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내린 비는 학교가 끝낼 때까지도 그치지 않았다.


우산을 갖고 있는 정연이 같이 가자고 했었지만 사나와 갈 거라며 거절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친구랑 갈게, 라는 사나의 카톡을 방금 확인했다.


나는 사나만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사나는 1학년 때부터 늘 우산을 가지고 다녔다. 햇빛이 비치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나는 우산 같은 건 깜빡하기 일쑤였고, 사나는 비 오는 날이면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곤 했었는데. 사나, 나빠.


한 시간 정도는 더 기다려볼까 하는 생각으로 책상에 앉아서 비가 오는 걸 구경했다.


봄비가 나름 분위기 있는 것 같아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이어폰을 뚫고 들어오는 빗소리. 아침에 한두 방울 가볍게 떨어지던 게 지금은 제법 굵어보였다. 비가 그치지 않으면 어쩌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냥 정연이한테 우산 가져다 달라고 할까.


나는 휴대폰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내려다봤다. 정연이라면 분명 가져다 줄 것 같았지만 왠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귀찮기도 하고.


사나는 요즘 내가 아닌 다른 애와 부쩍 친해진 듯 했다. 묘이 미나라고, 하필 또 같은 일본인이라서 더 친해진 것 같았다.


나는 사나가 걔랑 친하게 지내는 게 싫다. 아까 우연히 만났는데 별 말도 없이 사나 뒤에 매미처럼 달라붙어서 나를 힐끔거리기만 했다. 짜증나. 사나는 내 친군데.


삼십분 정도 기다려봤지만 비는 그대로였다.


나는 가방을 들었다. 이거라도 쓰고 집에 가야지.


가방을 머리 위에 올리고 나왔다. 여름에 예고 없이 쏟아지는 소나기 같은 느낌은 아니어서 그럭저럭 걸을 만 했다, 가 아니라 갑자기 내 옆을 지나가던 오토바이가 웅덩이의 물을 파바박 튀기고 갔다.


왜 비오는 날 오토바이 타고 난리야? 빗길 사고 조심도 몰라? 헬멧 쓰고 비옷 입으면 다야?


덕분에 나는 고여 있던 흙탕물을 한 바가지나 뒤집어썼다. 교복치마며 와이셔츠며 모두 쫄딱 젖었다.


이왕 망한 김에 시원하게 망하려고 가방을 내렸다.


책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가방을 덜렁덜렁 흔들면서 걷고 있는데 비가 뚝 멈췄다. 누가 하늘을 가로막은 것처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하늘이 하늘색이다. 그리고 하얀 땡땡이 같은 무늬도 있고. 




나연 - 야아! 너 이러다 감기 들어!




나는 고개를 돌렸다. 우산을 들고 있는 나연 언니가 보였다. 나연 언니가 만들어 준 하늘이었네. 




나연 - 왜 혼자 비 맞으면서 가? 나한테 연락이라도 하지




눈을 깜빡거리자 머리에서부터 흘러내린 빗물이 속눈썹을 타고 떨어졌다.


묘하게 꾸짖는 듯한 말투라서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나연 언니를 봤다.


나연 언니의 머리도 좀 젖어있었다. 아닌가, 마르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모르겠다.




나연 - 모모야, 너 이러고 집까지 갈 거야?




이 정도의 거리에서 말하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런데 한 우산 아래에 있으니까 더욱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도망갈까.


도망가기도 전에 나연 언니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도망가지 마,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언제 내 마음을 읽은 거야?




나연 - 따라 와




기껏 벗어난 학교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나연 언니가 걷는 대로 졸졸 따라갔다.


우산은 작은 삼단 우산이었기 때문에 어깨가 여러 번 부딪혔다. 우산을 안 써도 좋으니까 조금 떨어져서 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연 언니는 묵묵히 앞만 보고 걸어간다. 문득 나는 나연 언니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데.


나연 언니의 도움으로 체육관 내부의 샤워실을 썼다.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샤워실에 들어가자 방금 전에 누가 쓴 듯 거울에 수증기가 맺혀있었다. 나연 언니가 썼나보다.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며 샤워기의 레버를 돌렸다. 차가운 물. 옆에 서서 물이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리는데 어쩐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젖은 머리를 말릴 수가 없어서 물이 뚝뚝 흐르는 채로 샤워실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모모 - 온니... 나 갈아입을 옷 엄는데. 수건도




나연 언니는 교실에 가서 자기 체육복을 가져왔다. 깨끗한 수건과 함께.


나는 의자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말렸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나연 언니의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나와 조금 떨어져서 앉아있는 나연 언니. 문득 현실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꿈인가?  




나연 - 집 돌아가면 따뜻하게 있어, 알았지? 감기 걸릴 수도 있으니까




지금까지 쭉 생각해봤는데 나연 언니는 말을 참 다정다감하게 하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듣고 있으면 부끄러워지는 느낌이라고 할까.




나연 - 있지... 난 내가 친구 욕심 같은 거 별로 없는 줄 알았다?




나연 언니의 뜬금없는 말에 나는 머리를 말리던 손을 멈췄다.




나연 - 난 학교랑 회사만 다니면서 맨날 춤 연습하고 노래 연습하고, 그렇게 살았거든. 진짜로 친한 친구는 유정연 밖에 없어




문득 처음 나연 언니를 봤던 때가 떠올랐다. 


땀 흘리고 있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던 나연 언니. 열심히 하는 그 모습에 끌렸던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나연 언니랑 눈이 마주쳤다면 다시는 나연 언니를 보러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음료수를 주고 싶어했으면서, 그렇게 나를 봐주기를 바랐으면서.


하긴. 원래 나는 되게 변덕스럽고 이상하다. 나도 날 잘 모르겠는걸.




나연 - 2학년 올라와서 정연이가 어떤 애 얘기를 하더라구. 짝꿍인데 되게 귀엽다고. 말은 별로 없는데 하는 행동이 귀엽대. 생긴 것두




정연의 짝꿍은 개학하는 날부터 나뿐이었고 아직 바뀐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나연 - 너 말야, 모모야




나연 언니가 토끼 앞니를 보이면서 웃었다.


정연이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나연 - 누군지 진짜 궁금하더라. 정연이가 나한테 다른 친구 얘기하는 거 처음 들었거든. 딴에는 나 생각해서 그러는건지 모르겠지만... 나한테 다른 친구들 얘기 잘 안 해, 걔. 그리고 사실 나, 공부 그렇게 잘 하는 편은 아니라서.. 원래 수업 잘 안 들어갔거든. 헤헤




그런 거, 나는 몰랐다.


나는 나연 언니가 처음부터 누구나와 쉽게 친해지고, 잘 어울리고, 누구한테나 다정하게 대해주는 사람인 줄 알았지.




나연 - 정연이 따라서 교실 들어갔을 때, 너 처음 봤어. 유정연 말대로 귀엽더라, 정말. 어쩐지 놀란 너구리같기도 하고. 푸흡




같은 반에서 언니를 만날 줄은 몰랐으니까. 그러니까 놀랐던 거다.




나연 - 나 사실 학교 애들하고 여럿이서 몰려다니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난 학교보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더 많으니까 연습생 애들하고만 어울렸거든. 너희랑 다니는 거 재밌었어




결국, 언니는 내가 그걸 망쳤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걸까?




나연 - 모모야, 나 봐봐


모모 - ..에?


나연 - 그, 정말... 첫키스가 정연이야?




아, 그 소리가 아니었구나.




모모 - 응


나연 - 너 정연이 좋아해..?


모모 - 모르게써


나연 - 그, 그럼... 좋아하는 거 아니면 그러면 안 돼!




나는 꽤 오랫동안 내게 얘기하고 있는 나연 언니를 봤다.


통통한 볼이 살짝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연 언니는 왜 이렇게 예쁘고, 다정다감할까. 역시 나는 언니를 싫어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언니랑 같이 있으면 심장이 쿵쾅거리고 부끄러워져. 나는 그게 싫은데 좋아. 언니는 이게 뭔지 알고 있을까?


그래. 언니가 알 리 없지.











등교를 하다가 교실 앞에서 편지와 사탕바구니를 받았다.


한 손엔 나연 언니의 체육복이 들어있는 종이봉투를 들고 있어서, 양 손이 다 차버렸다.


나는 내게 이 처치 곤란한 것을 준 아이를 보고 있었다. 아이의 하얀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어디 아픈가.




다현 - 어, 언니 좋아해요!


모모 - 에? 나? 왜?




제법 귀염상으로 보이는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나저나 사탕바구니 무거운데, 이거 땅바닥에 내려놓으면 안 되겠지?




모모 - 나는 너 모르눈데...




간단히 말해주고 교실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아, 돌려줬어야 했는데. 그대로 들고 와 버린 걸 책상에 내려놓고 밖을 살폈다.


아이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어쩔 수 없지.


정연이 옆에서 부스럭 부스럭 신경 쓰이는 소리를 내며 사탕 껍질을 까고 있었다.




정연 - 우리 모구리 왔어? 좋은 아침~




눈깔사탕이다. 크기가 엄청 컸다. 정연이 그걸 입에 넣자 한쪽 볼이 불룩해졌다.


그 모습이 심술 맞은 타조 같다고 생각했다. 저 볼을 누르면 어떻게 될까 싶어서 검지를 들었다가, 그냥 내렸다. 귀찮아.




쯔위 - 언니, 단거 많이 먹으면 이 썩어




쯔위가 정연에게 하는 말을 듣다가 흠칫 했다. 어쩐지 요즘 이가 조금 아픈 것 같더니, 단 걸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


정연은 쯔위의 말에 보란 듯이 까드득 까드득 사탕을 씹어 먹다 말고 내 책상 위에 있는 걸 툭 건들었다. 참 못됐다, 똑똑한 동생 말도 안 듣고.




정연 - 사탕 받았네? 누가 준 거야?


모모 - 몰라아.. 모르는 애가 줘써


정연 - 엉? 모르는 애?


모모 - 응




이상하기도 하지.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가끔씩 좋아한다는 말을 듣는다.


안면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하나같이 처음 보는 사람들. 벌칙 게임 같은 건가? 그런데 왜 하필 나야? 나는 모르는 사람이랑 말하는 거 싫은데.


생각을 하는 사이 정연이 내 사탕바구니에서 사탕 하나를 쏙 뽑아갔다. 아, 그거 내 건데. 유정연 도둑놈.


나는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오늘 왜 다들 입에 사탕을 하나씩 물고 있지. 무슨 날인가.


앞에 앉은 쯔위만 빼고 모두 사탕 먹기 바빴다.


뒷문으로 막 들어오는 지효도 사탕이 한 가득이었다.


문득 나연 언니는 언제 올까 궁금해졌다. 음악이나 들어야겠다. 한 쪽씩 이어폰을 꽂고 아까 받았던 편지를 펼쳤다.




「언니, 안녕하세요! 전 김다현이라고 해요.

그동안 언니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완전 귀여워요♡

저도 우리 교회에선 나름 귀엽다는 말 많이 듣는데, 언니보단 아닌 것 같아요.

언니 혹시 교회 다니세요? 시간나면 같이 교회 가실래요?

아, 맞다. 언니 좋아해요! 언니 이뻐요」




나는 편지를 다시 접었다. 기분이 이상해지는 편지다.


편지봉투를 확인해봤다. 아무래도 잘못 온 거 같은데. 모모 언니, 하고 써있는 거 보면 내가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얘는 누구지.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편지를 책상서랍에 넣고 교실 뒷문을 살폈다.


나연 언니 주려고 체육복도 섬유유연제로 향기 나게 빨았는데 왜 이렇게 안 오지. 책상 옆에 기대어 놓은 종이봉투를 들고 체육복에서 나는 향을 맡아봤다. 엄마한테 졸라서 이것만 특별히 따로 빨았다.


드디어 나연 언니가 들어왔다.


애들이 아는 척을 하자 한 명씩 다 인사해주는 나연 언니. 친절하기도 하지. 머리도 대충 드라이 한 것 같은데 예쁘다.


‘나봉쓰’ 하고 나연 언니를 부르는 유정연. 나봉쓰는 뭐야?


나연 언니가 정연을 보면서 ‘유정연, 안녕~!’ 하고 활기차게 인사한다.




나연 - 모모도 안녕~! 오늘 화이트데인데 사탕 많이 받았어?




오늘이 화이트데이라서 그랬구나. 어쩐지 사탕이 너무 많다 했다.


그러고보니 나연 언니도 사탕을 받았다. 그것도 엄청 많이.




나연 - 어? 이거 모모가 받은 거야?




나는 내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바구니를 힐끔 봤다. 짧은 시간에 머리가 빠르게 회전한다.


나는 본능적으로 커다란 바구니를 옆으로 밀었다. 




모모 - 아니. 유정욘 거


나연 - 아, 진짜?




나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정연을 무시한 채 아까부터 주려고 준비했던 종이봉투를 조심스럽게 나연 언니 책상에 놨다.




모모 - 체육복...


나연 - 엥, 벌써 가져온 거야? 천천히 갖다줘도 되는데~! 히히, 고마워




나연 언니가 체육복을 내리다 말고 옷에서 좋은 냄새 난다, 하며 웃는다.


나는 왠지 칭찬 받은 기분이 들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조금 부끄러운 거 같기도 하고.


얼굴이 빨개질 거 같아서 앞으로 몸을 돌렸다.


쯔위의 뒤통수가 보인다. 나는 갑자기, 왠지 쯔위는 나중에 애견카페 사장님이랑 결혼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냥.




나연 - 저기, 모모야... 잠깐만 나와볼래?




쯔위가 한 숙제를 베끼고 있는데 어깨를 두드리는 나연 언니 때문에 자리에서 엉거주춤하게 일어섰다.


저번 같은 짓은 하지 말아야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나연 언니를 따라 뒷문으로 나갔다. 불쑥 내게 내밀어진 것은 복숭아 맛 츄파춥스 하나.


나는 그대로 시선을 올려 나연 언니를 봤다.




나연 - 몰랐는데, 모모 이름이 복숭아라는 뜻이라면서? 사실 더 좋은걸로 주고 싶었는데.. 아침에 갑자기 생각나서 이것밖에 준비를 못했어.. 초라하지? 미안~! 급하게 매점에서 사오는 바람에... 흐잉




나는 다시 시선을 내려 나연 언니 손에 들려있는 그 작은 막대 사탕을 뚫어져라봤다. 도저히 눈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나연 - 나 사실 아까 책상에 있던 게 모모가 받은 거였으면 안 주려고 했거든? 근데, 그... 못 받은 거 같아서, 이거라도...




나는 멍해졌던 것 같다. 나연 언니한테 거짓말을 했던 그날처럼.




나연 - 아... 야, 아니다! 지금 보니까 너무 별론 것 같애! 에이, 씨... 기껏 불러내서 준다는 게 이런 거라니. 이거 그냥 내가 먹고 다음에 더 좋은걸로 사줄...


모모 - 줘


나연 - 아냐! 다음에 맛있는 거 사줄게, 모모야


모모 - ...나 사탕 조아해. 복숭아만 머거


나연 - 아, 진짜?


모모 - 응


나연 - 아~ 다행이다!




사실 나는 어떤 음식이던 복숭아 맛은 잘 안 먹는다. 이름이 이런 까닭에 복숭아랑 관련된 걸 너무 많이 접하다보니 이젠 질려버렸다.


그렇지만, 나연 언니가 주는 거니까 먹고 싶어졌다. 복숭아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