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연이 집 앞에 서 있었다.


분명 카톡으로 영화관 앞에서 만나자고 했던 거 같은데.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걸었다. 가는 길에 안 심심하고 좋지 뭐.


정연이 자동적으로 내 어깨 위에 팔을 두른다. 내가 하지 말라고 했지, 목소리를 높이려는데 문득 정연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왜 항상 반 박자 늦게 발견하는 걸까. 나연 언니를.




나연 - 모모야, 안녕~!




나연 언니가 토끼 앞니를 드러내며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사복 입은 건 처음 보는 거라서 좀 낯설었다.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되게 어색하고, 이상하네.


내가 으응, 하고 말끝을 흐리며 대답하자 나연 언니가 더 가까이 온다.


향수를 뿌렸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달콤한 향이 훅 풍겼다. 교복도 잘 어울렸지만 사복 입은 모습도 귀엽고, 또...




나연 - 나도 같이 가도 돼? 오늘 모처럼 쉬는 날이라서


모모 - 모, 상관엄눈데...




할 수 있는 한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기운이 빠진 목소리가 나갔다.




나연 - 모모야, 나 같이 가는 거 별로야..?


정연 - 에이~! 쑥쓰러워서 그럴 걸? 얘 원래 이래. 모구리, 나연 언니한테 너무 그러지 마




짧은 간격을 두고 둘의 말이 내게 쏟아졌다.


이 둘은 대체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를 바라는 거지. 둘을 차례로 본 나는 양 옆에 서있는 둘을 놔두고 먼저 걸었다.




정연 - 야! 모구리, 어디 가! 거기 아니거든? 이쪽으로 가야 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바보같이 지하철역 반대편으로 가고 있었다. 아, 짜증나.


별로 좋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가자 나연 언니가 살짝 웃고 있었다.


웃지 마, 웃지 말라고. 나도 바보짓 하고 싶어서 한 거 아니란 말이야.


책망하듯 유정연을 보자 손을 들어서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영화관에 오자마자 정연은 표를 끊으러 갔다. 그 사이 나는 영화 포스터를 둘러봤다. 나연 언니와 함께.


나연 언니랑 둘만 있는 게 어색해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입술 끝을 물어뜯고 있었다. 갑자기 따끔 하고 입술이 아파서 손가락을 대니 피가 묻어나왔다.


다행히 나연 언니는 못 본 거 같았다. 손수건 같은 거라도 내밀었으면 나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왜? 그건 나도 모른다.




나연 - 모모는 어떤 영화 좋아해?


모모 - ...아무고나


나연 - 아무거나 다 좋아?


모모 - 웅


나연 - 나는 로맨틱 코미디가 좋더라. 보고 있으면 왠지 두근두근 하지 않아? 히히




나연 언니가 보고 있는 포스터는 남녀가 사이좋게 웃고 있는 거였다. 하지만 정연이 끊으러 간 건 재난 블록버스터 영화다. 난 뭐든 상관없었다.


일요일이라서 영화관엔 사람이 많았다. 나는 바글바글한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넓은 공간에 셋만 있었다면 질식했을지도 몰라.


정연이 콜라 세 개, 나연 언니가 팝콘 두 개를 샀다. 나는 대기 의자에 앉아서 그런 둘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나연 언니가 위태위태하게 팝콘을 들고 내게 걸어왔다. 벌써부터 달콤한 냄새가 풍겨서 군침이 돌았다. 




나연 - 모모야! 내 거 같이 먹을래?


모모 - 에? 나... 나 단 거 시러해


나연 - 아, 진짜? 치즈 맛이나 바질어니언으로 살 껄 그랬나...


정연 - 응? 모구리, 너 단 거 좋아... 아악!




나는 정연의 발을 밟아주고 재빨리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누가 이렇게 자리배치를 해놨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둘 사이에 앉게 되었다.


나중에 들어가려고 잔뜩 날을 세우고 있었는데 어느새 가운데 앉아있었다. 자리를 바꿔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둘 다 자기 자리에 만족하는 것 같아 포기하기로 했다.


불이 꺼진 상영관은 금세 조용해졌다. 정연이 준 콜라를 빨대로 쪽쪽 빨아먹었다.


나는 사실 영화 같은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도 정연이 귀찮게 하니까 보자고 한 거지.




정연 - 와, CG 죽인다... 그치?




정연이 내 손을 마디마디 깍지 낀 채 귓속말 했다.


왜 여기까지 와서 손을 잡고 봐야하는 거야. 나는 그저 잡혀있는 손이 불편했다. 손을 놓으려고 할 때마다 정연이 다시 세게 깍지를 껴왔다. 참 이상한 거에 집착하는 애야.


슬쩍 고개를 돌려서 나연 언니를 봤다.


여러 가지 색이 엉킨 빛이 나연 언니의 얼굴에 비쳤다.


집중하고 있는 옆모습이 춤추고 있는 모습과 겹쳐보였다.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서 얼른 다시 콜라를 마셨다.


콜라 안의 얼음은 쉽게 녹아버려 밍숭맹숭한 맛이 났다.


영화가 끝나고 나니 벌써 다섯 시였다.


나는 얼른 집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푹신한 침대에 파묻혀 자고 싶었다. 어쩐지 너무 피곤한 것 같다.




나연 - 모모야, 우리 집이랑 너네 집이랑 엄청 가깝다?


정연 - 아, 맞아. 한 10분만 걸으면 되더라. 사실 아까도 나연 언니네 집에 있다가 바로 간 거거든




알고 싶지도 않은 사실을 내게 늘어놓는 둘의 얼굴을 멀거니 봤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나연 언니의 머리가 바람결에 살랑살랑 흩날렸다.


그 모습이 꽤 예뻤다. 사실, 꽤가 아니라 많이.


나는 그런 나연 언니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눈치 채지 못 할 정도로 살짝. 




나연 - 집 방향도 같은데 같이 가자~!


모모 - ...




나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나연 언니의 목소리는 너무 밝아서 듣고 있으면 어쩐지 나까지 들뜨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저런 게 미성인가? 저렇게 예쁜 목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나연 - 엥? 왜에? 혹시 뭐 다른 약속 같은 거 있어?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할 말이 없거나 말을 하고 싶지 않으면 입을 다물고 있는 게 특기다.


안녕. 나는 아마도 당황했을 나연 언니를 떠올리며 뒤돌아 걸었다.


사나한테 노래방이나 가자고 해야지.


휴대폰을 꺼내서 사나의 이름을 찾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 와중에도 나연 언니 목소리가 귀에서 자꾸 맴돌았다. 알고 있다. 나조차도 나를 제어할 수가 없어서 멋대로 행동하고 있다. 내가 싫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나 - 모시모시~? 모모링~ 무슨 일이야?




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에서 사나가 경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쯔위 - 언니. 무슨 고민 같은거, 있어?




점심시간에 쯔위가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쯔위의 손에는 ‘개는 개고 사람은 사람이다’ 라는 제목의 책이 들려 있었다.


언제 한 번 빌려서 정연이한테 읽어보라고 주고 싶다.


만날 내 머리를 쓰다듬는 걸 보면 강아지랑 사람을 구분 못하는 게 분명해.




쯔위 - 고민 오래 가지고 있으면 스트레스 때문에 몸에 안 좋대


모모 - 에, 징짜?


쯔위 - 응


모모 - 그럼 어떠카지...


쯔위 - 나랑 애견카페 가쟈


모모 - 에?


쯔위 - 거기서 강아지들이랑 놀다보면 고민 없어져. 좋아요


모모 - ...갠짜나, 다음에 가자




쯔위는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곤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강아지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애견카페에 가서 해결될 일은 아닌 것 같다.


5교시가 뭐였더라. 연습장을 뒤적거려 시간표를 확인했다.


사물함에서 교과서를 꺼내고 막 일어서려는데 정연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교실에 들어왔다. 나연 언니, 지효와 함께였다.




정연 - 우리 모구리 잘 있었어?




내가 흐릿하게 미간을 구기고 정연을 노려보자 입에 덜컥 아이스크림이 물렸다.




정연 - 이거 먹고 기분 풀자. 착하지, 우쭈쭈




퉤 하고 뱉어낼까 하다가 아까워서 그냥 먹었다.


기분은 좀 그랬지만 시원하고 달다.


나연 언니는 손에 젤리봉지를 들고 있었다. 뭐랄까. 저런 것도 먹는 게 좀 신기해 보였다.


나는 아이스크림 막대를 한 손으로 들고 야금야금 베어 먹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지효는 아래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저거 저번에 옆 반 애한테 빌린 체육복 같은데 좀 가져다주지. 물론 내가 알 바는 아니라서 말은 하지 않는다.




나연 - 모모야




내 옆 자리에 나연 언니가 앉았다.


나는 마지막 남은 한 입을 마저 먹고 막대를 질겅질겅 씹었다.


나연 언니 때문에 벌써부터 긴장이 되기 시작해서 시선을 어디 둬야할 지 모르겠다. 눈은 절대로 마주치지 말아야지. 




나연 - 저기,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




나는 나연 언니를 따라 일어났다.


교실 문을 나가기 전 나를 보고 있던 정연과 눈이 마주쳤다. 눈빛이 묘해서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 생각을 떨쳐버리고 나연 언니와 창가에 마주 섰다.


나연 언니의 키는 나보다 조금 컸다. 이제 알았다. 멀리서 보기엔 비슷해 보였는데.




나연 - 모모야, 저기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실수한거나..




나연 언니를 똑바로 봤다. 난감해하고 있는 눈치다.


내가 봤던 나연 언니는 남의 눈치 같은 거 신경 쓰지 않았었다. 나는 나를 몰랐던 나연 언니가 더 좋은데, 더 싫기도 했다.




나연 - 모모가 나 어려워 하니까 나도 조금 불편한 거 같애... 왜 그러는지 말해주면 안될까?


모모 - ...


나연 - 그냥 편하게 말해도 돼


모모 - ..징짜로?


나연 - 그럼~! 내가 잘못한 거 있으...


모모 - 언니 시러


나연 - ..어?


모모 -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마..




나연 언니를 남기고 교실로 돌아왔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멍했다.


자리에 앉기 전 밖을 보니 나연 언니는 아직도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런데 왜 내가 울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 엎드려 훌쩍훌쩍 울었다.


눈물이 멈출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너무 괴롭고, 슬펐다.


이유는 모르겠다.


몰라. 나는 하나도 몰라.


그냥 자꾸 눈물이 나서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정연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나는 정연이에게 안겨 울면서 이 모든 건 나연 언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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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께서 나연이 언닌데 어떻게 같은 반이냐고 물어보셨는데
1편에 이유 나와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