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연 언니는 복도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가방을 챙겨 나간 후 교실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퉁퉁 부은 눈으로 양호실에 한 시간 내내 누워있었다.


양호실 특유의 냄새. 고개를 돌려서 옆을 보니 정연이 입을 벌리고 자고 있었다.


간병인이라고 따라오는 걸 굳이 말리지 않았다. 이젠 그냥, 마음대로 하게 둘 생각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내일이 되면 정연이를 노려보는 내가 있겠지. 솔직히 나도 내가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


양호 선생님은 없었다. 출장 갔다고 들었는데 정연이는 어떻게 문을 열었을까.


몸을 모로 누이고 정연을 본다.


정연이는 건강하게 생겼다. 짧은 단발도 그렇고, 쾌활한 성격도 그렇고 어쩐지 생기있어 보인다. 나연 언니랑은 비슷하면서 뭔가 다른 느낌이지.


아, 나도 모르게 나연 언니 생각을 해 버렸다. 하기 싫은데.




정연 - 이제 안 우네




하얀 시트를 버스럭거리던 정연이 나를 보며 말했다. 코까지 드르렁거리면서 자더니.


나는 아무 말도 않고 그냥 계속 정연을 봤다.




정연 - 왜 그렇게 봐? 떨리게..


모모 - 왜 떨료?




대답 대신 얼굴이 빨개진 정연이 내가 누워있는 침대로 옮겨왔다.


뭐야. 나는 자리가 비좁아져 짜증을 내며 옆으로 움직였다. 나를 지긋이 보며 허리를 감싸는 정연은 어쩐지 변태 같았다.


설마 진짜 변태이기야 하겠어. 나는 팔꿈치로 정연을 살짝 밀어내고 멍하게 위를 봤다. 




정연 - 모구리


모모 - 나 모구리 아니고든?


정연 - 이름만 부르면 좀.. 어색해서 그러지. 너무 진지해지는 것 같잖아. 좀 떨리기도 하고..


모모 - ..? 이름으로 부르눈게 왜 떨료




정연은 내 말에 우물쭈물 하더니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정연의 눈빛이 살짝 이상하다고 느끼는 순간 입술에 더운 김이 닿아왔다.


뭐라고 더 생각하기도 전에 뜨거운 게 닿았고, 뭔가 물컹하고 뜨거운 게 입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정연의 어깨를 꽉 꼬집고 비틀자 그제야 떨어졌다.




모모 - ..모야


정연 - 어, 어? 아니, 그게... 그러니까...


모모 - 이런거 시러. 비켜, 갈거야




벙찐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정연을 버려두고 밖으로 나왔다.


한산한 교정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체육관까지 와 버렸다.


텅 비어있는 체육관. 2층 계단 가장 윗줄에 앉았다.


가만히 입술을 만져봤다. 첫키스. 상대가 유정연이라니. 이게 뭐지.


뭔가 싱숭생숭 기분이 이상했다.


차라리 나연 언니였으면 더 괜찮았을 것 같다고, 조금 생각했다.


아니, 이것도 이상하다.


도대체 뭐야?











나연 언니가 없는 날들에 나는 금방 적응했다. 머물렀던 시간 자체가 짧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3명의 틈에서 편안하고도 귀찮은 학교생활을 했다. 봄은 나른하고 졸렸다.


나연 언니가 앉았던 책상은 교실 뒤편으로 빠졌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나연 언니의 책상을 쓸어봤다.


나연 언니는 그 오랜 시간동안 내 존재도 몰랐으면서, 날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나한테 그렇게 잘해줬던 걸까.




정연 - 모구리




저렇게 부르면 대답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게 바로 한 시간 전이었는데.


나는 정연의 말에 반응조차 하지 않고 그냥 음악을 들으면서 창밖을 봤다.


그러고 보니 유정연은 내 첫키스를 뺏어가 놓고 이후에 아무런 말도 없었다. 역시 이렇게 시시할 줄 알았다. 바보 멍청이 도둑놈아.




모모 - 나욘 온니는 어떠케 지내?




정연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마치 네가 싫다고 했으면서 왜 물어보고 그래, 라는 눈빛이었다. 왠지 처음으로 정연의 눈빛을 읽는데 성공한 것 같아 뿌듯했다.




정연 - 그걸 이제야 물어보냐




나연 언니는 우리랑 다니는 것보다 춤 연습하고 회사에 가는 편이 더 좋겠지.


어차피 나연 언니는 수업 같은 거 듣지 않고 적당히 학교만 몇 번 나오고 졸업해도 아무 지장이 없을 거다.


내가 뱉은 말에 상처 받았을까. 나연 언니를 복도에 두고 들어오면서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올 걸 그랬다. 그게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소심해서 더 이상 나연 언니가 체육관에서 연습하는 걸 구경하러 갈 수도 없었다.


삶이 더욱 무료해진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극성 애견인 쯔위와 목소리 큰 박지효, 변태 같은 도둑놈 유정연. 날 에워싸고 있는 이 세 명은 늘 그렇듯 따분했다. 




쯔위 - 언니. 근데 나연 언니 왜 싫어?




휴대폰으로 강아지 영상을 보던 쯔위가 빙글 몸을 돌렸다. 깜짝 놀랐다. 목 돌아간 줄 알았네. 




지효 - 맞아. 나연 언니가 너한테 뭐 안 좋게 한 거 있어? 나는 나연 언니 괜찮던데




지효도 덩달아 돌아보며 말했다.




지효 - 말 좀 해줘봐. 진짜 궁금해


모모 - 모가..


지효 - 나연 언니가 왜 싫은건데?




셋의 시선이 내게 몰렸다.


순간 나는 너무 당황해서 적당한 대답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나연 언니가 왜 싫으냐고? 내가, 나연 언니를, 왜, 싫어하느냐고? 내가 그런 걸 알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니, 애초에 내가 나연 언니를 싫어하기는 했는지도 아리송하다.


‘싫다고 말하는 것’과 ‘진심으로 싫어하는’ 건 엄연히 다른 거다.




모모 - 내, 내가 온제 나욘 온니 실타고 해써어!?




빽 소리를 지르고 뛰쳐나왔다.


나를 이런 식으로 몰아가는 건 부당했다. 왜 멋대로 내 마음을 단정 짓고 나를 궁지로 몰아넣는 거야.


복도 끝에 와서야 수업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돌아가려는 순간 시작종이 울렸다. 나는 잠깐 갈등하다가 계단을 내려갔다. 애들이 어떻게든 둘러대 주겠지. 


내가 온 곳은 체육관이었다.


나도 참 멍청하다. 오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그리고 의외로 아직 학교에 남아 연습하고 있는 나연 언니를 발견했다.


나연 언니는 평소보다 더 과격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쩐지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연 언니는 늘 밝고 명랑하다고만 생각했지.


춤을 멈추고 스피커를 끈 나연 언니가 별안간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것 같았지만 그럴 리가 없으니까 그냥 가만히 있었다.


나연 언니가 나를 발견할 수 있을 리 없잖아.


하지만 왜인지 나연 언니는 계단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점점 다가오는 나연 언니를 지켜보고 있었다. 살다 보니 참 별일도 다 있지. 




나연 - 히라이 모모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떨렸다고 느낀 건 착각일까.




나연 - 너, 왜 왔어?




나는 그 물음에 그저 눈을 감았다 떴다.


왜냐면 나도 모르니까. 모르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묵비권 행사라는 말도 있잖아.




나연 - 나한테 왜 그러는 건데?




나연 언니의 말을 듣기는 했다. 그런데 각자의 낱말들이 조합되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나한테, 왜, 그러는 건데? 내가 뭘 했다고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나연 - 왜 대답 안 해? 나한텐 말하는 것도 싫어?




정말로 화났구나. 격앙된 목소리가 그걸 알려줬다.


화를 낼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나연 언니는. 내가 오래 전부터 알았던 나연 언니. 내가 동경하던 나연 언니.




나연 - ...난 진짜 모르겠어. 모르겠어서 더 억울하다고!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어? 정연이나 쯔위나 지효 말은 들으면서 왜 내 말은 못 들은 척 하는거냐구! 처음부터 내가 별로였어? 그럼 진작 말해주지 그랬니




나연 언니는 좀 슬퍼보였다. 그래서 나도 슬퍼졌다. 




나연 - 그래서 내가 빠져줬잖아.. 너가 싫다고 해서, 빠져줬잖아! 나는 1학년 땐 바빠서 수업에 거의 들어가지도 못했어. 거기다 다른 애들보다 1살 많아서 쉽게 친해지기도 힘들었고. 진짜 친한 애는 정말 정연이 밖에 없었단 말야! 이번에 쯔위나 지효나 너랑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기뻤는데.. 친해지고 싶었는데...


모모 - 나욘 온니




내 입으로 직접 부른 나연이라는 이름은 생각보다 나를 울렁거리게 했다.


나는 언니가 날 알기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항상 언니를 보러 갔고, 보러갈 때마다 음료수를 샀고, 그게 한 번도 언니한테 전해진 적은 없었지만 그냥 그것만으로도 좋았어. 우리 집 냉장고엔 포카리스웨트가 반찬보다 많아서 혼난 적도 있었다고. 봐, 나는 언니가 날 알기 전부터 언니를 알았어. 언니는 고작,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시간 동안 나를 알았으면서. 내게 화를 내고 있는 거야?




나연 - 그냥 친해지고 싶었던 건데, 왜 몰라? 왜 나만 싫어해!?




나연 언니가 울었다.


친해지고 싶었다니. 나는 그 단어를 멍하게 되새겼다. 어디 먼 우주의 언어 같았다. 나연 언니는 항상 사람들한테 둘러싸여있는 존재였는데.


그나저나 나연 언니는 우는 것도 예쁘구나.


나는 일어섰다. 할 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할 말이 너무 많으면 아무 말도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연 - 야, 어디 가! 무슨 말이라도 해 봐!




나연 언니가 나를 잡아세웠다.


이런 거,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래도 나연 언니니까 그저 그렇다고 해야겠다.


나는 울고 있는 나연 언니를 봤다. 누가 가슴께를 부리로 콕콕 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모 - 파스트 키스, 유정욘이야


나연 - ...뭐?


모모 - 지난 여름 내내 온니 보러 와써


나연 - ...나를?


모모 - 이젠 신경 쓸고 업써. 그리고 울지 마




말이 횡설수설 섞여 나왔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연 언니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




모모 - 미안


나연 - ...뭐가?


모모 - ...저번에 그로케 말한고 미안하다고




거짓말이었어. 사실은 언니 싫어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언니한테 말할 수 없어. 나도 아직 잘 몰라. 모르는 걸 말하는 건 바보 같잖아.


나연 언니는 더 이상 울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내 속을 모두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몸을 움츠렸다. 




나연 - 모모야




평소와 같은 목소리. 나연 언니는 금세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화를 내며 울었던 것은 꿈이었나. 귀신에 홀린 것처럼 이상하다. 그래도 나연 언니의 긴 속눈썹이 젖어있는 채라서 나는 나연 언니가 울었던 게 꿈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무슨 조화지?




나연 - 반으로 돌아가자




나는 나연 언니를 멍하게 봤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