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의 스킨십은 때때로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쉬는 시간에, 맨 아랫줄 끄트머리에 있는 사물함에서 교과서를 찾아 일어나면 어느새 정연이 허리에 팔을 둘러온다.
복도를 걷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뒤에 와서 느닷없이 끌어안는다.
정연은 좀 스스럼없는 타입인 것 같았다.
사나랑 하는 건 별로 거부감이 없었는데 정연이 하는 건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해진다.
이게 당연한 기분인 걸까. 왜 이렇게 어색하지. 덜 친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삼 일째. 요즘 나는 정연에 대한 생각이 많다.
정연은 지금까지 내가 사귀어왔던 친구들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아이였으니까. 그리고 어제, 하루 빨리 정연을 파악해서 익숙해져야 나도 덜 어색할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지효 - 정연이는 어디 갔어?
쉬는 시간, 집에서 간식으로 싸온 사과를 나눠먹고 있는데 지효가 불쑥 물었다.
한참 정연 생각 중에 남의 입에서 그 이름을 듣자 놀라서 조금 콜록거렸다.
아삭 하는 상큼한 소리를 내며 사과를 베어 물던 쯔위가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려 줬다. 그러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애견 잡지를 쥐고 있다.
쯔위는 대만에서 온 애인데, 나보다 한 살 어리다.
듣기로는 공부를 잘해서 한 학년을 월반했다고 한다.
나는 지효에게 ‘유정연이 어디로 갔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라는 눈빛을 보내려고 했지만 이런 건 정연한테나 먹히는 방법이니까. 입 안의 사과를 삼키고 대답했다.
모모 - 에.. 나도 잘 모르겠눈데
몇 번 같이 다닌 것밖에 없는데 벌써부터 세트 취급이라서 기분이 묘해졌다. 우리가 그렇게 친해 보이나.
뭐든 적당한 게 좋은 나는 반에서 중간 무리의 아이들과 놀았다. 발랑 까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누구한테 설설 기는 최하위 그룹도 아닌 아이들.
나는 누구와도 금세 친해질 정도의 사교성이 있지만 굳이 그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작년에도 친한 애들은 많았지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단짝은 사나 뿐이었다. 같은 일본인이라는 공통점이 있기도 했지만, 워낙 성격이 잘 맞았다.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애견 잡지를 보고 있는 쯔위. 턱을 괴고 나를 보며 웃고 있는 지효. 자리를 비운 정연.
나는 내 주변을 둘러싼 이 구도가 이번 학기 끝날 때까지 나를 가둬둘 거라는 걸 운명적으로 예감했다.
어쩐지 기운이 빠져 어깨를 늘어뜨리는데 갑자기 교실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 있나 하고 고개를 빼들고 기웃거리는데 지효가 성큼성큼 걸어가서 밖을 살피고 왔다.
지효 - 수업 들으러 왔나 봐
묻기도 전에 알아서 대답해준 건 참 고맙지만, 주어를 생략해버린 건 좀 그러네.
나는 누가 수업을 듣든 말든 별 관심이 없어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과일을 담아왔던 통을 정리해서 가방에 넣고 있는 사이 뒤에서 정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소란에 정연이 섞여있었던 게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그러려니 하고 필통을 정리하려는데 낯선 목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나는 필통 안에 있는 내용물들을 좌르르 쏟아놓기만 한 채로 고개를 돌렸다.
정연 - 모모야. 너 이 언니 알아?
머리 위로 올라온 손이 기분 좋게 머리를 쓰다듬어줘서 나도 모르게 바보 같은 표정을 지을 뻔 했다.
치워, 유정연. 눈빛을 쏘자 아예 머리를 헝클었다.
이래서 만날 집에 갈 때쯤이면 내 머리가 떡 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정연 옆에 있는 사람을 봤다.
정연 - 얘가 내가 말하던 애야. 귀엽지, 언니. 너구리 닮았어
정연이 오랜 친구처럼 편하게 말을 걸고 있는 주인공은 바로 임나연이었다.
굳어버린 내 얼굴은 풀릴 줄을 몰랐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졸업할 때까지 대화 한 번 못 해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연 - 안녕~! 너가 모모야? 얘기 많이 들었어!
생긴 거랑 어울리는 밝고 예쁜 목소리였다.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누가 딱풀로 입술을 붙여놓기라도 한 건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주친 눈을 먼저 피해버리고 몸을 앞으로 돌렸다.
얼른 필통 정리나 마저 해야겠다. 샤프심 통을 집어든 손이 떨리고 있었다. 왜 이러지?
정연 - 쟤가 원래 저래. 자기 내킬 때만 말한다니까? 근데 그게 은근 귀여워
웃음기 섞인 정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연이 같은 반이라니, 나는 몰랐다. 그 많은 반 중에 왜 나랑 같은 반인거야?
진작 누가 얘기 좀 해줬으면 좋았을 걸. 그러면 이렇게 팔푼이처럼 어버버 거리는 수모는 겪지 않았을 텐데. 물론 아무도 눈치 채진 못한 것 같지만.
수업 내내 나는 내 뒤에 책상을 놓고 앉은 나연이 신경 쓰였다.
다들 페이지를 넘기는 타이밍에도 멍하게 있자 정연이 나를 보며 혀를 쯧 차더니 교과서를 넘겨줬다.
늘 멀리서 보기만 했던 나연이 내 뒤에서 앉아있다니. 어떻게 멀쩡할 수가 있겠어. 나연은 내 동경의 대상이자, 나만의 스타였다.
선생님이 필기를 하는 틈을 타서 슬쩍 고개를 돌리자 나연과 눈이 마주쳤다.
동그란 눈이 살짝 놀란 듯 하더니 이내 살풋 웃는다. 특유의 토끼 앞니가 귀엽게 튀어나왔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푹 숙였다.
옆에서 정연이 왜 그래, 하고 낮게 물었지만 못 들은 척 했다. 정말로 너무 떨려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싼 대형에 나연마저 추가됐다.
나연 언니까지 같이 다니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정연은 나연 언니와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 듯 했다. 서슴없이 장난을 치고 웃었다.
넷이서만 다닐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나연 언니가 들어오자 불편해졌다. 내 안에서는 불편하면서도 설레는, 그런 이상한 감정이 공존하고 있었다.
나는 무리에서 말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애초에 한국어가 능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말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는 게 더 컸다.
떠드는 건 주로 정연이나 지효였고, 나랑 쯔위는 듣거나 리액션이나 간간이 해주는 역할이었다.
사실 듣기보다는 딴 생각을 더 많이 한다. 그건 나연 언니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아니, 생각해 보니 나연 언니가 조용한 건 아닌 것 같다. 반 아이들과는 곧잘 웃고 떠드는 모습을 봤었다.
나연 언니는 특유의 유쾌하고 발랄한 무언가가 있었다.
저번엔 쯔위와 얘기하는 걸 보며 조금 충격을 받기도 했다. 잠시뿐이었지만.
나연 언니 입에서 현재 방송하고 있는 드라마의 남자주인공이 멋있다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지. 아니, 당연한건가? 연습생이니까 연예인에 관심이 많을지도.
나연 언니는 내 앞에서만 조용한 건가 보다.
방과 후에 정연과 함께 나연 언니의 연습을 구경하기로 했다.
나는 아주 당연히 체육관 2층 계단 맨 끝에 앉으려는데, 정연이 내 손목을 덥썩 잡고 아래로 끌었다.
평소에 앉던 곳 보다 한참이나 아래로 내려왔다.
나연 언니의 얼굴이 전보다 훨씬 잘 보였다. 뺨이 약간 불그스름해져 있었다.
정연 - 추우니까 내 무릎에 앉을래?
이 무슨 기가 막힌 망언이란 말인가. 내가 애야?
나는 어이가 없어서 정연을 물끄러미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연의 무릎에 안착했다. 확실히 계단에 바로 앉은 것보단 이게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연이 팔로 허리를 감아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나연 언니를 봤다.
나도 어느 정도는 정연의 스킨십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에, 벌써? 하는 생각에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있는데 정연이 한 손을 빼서 내 고개를 받쳐주었다.
홱 시선을 돌려 정연을 봤다.
정연 - 아직도 추워?
나는 간단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나연 언니의 동작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간결하고 박력있다.
격하게 춤을 추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와 결이 좋아 보이는 머리칼. 기회가 된다면 나연 언니가 진짜 무대에서 춤추는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
전이라면 생판 모르는 사이였으니까 따라다니면 스토커 취급 받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이라면 상황이 다르잖아.
정연은 나를 곰돌이마냥 꼭 끌어안고서 내 등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따뜻하긴 하다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정연 - 모구리
모모 - ...?
정연 - 모모는 너구리 닮았으니까 모구리야
모모 - 모래, 나 너구리 안닮아꺼든?
정연 - 어쨌든. 주말에 영화 볼래?
모모 - 몰라. 생각해보께
나는 정연의 말에 건성으로 대꾸하며 단 한 번도 어긋남이 없는 나연 언니의 동작에 감탄했다.
이렇게 나연 언니가 멀리 있는 게 좋다. 가까이 있는 건 내가 적응을 못 한다.
얼마 전까진 한 번이라도 좋으니 눈길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나연 언니가 가까이 있으니 내가 견딜 수 없었다.
뭐가 견딜 수 없냐 하면, 나도 잘 모르겠다.
모모 - 너 나욘 온니하고 마니 친해?
정연 -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야. 왜?
모모 - 에? 아니 구냥... 궁금해소
내가 정연에게 먼저 뭘 묻는 건 흔한 일은 아니다.
단지 나연 언니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본인에게 직접 물을 용기가 없으니 슬쩍 정연을 떠봤던 것이다.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 나연 언니랑 오래된 사이였구나.
모모 - 나욘 온니눈 남친 이써?
정연 - 남친? 저 언니 바빠서 애인 사귈 시간도 없을걸?
모모 - 그러쿠나..
왜 애인 유무를 물었지. 나는 내가 한 질문 때문에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는 사이 나연 언니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긴장으로 몸이 뻣뻣해졌다.
작년 내내 나연 언니에게 전해주지 못한 채 쥐고 있던 차가운 음료수 캔이 생각났다.
댄스부 연습하는 걸 구경하러 올 때마다 자판기에서 포카리스웨트를 뽑아왔다.
찰나의 순간이라도 눈이 닿으면 전해주려고 했었으나 무심한 나연 언니는 한 번도 내가 앉은 자리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나연 - 왔으면 나 부르지 그랬어~! 그것도 모르고 기다리게 했네
정연 - 언니 춤출 때 누가 부르는거 싫어하잖아
나연 - 히히, 그건 그렇지
나연 언니의 밝은 목소리. 듣고 있는 나까지 들뜨는 기분이었다.
이마에 달라붙어있는 앞머리를 떼어줄까 말까, 하고 있는데 나연 언니의 시선이 똑바로 내게 닿아왔다.
나연 - 모모는 나 춤 연습하는거 처음 보지?
모모 - ...으응
조그맣게 대답을 하는데,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임나연 바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