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입학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 년이 훌쩍 지나갔다.
나는 시간이 빠르다, 빠르다 하는 얘기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한국 온 지도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2학년이고, 내년이면 3학년.
예비 고3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한껏 무거워, 지려다가 말았다.
나는 매사에 걱정이 없는 편이라서 내년이 되어도 그렇게 스트레스 받고 그럴 타입은 아닐 것 같다, 고 말하면 거짓말이려나.
낙천적이긴 하지만 쓸데없는데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니까. 잘 모르겠다. 되어봐야 알 것 같은데, 별로 되고 싶지는 않다.
갑자기 세진 바람에 어깨를 움츠리고 걸었다.
치마를 짧게 입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조금 더 춥다. 저기 앞에 걸어가는 애처럼 목도리라도 두를 걸 그랬다. 그런데 내일 목도리를 두르고 나오면 분명히 날씨가 풀릴 테니까, 그냥 하지 않기로 한다.
아, 안 하면 추울 텐데 하면 안 춥고. 매번 부딪히는 딜레마다. 미리 걱정하는 건 머리 아프니까 내일 아침에 다시 생각해야지.
지금은 코끝이 쌀쌀한 초봄이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 틈에 섞여서 등교를 하는 중이다. 가슴을 졸이면서 선도부 앞을 지나가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잡는다.
나 치마 줄인 거 들켰나. 멀리서 보면 그렇게 티 나지도 않던데 역시 선도부들은 매의 눈이네.
한숨을 푹 쉬고 순순히 반과 이름을 말하려는데 생뚱맞은 애가 서 있었다.
숨을 헉헉 몰아쉬는 폼이 어째 멀리서부터 내 뒤꽁무니만 죽어라고 쫓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일은 없으니까 바로 생각을 접었다.
한 쪽 이어폰을 빼고 쳐다봤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으니 들어주려는 것이다.
정연 - 볼륨 좀 줄여. 너 이러다가 귀 먹는다?
나를 한참이나 보다가 기껏 한다는 말이 볼륨 줄이라는 거여서 기운이 빠졌다.
나는 또 누가 사고라도 난 줄 알았지.
다시 이어폰을 꽂았다. 근데 몇 초 지나지 않아 유정연이 뺏어갔다. 교복 주머니에 넣어놓은 핸드폰까지도. 야, 이 도둑아 라고 눈으로만 말했다.
정연은 내 눈빛을 알아듣지 못한 채 음악 어플을 종료시키고, 이어폰 줄을 빼더니 둘둘 말아서 자기 주머니에 쏙 넣어버린다. 그리고 핸드폰은 다시 내 주머니에. 이어폰이 그렇게 갖고 싶었나.
정연 - 옆에 지나가기만 해도 너 무슨 노래 듣는지 다 들리거든? 그러다가 뒤에서 차라도 오면 어떡해? 그냥 골로 가는 거라니깐, 모모야
뭐래, 가긴 어딜 가.
나는 무시한 채 그냥 걷기로 했다.
음악이 사라져서 귀가 허전하긴 했지만 교실까지는 조금만 더 걸으면 된다. 다섯 걸음 정도 걸었는데 순간 어깨가 묵직해졌다.
시선을 슬쩍 돌리니 정연이 당당하게 팔을 걸치고 있다. 어깨에 손 올리는 거 싫다고 어제 말했던 것 같은데. 한소리 하려다가 아침부터 기운 빼고 싶지 않아서 입을 꾹 닫고 걷기만 했다.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지.
교실에 들어오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자리를 잘못 뽑았다.
아무리 후회하고 스스로를 원망해 봐도 한 번 정해진 자리가 변하는 건 아니니까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가 다시 우울해졌다.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유정연이 옆자리에 앉는다. 앞엔 지효가 앉아있다. 그 옆엔 쯔위가 앉아있다.
어떻게 이렇게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둘러싸일 수 있을까. 신기할 따름이다.
자리 탓인지 첫날부터 얘네랑 엮여서 밥도 같이 먹고 휩쓸려 다녔더니 정신이 사납다.
작년에 사나랑 짝꿍하던 때가 벌써부터 그리워진다. 같은 일본인이라 이야기도 잘 통하고 재밌었는데. 생각난 김에 폰을 꺼내서 사나에게 카톡을 했다. ‘배고파.’ 몇 초 지나지도 않아서 답장이 왔다. ‘매점 콜?’
정연 - 어디 가?
모모 - 매점
분명히 아침을 먹었는데 학교에만 오면 이상하게 또 배가 고팠다.
사나랑 매점에서 만나기로 하고 일어나는데 정연이 따라 일어선다. 나는 최대한 눈에 힘을 주고 따라오지 마, 라는 눈빛을 보냈다.
정연 -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보면 내가 사주고 싶어지잖아. 알았어, 이번 한 번 만이다? 언니가 사줄게, 같이 가자
아니, 어떻게 그 눈빛을 저렇게 착각할 수 있지. 답답해 죽겠다. 어떻게 제대로 알아듣는 적이 없어.
정연 - 우리 모모는 빵 좋아하지?
언제 봤다고 우리 모모래. 나는 그만 좀 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정연 - ...우유도 사달라고? 아, 오늘은 이천 원밖에 없는데... 알았어, 사줄게
나는 오천 원 있거든. 내가 무슨 거지도 아니고.
그래도 사준다는 성의를 굳이 거절하진 않았다.
정연이 사준 빵을 크게 한 입 물고 우물거리다가 우유를 마시려고 빨대를 꽂는데 얼굴이 따갑다. 옆을 봤더니 유정연이 나를 보고 있다.
얻어먹는 처지라서 이번엔 따로 불쾌하다거나 싫은 내색은 하지 않았다. 나도 예의는 알거든.
정연 - 맛있냐? 잘 먹네
그렇게 말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그래. 사실 가장 싫은 게 이거다. 무슨 동물 취급하는거. 내가 사람이지 개야?
따끔하게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빵을 다 먹을 때까지는 참기로 했다. 빵만 다 먹어봐.
옆에서 사나가 동물원 원숭이 쳐다보는 것처럼 나를 보고 픽픽 웃어서 좀 기분이 언짢아졌다.
바나나 우유를 테이블 위에 거칠게 내려놓으려는 순간 정연이 사나한테 말을 걸었다. 덕분에 공중에 떠 있는 내 손이 살짝 뻘줌해졌다.
두 사람이 안 보는 사이 조용히 빨대를 입으로 가져갔다.
정연 - 너가 모모랑 제일 친한 친구야?
사나 - 으응... 왜에?
정연 - 그럼 나랑도 친하게 지내자. 나는 유정연이야. 내 이름 들어봤지?
사나 - ...아니?
정연은 순간 당황하는 듯 했으나 금세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사나의 명찰을 쓱 훑었다.
정연 - 미나토자키 사나? 너도 모모랑 같은 일본사람이야? 기억하기 쉽고 좋다
사나 - 그래, 모...
그나저나 내 이름 들어봤지, 는 뭐지. 이상한 대화다. 같은 반이 되기 전까지는 정연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네.
생각해 보니까 꽤 잦았던 것 같다.
맞아. 작년에 반 친구들이 유정연이라는 애가 좋다는 얘기를 했던 것 같아. 근데 왜 좋지? 나는 잘 모르겠다. 보니까 사나도 그렇게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역시 내 친구야.
아침자율 시작 3분 전에 매점에서 나와 부랴부랴 계단을 올라가는데 정연이 내 손을 잡았다.
나보다 조금 크고 건조한 손. 사나랑 손잡고 다니던 거랑은 느낌이 많이 다르다.
나는 어색함을 견딜 수 없어서 슬그머니 손을 빼버리고 먼저 교실로 들어와 앉았다.
뒤따라 자리에 앉은 정연은 별 말 없이 나를 한 번 슥 보고 내 머리를 헝클었다. 이거 생각보다 신경 많이 쓴 머린데.
정연을 슬쩍 노려보자, 쿡인지 킥인지 모를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머리를 더 헝클어놨다. 에이, 씨.
점심시간에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깨작 하다가 급식실에서 먼저 나왔다.
아침에 너무 무리했나보다. 밥이 잘 안 들어가네, 라는 핑계를 댔더니 정연이 밥을 다 먹어야 더 자란다고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그래서 떳떳하게 가슴을 펴며 ‘나는 더 이상 안자라도 되거든!’ 하고 말했더니 바보 같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정연이 살짝 미간을 좁히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얼른 빠져나온 거다.
날씨는 쌀쌀하지만 햇볕은 그래도 좀 따뜻해서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식사를 마친 애들이 둘이나 셋이서 몰려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애들 사이를 피해 체육관까지 걸었다.
우리 학교 실내 체육관에는 조금 특이한 시설이 있다.
거대한 전면 거울이 벽을 가득 메운 공간이 있는데, 우연찮게 학교 댄스 동아리가 유명해진 뒤부터 생긴 변화였다.
댄스 동아리는 원래 조그만 부실 하나뿐이었는데, 유명해지면서 새로 짓고 있는 건물에 부실을 마련해주기로 했다고 한다.
체육관에 생긴 건 새 건물이 완공되기 전까지 임시로 쓰는 곳이라나.
거기다 나 입학할 때 유명 연예기획사 연습생이라는 사람까지 들어오면서 학교 측에서도 많이 신경을 쓰고 있다, 라는 게 들리는 소문이다. 나는 그런 거 잘 모르겠지만.
체육관 내부가 잘 보이는 2층 계단에 앉았다.
엉덩이가 시리다. 내일도 오게 된다면 쿠션을 가지고 오는 게 좋을 것 같다.
바닥에서 전해져 오는 냉한 기운에 달달 떨면서 연습을 하고 있는 댄스부 애들을 보고 있었다.
신나는 음악에 맞춰서 딱딱 잘도 움직인다. 그 와중에 내 눈은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다.
개성 넘치는 댄스부 애들 사이에서도 유독 돋보이는 사람. 임나연이다.
입학 초부터 JYP 연습생이라는 소문 때문에 크게 주목받은 언니였다. 데뷔를 준비하면서 뭔가 사정이 생겨 1년 늦게 입학했다고 들었는데, 자세한 건 모르겠다.
어쨌든 이목구비도 큼직큼직하고 이쁘게 생겼다.
그리고 생기발랄, 화사한 아우라 같은 게 느껴져서 좀 신기했다. 톡 튀어나온 앞니도 신기하다. 뭐 먹을 때 좋을 것 같아.
나연을 처음 보게 된 건 작년 여름이었다.
보충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우연히 JYP 연습생이 댄스부에 가입했다는 소식에 혹시나 싶어 구경 갔다가 연습하고 있는 나연을 봤다. 그 전까진 얼굴도 몰랐는데, 한 번에 알았다. 저 사람이 그 언니구나, 하고.
체육관 2층 계단 맨 윗줄.
늘 이 정도의 거리에서만 나연을 본다.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도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는 은근히 이런 부분에서 소심하다.
거기다 댄스부는 날마다 연습을 하는 게 아니라서, 오늘처럼 운이 좋은 날에만 볼 수 있다. 스케줄을 알 길이 없으니 그냥 무작정 오는 수밖에.
왜 나연을 보러 오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조금 설레기도 하고.
춤추면서 머리칼이 흩날리는 나연을 보면 무슨 만화를 보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임나연은 진짜 꼭 만화책에서 튀어나온 사람 같았다. 예쁘고 상큼하고, 발랄한 여자주인공 같은 이미지.
여기가 여고가 아니었다면 나연은 애들 사이에서 여왕님이 되지 않았을까. 뭐, 지금도 인기가 없는 편은 아닌 것 같지만.
그치만 뭐. 사실 모든 건 추측일 뿐이다. 아직 대화조차 제대로 나눠본 적 없으니까.
그래도 내가 나연에 대해서 딱 하나 알 수 있는 게 있다.
임나연은 생긴 거랑 다르게 무심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내가 여기 온 게 적어도 백 번은 넘을 텐데 단 한 번도 눈길을 받은 적 없는 걸 보면.
정말로 그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