니냐는 답이 돌아온다. 그렇다, 참을 수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아큐정전은 사실 대한민국에서 출간되었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