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386주사파를 정규군, 김대중을 수령님 전사라고 불렀다.

 

[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yotao&logNo=70067563282

 

『우리는 386 主思派를 통전부의 정규군으로 간주했고,
金大中을「수령님의 戰士」라고 불렀다』

 

[특별기고] 제3국 체류 북한 통일전선부 요원의 충격적 폭로고백
월간조선 2005년1월호


『金正日 지령하에 통전부-親北단체-남한 정권이 三位一體로 움직인다.
열린당은 통전부보다 더 잘한다. 對北지원은 對南공작비로 돌아간다』

 

● 金日成은 金大中 집권의 길 열어 주려고 朴正熙 암살 명령, 陸英修 죽게 했다.
● 金正日 정권 연장이 386 정권 연장이고,
金正日 붕괴가 386 정권 붕괴로 이어지는 게 한반도 운명.
386은 지금도 國保法 대상이기에 철폐 추진, 현재가 두렵기에 과거 캐기, 親北 감추려고 親日 캔다.
● 金正日의 경멸 - 『하나 더 있잖아, 대한민국道』
● 金正日이 송호경에게 지시-
『金大中이는 돈을 달라면 돈을 주고, 쌀을 달라면 쌀을 주게 돼 있는 사람이니
대화상대라고 생각하지 말고 10억 달러를 내리 먹여!』
● 李哲禹 의원이 가입했다는 민족해방애국전선은
북한 노동당의 남한內 지하당 조직. 노동당 깃발 金日成 초상 앞에서
충성을 맹세한 것이 노동당 입당의 증거
● 金正男은 親中派. 위조여권으로 제주도 방문
● 金正日 지시 - 『관리 중인 親北派를 공작원으로 포섭하여 활용할 때가 왔다』
● 안기부 해체적 개편과 康仁德 장관 해임은 통전부 작품
● 남측 민족문화작가회의 상대역은 작가가 아니라 통전부 국장
● 한국 민주주의의 첫 과녁은 金正日 정권 타도이어야

장혜영 前 북한노동당 통일전선부 근무

 

『하나 더 있잖아, 대한민국道!』

 

얼마 전 외국순방 길에서 盧武鉉(노무현) 대통령은
北核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국제사회에 강조하며,
『남북간의 체제경쟁은 이미 끝났다』고 선언했다.
과연 이것이 옳은 말이겠는가.
나는 북한 노동당의 적화통일 정책을 제1선에서 실행해 오던 통전부(통일전선부)의 한 일원으로서
최근 김용순 계열 숙청과 관련하여 여러 요원들과 함께 탈북한 뒤
지금 제3국에 머물면서 이 글을 쓴다.
나는 盧武鉉의 무식한 이 말에 『No』라고 대답할 수 있다.

 

金正日은 자기가 부자이기 때문에 북한을 절대로 가난한 나라로 생각지 않는
특이한 자아 절대감이 있다.
바로 거기서 끈질긴 세습정치욕도 나오고 적화통일 야망도 계속되는 것이며,
그래서 수백만이 굶어 죽든 말든 核 프로그램을 완성하기 위해
오늘도 억만금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지금 자기의 의지대로 좌경화돼 가고 있는 한국 현실을 굽어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그 통쾌함을 혼자만 즐길 수 없어 그는 얼마 전 측근들과의 파티에서 불쑥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 道가 몇 개 있지?』

 

모두가 어리둥절해하던 중 아홉 개라는 누군가의 대답에 金正日은 웃으며 소리쳤다.

 

『왜 아홉 개만이야. 하나 더 있잖아 대한민국道!』

 

순간 좌중에 박수가 터졌는데, 그들 중 누구보다 소리 크게 박수를 친 사람은
통전부 제1부부장 임동욱이었다.
그의 손에 든 힘은 무엇이며 金正日의 만족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오늘까지도 내외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통전부內 각 연락소들의 실체와 그들이
어떤 공작차원에서 활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극히 일부만을 증언하고자 한다.

 

북한 노동당 규약에는 이렇게 밝혀져 있다.

「조선로동당의 당면 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고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과업을 완수하는 데 있으며
최종목적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

 

보다시피 북한 노동당의 통일관은 철두철미 적화통일이다.
이러한 야망은 북한정권 수립 이전부터 집요하게 시작됐다.
통전부의 역사적 뿌리는 1946년부터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다.
8·15 광복 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국가안전성 국제정보국 예하에
「소련군 정찰대 극동지부 북조선 파견대」를 조직하고
남한의 좌익세력 확장과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목적으로
1946년 「서울공작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북한 對南공작부서의 원조이다.

 

左右의 첨예한 대결과 끊임없는 분쟁들이 결국 南北이라는 국토분열로 이어지도록
소련의 충견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이 공로와 경험을 토대로
金日成은 1948년 10월10일 黨 창건 후 「서울공작위원회」를 「對南사업부」로 승격시켜
노동당 중앙위원회에 소속시켰다. 철저한 비밀보안과 은밀성을 보장하기 위해
중앙당 본 청사와 분리시켜 他구역에 별도의 건물을 사용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북한 주민들 속에서 신비의 존재로 불려지는 「3호청사」의 유래이다.

 

6·25 전쟁 후 북한은 휴전상태의 체제경쟁에서
최우선 당략을 적화통일로 더욱 절박하게 내세웠다.
그래서 金日成은 중공업을 먼저 발전시키고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병행한다는
「군사 제일론」으로 나라의 모든 정책을 펼쳐 나가는 것과 동시에,
내적으로는 對南공작부서의 기능과 역할을 좀더 세부화·고도화했다.
이를테면 1960년대까지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체제와 경제적 우위를 바탕으로
무장기습에 의한 파괴·와해·교란 등 힘의 정책을 對南戰의 기본으로 했다면,
1970년대부터는 駐韓미군에 의해 한반도에 분열이 정착되어 가는 상황에 맞게
長期戰에 대처한 우회적 전략, 즉 사상·문화적 침투와 인물포섭, 심리전 등을 총괄하는
지능 기능의 전문부서를 만들고 발전시켰다.


金正日이 통전부 지휘

 

 

 

이하는 내용이 길어서 생략 --------------------